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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홀로선 버드나무

< 홀로 선 버드나무 > 36. 연애

by 영숙이 2020.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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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내일은 공휴일이다.

   영숙이는 서울 가시는 선생님과 함께 퇴근했다.

   대전 가려고 나선 길이다.

   달빛이 어슴푸레하게 빛을 발하는 신비한 베일이 엷게 들판에 빛나고 있었다.

 

      " 제 이 고치는데 삼십만 원 달래요! "

      " 삼십만 원? 너무 많이 드는데? "

      " 죽으면 이빨만 남겠어요. "

      " 하. 하. "

 

   웃음소리가 퍼지다가 멈춘 들판에서는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가 놀란 듯이 조용해졌다.

   조금 있으니 다시 그들의 언어를 음악으로 주고받는다.

   청산으로 나가는 차가 바로 있으려나 모르겠다.

   

   청산으로 가는 차가 없고 마침 군북으로 돌아가는 시내버스가 있었다.

   텅텅 빈 차 안에서 너무 자리가 많아 어떤 자리에 앉을까 망설였지만

   영숙이는 선생님이 앉자는 대로 맨 앞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은 건너편 자리에 앉아 계셨다가 너무 멀리 떨어졌다 생각했는지 이쪽 영숙이 뒤로 옮겼다.

   3월이라고는 하지만 싸늘한 바람이 앞문으로부터 올라와서는 치마 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다리를 바짝 굽히고 앉았지만 추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 김양. 내가 영화 보여 주지. "

      " 저기 봐. 저쪽 벌판 끝에서 불빛이 반짝이지. 그렇지? "

      

   영숙은 고개를 뒤로 비스듬히 기울이고 앞으로 깊숙이 숙인 선생님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다.

   선생님은 정말 즐거워서 그러시는지 영숙이를 즐겁게 하기 위해 그러시는지 아무튼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하였다.

   

   점점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는 주위의 풍경

   길가의 나무들.

   이제 막 사라져 가는 저녁노을.

   잉크 빛 하늘 아래에서 논들은 작은 호수를 여러 개 모아 놓은 것 같다.

   먼 농가에서 이제 하나 둘 불빛이 켜지고

   윤선생님은 불빛이 켜진 외딴집을 가리키고 있었다.

 

   영숙이의 눈에는 추운 듯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은 초라하게도 보인다.

   느낀 그대로 이야기하면 선생님 흥을 깨트릴 것 같아 참는다.

   

   대신 인가의 불빛과 잉크 빛 하늘 아래 빛나는 논들을 가리켰다.

 

       " 호반의 도시 춘천에서 본 호수들 같아요. 춘천 가보셨어요? 가을에 춘천 들어가는 도로는 단풍으로 그렇게 멋질 수가 없어요.

      " 참 내가 이렇게 김양 영화 구경 잘 시켜 주고 있잖아! 정말 이건 돈 주고도 구경 못한다고! "

 

   영숙이는 춥다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열심히 이야기하시는 윤선생님에게 차마 춥다고 얘기할 수가 없었다.

   추운 것을 참고 선생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점점 버스의 헤트 라이트가 선명하게 나타나는 도로를 보았다.

   

   길 옆으로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향해 허공을 점령하고 있는 가로수들.

   열심히 얘기하고 계시는 선생님.

   춥기는 하지만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옥천 읍에 도착하니 이미 완전한 어둠의 천이 드리워져 있고 퇴근하는 사람들이 붐비는 버스 정류장에서 선생님이 화장실을 다녀올 동안 다방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기다렸다.

 

      " 우리 택시 타고 가자! "

 

   영숙은 아무 말 없이 선생님과 같이 택시가 서 있는 곳으로 갔다.

   조금 따스해지는 느낌이 온다.

   

      " 대전 얼마요."

      " 한 사람에 오백 원요. "

      " 대전 택시는 여기서 나가는 차이기 때문에 요금대로 다 안 받지. "   

 

   한참을 달리는데 두 사람이 택시를 세워 합승을 했다.

   영숙이 운전기사 뒤에 앉았고 선생님은 가운데에 끼어 앉아 있다.

   차 안이 조금씩 따스해져 왔다.

   한두 번 긋던 비가 조금씩 부슬거리기 시작한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가는 비가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길 양편으로 하늘을 향해 길 솟은 가로수들.

   두 팔을 벌리고 내리는 비를 막아 주듯 내려다보며 웃고 있다.

