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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스며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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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살이 시골 보건소 창문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이선우는 출근하자마자 창문을 열어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마당 너머로 보이는 논밭에는 옅은 안개가 걸려 있고, 몇 마리 새들이 전선에 나란히 앉아 지저귀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평온한 아침 풍경은 그의 마음까지 차분하게 만들었다. 곧 이봄도 출근해 올 터였다.

이선우가 진료실 정리를 마칠 즈음, 마을 어르신들이 하나둘 보건소에 찾아들었다. 가장 먼저 온 이는 늘 환한 웃음으로 인사하는 김할머니였다. 팔순을 넘긴 김할머니는 “선생님, 좋은 아침이에요”라며 쑥떡 한 보따리를 내밀었다. 봄은 김할머니를 반갑게 맞으며 “할머니, 또 떡 해 오셨어요? 저희 아침 간식은 할머니 덕분에 챙기네요” 하고 웃었다. 김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맨날 우리를 돌봐주는데 이 정도야 해줘야지. 자, 선우 선생도 하나 잡숴봐요”라고 정답게 말했다.

이선우는 쑥떡을 하나 집어 들며 감사 인사를 드렸다. 쑥 향이 은은하게 코끝을 간질였고, 떡의 촉촉한 단맛이 입안에 퍼졌다. 곁에서 봄도 한 입 베어 물고는 눈을 살짝 감으며 “정말 맛있어요” 하고 감탄했다.

김할머니는 흐뭇한 미소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젊은 사람들이 와줘서 우리 마을이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어. 둘이서 호흡도 척척 맞고 말이야.” 할머니의 말에 선우와 봄은 얼굴을 마주 보며 쑥스럽게 웃었다. 선우는 순간 가슴 한켠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을 사람들의 친근함에 하루의 시작이 한층 더 포근해졌다.

오전 진료가 한창일 때, 이번엔 동네 이장 할아버지와 몇몇 어르신들이 함께 들어왔다. 봄은 능숙하게 혈압계를 감고 혈압을 재며 안부를 여쭈었다. 선우는 처방전을 쓰면서 틈틈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할아버지들은 논밭 이야기며 최근 마을에 새로 지은 우물이야기까지 건강 검진 와서도 삶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선우는 환하게 웃으며 그 얘기들을 들었다. 도시에서 듣던 바쁜 대화와는 다른, 느릿느릿하고 정다운 이야기였다.

봄은 중간중간 “어머, 그래서요?” 하고 맞장구치며 진심으로 귀 기울였다. 그 모습에 선우는 속으로 감탄했다. 봄은 참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 무렵, 오전 진료를 마친 선우와 봄은 잠시 바깥공기를 쐬러 보건소 현관 밖에 섰다. 햇살은 한낮이 되어 제법 따갑지만, 느릿하게 부는 바람은 볕에 달궈진 공기를 식혀주고 있었다. 먼 들판에는 농부 한 분이 모내기를 끝내고 허리를 펴는 모습이 보였다. 선우는 이 한적한 풍경이 아직도 신기한 듯 둘러보았다. 도시에서의 점심시간과는 사뭇 다른 고요함이었다. 봄이 옆에서 “선우 선생님, 오늘같이 날이 좋을 때는 밖에서 도시락 먹는 것도 좋겠어요”라고 했다. 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요. 저기 그늘 아래 벤치에서 먹을까요?” 하고 근처 나무 그늘을 가리켰다.

그때 마침 면사무소 젊은 직원 하나가 경운기 짐칸에 상자를 한가득 싣고 지나가고 있었다. “보건소에 약품 들어왔습니다!” 하고 직원이 소리치자, 봄과 선우는 발걸음을 그리로 향했다. 상자에는 독거노인들 돌봄 키트와 영양제 등이 들었다. 선우가 얼른 상자를 몇 개 들어내려 주었다. 무거운 상자를 들어올리는 선우를 보고 직원은 “선생님, 감사합니다. 두 분 덕에 수월하게 내리네요”라며 밝게 웃었다. 봄도 함께 상자를 옮기며 “이렇게 더운 날 고생 많으세요. 물 한 잔 드시고 가세요” 하고 건네었다. 직원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덕분에요. 저도 얼른 나눠드리고 가봐야죠”라고 답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서로 웃음이 오갔고, 선우는 이 작은 공동체가 주는 훈훈함을 다시금 느꼈다.

오후가 되어, 선우와 봄은 예정보다 일찍 접수를 마감했다. 산골에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 한 분께 왕진 가기로 한 날이었다. 두 사람은 진료 가방에 혈압계와 청진기, 기본 약품과 처방약을 챙겼다. 봄은 할머니께 드릴 영양죽도 보온병에 담았다. “출발할까요?” 봄의 말에 선우는 운전석에 올랐다. 보건소의 낡은 봉고차가 천천히 마을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비포장길이 시작되자 차가 덜컹거리며 흔들렸지만,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그림처럼 평화로웠다. 진초록 논과 밭 사이로 구불구불 난 길, 길가에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들, 그리고 멀리 보이는 푸른 산자락이 한눈에 들어왔다. 봄은 창문을 조금 내려 손바람을 느끼며 웃었다. “공기가 다르네요. 선우 선생님, 저기 보세요. 까치 한 쌍이 따라오는 것 같아요.” 선우도 고개를 돌려 보았다. 과연 흰 배 까치 두 마리가 차를 앞서 날아가고 있었다. 선우는 미소 지으며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네요”라고 답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별 말 없이도 편안한 공기를 나누며 목적지에 다다랐다.

