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발품기/나들이

삶의 한가운데에서 잠시 멈춰, 따뜻한 품으로 향하는 길 ~ 대전으로 친정엄마 만나러 겁니다. 정말 감사할 일입니다.

영혼의 닻을 찾아서 2025. 6. 4.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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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손길이 기다리는 곳, 대전으로


어느 봄날의 햇살처럼 포근한 마음으로 오늘 나는 대전으로 향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늘 미뤄두기만 했던 시간,
하지만 오늘은 망설이지 않고 마음을 따랐습니다.

‘친정엄마 만나러 간다’

는 이 말 한마디에
어쩐지 세상이 조금 따뜻해지는 기분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고
사랑한다는 말도 쉽게 꺼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문득 떠오르는 손맛,

목소리,

뒷모습 하나에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렇게 엄마를 볼 수 있고,
그 손을 꼭 잡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대전이라는 도시가 오늘은 참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길이 막혀도,

날이 흐려도 상관없습니다.
그곳엔 나를 한결같이 기다려주는

 

‘엄마’

 

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으니까요.

---

우리 모두에게는 돌아갈 품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오늘 또 한 번 느껴봅니다.

 

‘엄마’

 

라는 단어만으로도 눈물이 나고,
그 품에 안겨 다시 어린아이가 되는 그 순간을
고이 간직하려 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살아있음도.
그리고 오늘,

엄마를 만날 수 있음도.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기차를 타러 갈 때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엄마가 많이 아파서 휠체어를 타고 다니셨는데

다행히 많이 좋아져서 이제 지팡이를 짚고 걸어 다니신다.

 

작년 의료 분쟁이 한창 일 때부터 많이 편찮으셔서 대전에 사시는데도 청주 충북대학병원에 가서 중환자실에 입원하셔서 치료를 받으셨다.

다행이 조금씩 좋아지시고

의료분쟁도 가라 앉아서 이제는 대전에서 치료를 받고 계신다.

 

걷지를 못하셔서 휠체어를 타고 외출을 하시고 교회를 다니셨는데

이제는 천천히라도 걸어다니시니 좋으다.

 

코스트코에서 필요한 식품을 사고 엄마랑 쫑숙이랑 석이랑 함께 작은 차를 타고 큰집이 있는 양산 누교리로 드라이브를 했다..

군서를 통과하면서 쫑숙이가 아는 집에서 청국장도 사고 이런 저런 나물도 사고 군서초등학교도 지나왔다.

양산면 누교리 근처에 있는 영국사를 갔다.

소형 차로 산으로 산으로 올라 가니까

 

"이 작은 차가 우리 4사람을 싣고 산위로 올라 갈 수 있을까나?"

 

한번 멈추기는 했지만 뒤로 밀리지는 않고 뽈뽈뽈 잘 올라갔다.

ㅋㅋㅋ

 

영국사는 오래 된 절인데 산사태로 없어진 것을 조선시대에 재건했다고 한다.

절 앞에는 오래된 유명한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정말 나무 둘레가 10사람이 둘러싸도 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어렸을 적에 방학 때면 큰 집에 갔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각자 이원을 지나면 있는 개심저수지에 대한 추억들이 있었다. 

눈이 와서 버스가 다니지 않아서 걸어서 가던 길.

버스가 아예 다니지 않아서 걸었던 길.

저수지가 그때는 얼마나 컸었던지.

 

저수지 주변에는 누군가가 집을 짓고 식당을 열었었는데

불법이었는지 아니면 사정이 생겼는지 전혀 손님이 없어서 그랬는지

어느 때부터인가 빈집으로 남아 있다.

 

근처에는 빈집이 많다.

양산면 누교리 뿐만이 아니다.

시골에 가면 집을 지키고 있던 어르신들이 떠나면 빈집이 되고

나중에는 동네 전체가 빈집이 된다.

 

양산면 누교리에 있는 큰집의 뒷집은 군수네 집이었는데 어르신이 살 때부터 서울 가서 살다가 돌아가시고 빈집으로 오래 방치되다 보니 반짝 반짝 윤이 나던 마루짝은 여기 저기 푹 꺼져 있고 대문이나 문들은 쓰러진채 방치 되어 있었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 정갈하게 들기름을 먹여 반짝 반짝한 마루에 하얀 모시 옷을 입은 할아버지가 앉아 계시던 모습이.

한때 미국에 간다고 군수 할아버지한테 미국에 사시는 아드님 주소를 받아 왔었다.

 

이민국에 가서 이민 간호사로 이민 신청을 했더니 병원 현장에서 근무 이력이 없어서 안된다고 거절 당했었다.

지금 생각하니까 웃음이 나온다.

그래도 그때는 좀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나부다. 

 

큰집은 큰집에 많은 식구들과 또 작은 큰집 식구들이 한번씩 들락여서 그런지 아직은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고 청소 되어 있았는데 사람 손이 안가게 되면 조금씩 퇴락되어 갈 것이다.

 

누교리 전체에 사람 그림자가 특히 아이들이 없으니 활력이 보이지 않고 따뜻한 봄 바람만 분다.

 

큰집에 가면 언제나 북적북적 거리던 그 많던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작은 키의 큰 엄마는 아이들을 8명이나 낳았다.

큰집의 아이들은 제각기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 도시에 나아가 자리를 잡고 결혼하고 나름대로 다들 잘 살고 있다.

 

큰집에 가면 폴더처럼 허리가 구부러진 할머니가 계셨었다.

자글 자글 주름진 얼굴로 반가워 하시던 작은 키의 할머니.

큰 엄마도 기억이 난다.

 

큰 엄마가 아이가 아파서 대전 병원으로 진찰 받으러 와서 그나마 내가 간호 학교 다닌다고 나한테 병원에 같이 가자고 했는데 무엇 때문이었는지 작은 방에 누워서 꼼짝도 안했던 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이후 큰 엄마 만나서 "그때 같이 안간거 정말 죄송해요." 그렇게 말했을 때 큰 엄마 말씀이 "다 하늘의 뜻이지." 달관한 표정을 지으시던 큰 엄마.

 

멀리 고향을 떠나 있어서 그 이후 자주 뵙지는 못했다.

하지만 선천성 당뇨병이었던 큰집 아이의 일은 늘 마음 한켠에서 가시처럼 찌르고는 한다.

큰 엄마에 대해서도.

 

늘 회개를 한다.

회개하고 회개해도 또 죄를 짓는 인생.

그나마 회개를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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