   차가 기울어질 때마다 선생님도 영숙이 쪽으로 쓸려 온다.

   영숙이의 오른쪽 팔과 다리에 전달되어 오는 선생님의 무게.

   낯선 사람이라면 몸을 움츠리거나 아래위를 쌀쌀하게 훑어보면서

 

       " 중심 좀 잡으세요. "

   

   냉정하게 말할 텐데,

   그러나 영숙이는 피하지 않고 모르는 척 그대로 있었다. 

   

   선생님이 웃으면서 영숙이의 얼굴을 들여다 보고 영숙이는 창밖을 내다보며 딴전을 피웠다.

   차가 또 기울어진다.

   선생님은 웃으면서 마음 놓고 쓸려 온다.

   

   차 안이 따뜻하다.

   창 밖에 가로수들도 따뜻하다.

   작은 차가 그림 속을 달리고 있다.

   선생님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참 이상도 하지. 똑같은 길인데 이렇게 달라 보일 수가 없어. "

      " 처음 이 길을 올 때에는 얼마나 황량하고 추웠는지 어떻게 이런 데서 6개월을 견디나 하고 걱정을 했었거든. "

      " 오늘은 이 길이 이렇게 멋지게 보일 수가 없군. "

 

   영숙이는 선생님을 이해할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은 같은 느낌으로 같은 장면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 사물은 한 가지인데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감정이나 마음에 따라 사물에 대한 느낌이 달라지는 것이죠. "

      "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드는군. "

 

   헤드라이트 불빛이 따스해 보인다.

   그 불빛에 스쳐가는 가로수와 이슬비가 밝은 분홍색을 띄우고 있다.

   

   시간은 참 빠르기도 하지.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서울 가는 표는 전부 매진되어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 암표라도 사야겠군. "

   

   선생님은 망설이지도 않고 암표를 사러 갔다.

   영화 보러 가자는 소리는 나오지도 않는다.

   혹시나 기대했던 영숙이는 재빨리 결정한다.

   조금이라도 먼저 이 자리를 떠나야 한다.

   그래야만 가슴이 덜 아프고 바람 소리도 덜 들려올 테니까.

   

      " 5분 후에 떠나는 표야. "

      " 비싸게 부르길래 천 원만 더 얹어 준다고 했지. 싫으면 그만두라고 했더니 팔더군. 못 팔면 고스란히 날리거든. "

      " 3시간이나 어떻게 기다려? 돈 조금 더 주고 빨리 가는 게 훨씬 좋지. "

 

   선생님은 표를 확인하여 잠바 주머니에 넣고는 추워서 인지 어깨를 들썩 거리며 웅숭거린다.

   영숙이는 재빨리 인사를 하였다.

 

      " 선생님. 저 집에 갈게요. "

   

   선생님은 문득 낯선 시선으로 영숙이의 얼굴을 바라본다.

   

      " 안녕히 다녀오세요. "

 

   영숙이는 쌀쌀하게 말하고 재빨리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터미널을 벗어났다.

   

   선생님은 선생님의 집으로

   영숙이는 영숙이의 집으로

   당연한 사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실에 영숙이는 견딜 수가 없었다.

 

      " 빨리 이 자리를 떠나자. "

 

   버스를 타러 가야 했지만 재빨리 택시를 붙잡아 탔다.

   사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부터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참고 있었더니 꼭 방광이 터질 것만 같다.

       

      " 빨리 화장실에 가야겠다. 지금은 그 사실만 생각하자.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선생님도, 그 무엇도 아닌 이 생리적인 현상이다. 빨리 화장실에나 가자. "

 

   그래요. 우리는 타락의 동반자가 될 수 없어요.

   선생님은 댁으로 가셔야 하고 저는 우리 집으로 가야 하죠.

   이 길이 우리의 길이니까요.

   그렇지만 선생님 제가 이렇게 안타까이 초조한 것은 웬일일까요.

   영숙은 택시 안에서 불안정한 자세로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수없이 흘러내리는 언어의 구슬들을 굴리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 그대로 피아노 앞에 앉아서 치지도 못하는 피아노 건반을 힘껏 두드렸다.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두드리고 나니 화끈하게 답답하던 열기가 식어 가슴이 조금은 시원한 것 같았다.

 

      ㅡ 그래 저녁이나 먹고 목욕이나 가자.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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