산자락 끝, 작은 감나무가 몇 그루 서 있는 마당에 허름한 시골 집 한 채가 나타났다. 이선우가 “여기인가 봐요” 하자, 봄은 익숙한 듯 “네, 저기 현판에 적힌 대로에요. 김영분 할머님 댁”이라고 확인했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준비해 온 가방을 들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할머니, 보건소에서 왔어요!” 봄이 정다운 목소리로 불렀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허리가 굽은 김영분 할머니가 모습을 보였다. “아이구, 어서와요. 먼 길을 와줬네.” 할머니는 주름진 얼굴에 반가움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을 맞았다.

거실 겸 부엌으로 쓰이는 방으로 들어서자, 아궁이에 불을 뗐는지 구수한 나무 연기 냄새와 함께 온기가 감돌았다. 선우는 할머니의 손을 잡으며 “할머니, 안녕하세요. 어디가 많이 불편하시다고 하셨어요?” 조심스레 여쭈었다. 할머니는 “별일은 아니고, 기침이 좀 오래 가네. 병원까지 나가긴 힘들고 해서…”라며 말을 흐렸다. 봄은 밝게 “잘 오셨어요, 할머니. 저희가 이렇게 찾아오면 되죠 뭐. 자, 진찰 한번 받아보세요” 하며 할머니를 다독였다.

선우는 할머니의 청진기로 숨소리를 듣고, 혈압과 맥박을 재며 상태를 살폈다. “요즘 입맛은 좀 어떠세요?” 하고 묻자, 할머니는 “혼자 살다 보니 먹는 둥 마는 둥이지. 입맛도 없고…” 하고 한숨 섞인 답을 했다. 봄은 기다렸다는 듯 가져온 보온병을 열어 그릇에 영양죽을 따랐다. “할머니, 이거 드셔보세요. 저희가 어제 직접 끓인 야채죽이에요. 입맛 없으실 때 요런 거라도 조금씩 챙겨드셔야 해요.” 할머니는 고마운 표정으로 죽을 받았다. “어이구... 손도 참 많았을 텐데 애썼네. 너희같이 착한 사람들이 와주니 복 받았지 내가.”

선우는 할머니께 처방해온 기침약과 영양제를 챙겨드리며 복용법을 설명했다. 할머니는 연신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젊은 의사선생이 이렇게 집까지 와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예전에 우리 영감 살아있을 적엔 둘이 손잡고 읍내 병원도 가곤 했는데… 이제는 그럴 사람이 없으니…” 할머니의 눈가에 잠시 그리움이 스쳤다. 봄은 조용히 할머니의 손을 잡고 “할머니, 저희가 자주 올게요. 걱정 마세요” 하고 말했다. 선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머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 마을 이장님 통해 연락주세요.” 할머니는 눈시울을 훔치며 미소지었다.

진료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할머니는 부엌 찬장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이거라도 가져가. 내가 농사지은 감자야. 많이 없어서 미안허이.” 할머니는 주름진 손으로 소쿠리에 담은 감자 몇 개를 내밀었다. 선우와 봄은 손사래를 치며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희 일하러 온 건데요 뭘” 하고 사양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에이, 내가 줄 때 받으래도. 멀리 와줬는데 빈손으로 못 보내.” 하고는 꼭 쥐여주려 했다.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감사히 받기로 했다. 집을 나서며 봄이 “잘 계세요, 할머니. 곧 또 올게요!” 인사하자, 할머니는 마당 끝까지 배웅을 나와 손을 흔들었다.

돌아가는 길은 오를 때보다 한결 수월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산 그림자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봉고차가 다시 덜컹거리는 산길을 내려오는 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빛이 산등성이를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따스한 빛줄기가 차창으로 비껴들었다. 선우는 운전하면서 슬쩍 옆자리에 앉은 봄을 흘겨보았다.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도 석양이 어린 듯했다. 먼 산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짓고 있는 봄의 옆모습이 이상하게도 선우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다.

아침부터 함께 보낸 여러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노인들과 웃으며 대화하던 모습, 더운 날씨에도 싫은 기색 없이 약상자를 나르던 땀 맺힌 이마, 그리고 방금 전 집에서도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안심시키던 따뜻한 손길까지. 선우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의 가슴속에 잔잔한 파문이 번지고 있었다.

마을로 돌아오니 어느덧 하늘은 붉은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보건소 앞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풀벌레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봄은 차에서 내리며 소쿠리째 가져온 감자를 들고 있었다. “선우 선생님,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그녀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선우는 고개를 저으며 “봄 씨도요. 덕분에 저도 많이 배웠어요” 하고 답했다.

둘은 나란히 보건소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닫으려던 찰나, 봄이 걸음을 멈추고 석양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 하늘, 참 예쁘네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선우는 그녀가 올려다보는 하늘을 함께 바라보았다. 붉고 주황빛 구름들이 서서히 보랏빛으로 번져가는 하늘이었다. “그러게요… 참 평화로운 풍경이에요” 선우가 답하며 옅게 미소 지었다.

선우는 조심스레 봄을 향해 말했다. “앞으로도 같이 잘 해봐요, 우리.”

봄은 놀란 듯 그를 바라보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같이 열심히 해요.” 날이 저물어가는 시골 보건소 앞, 두 사람은 그렇게 새로운 다짐이라도 한 듯 조용히 웃었다.

따뜻한 바람 한 줄기가 스쳐 지나가며 들판 너머로 사라지는 저녁 햇살을 배웅했다.

로맨스를 좋아 하지만 배울 생각을 못했다는게 지금 생각하니 너무 이상하다.

그냥  영화를 보고 다른 사람이 써놓은 로맨스를 읽고는 했다.

로맨스에도 형식이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

로맨스 소설에는 로맨스 소설만의 형식이 있었다.

이제 하나씩 배운다.
역쉬 배움에는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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