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칼럼/국내여행

“물안개 피는 호수, 대청호에서 하루를 쉬어갑니다”

영혼의 닻을 찾아서 2025. 6. 9.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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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호는 어디인가요? 충청도의 푸른 숨
물과 산이 빚은 절경, 대청호 드라이브 명소
향수호숫길, 들꽃 사이를 걷는 시간
부소담악, 병풍처럼 펼쳐진 절벽의 호수
옥천 구읍, 정지용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둔주봉에서 내려다본 한반도 형상
수생식물학습원에서 만나는 천상의 정원

 


“눈이 머무는 곳마다 물결이 있고,
발길이 닿는 길 위로 바람이 스칩니다.”

충북 옥천과 대전을 따라 이어지는 대청호는
인공호수이지만,

자연보다 더 자연다운 풍경으로
사계절 내내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 곳입니다.

이 호수는 특히 아침이면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해질 무렵이면 황금빛 노을이 호수를 감쌉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시가 되는 풍경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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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향수호숫길

정지용 시인의 고향,

옥천 구읍을 따라
대청호를 감싸는 향수호숫길은 걷는 이의 마음을 정화시킵니다.

 

들꽃과 나무 사이를 지나며,

물가를 따라 걷는 기분은
마치 애니메이션 속 한 장면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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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소담악

'대청호의 병풍바위'

 

라고 불리는 부소담악은
물이 만든 절경과 바위가 어우러진 대표 포토존입니다.

 

가까이 가보면 수면 위에 뜬 바위 사이로
산새가 날고, 물빛이 반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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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생식물학습원

‘천상의 정원’

 

이라 불리는 이곳은
수련, 연꽃, 부들 등 다양한 수생식물들이 사계절을 물들입니다.

 

아이와 함께 자연을 배울 수 있는 힐링 코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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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옥천 구읍 & 정지용 문학관

향토색 짙은 돌담길과 한옥들 사이,
정지용 시인의 삶과 작품을 담은 문학관이 위치합니다.

 

문학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특별한 여정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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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가을에는 호숫가 산책로가 단풍으로 물들어
사진 찍기에도 최고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것도 추천드려요!

 

아버지는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깡촌에서 3남 2녀중 막내 아들로 태어나셨다.

영특하셨던 아버지는 그 어려운 시골 살림에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원중학교를 다니셨다.

 

우리 때에도 초등학교 시절 사친회비를 못내서 학교에 왔다가 담임 선생님이 집에 가서 사친회비 가져오라고 도로 집으로 돌려 보내던 시절이었다.

 

하물며 우리 아버지 시절에는 대부분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다니는 아이들이 많았었다.

우리 엄마는 초등학교 1학년만 다니고 학교를 못 다니셔서 한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셨다.

이후 성경책을 읽으면서 한글을 깨우치셨지만,

그 시절에는 학교를 못다녀서 한글도 모르는 분이 많으셨다,

나랑 10살 차이나던 막내 이모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집을 나와 가출해서 다방에서 일하셨는데 어쩌다 외갓집에 와서 중학교 교복을 입을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었다.

 

"중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보면 너무 부러워."

 

그러면서 내 교모를 써보던 기억이 난다. .   

 

아버지는 중학교 졸업반 때 6.25 사변이 일어나서 학도병으로 전쟁터에 나갔었다.

부상으로 의가사 제대 후 누교리 큰집 뒷집에 사시던 군수 덕분에 군청에 취직을 하셨다.

 

어렸을 적 추석이나 구정같은 명절 때면 꼭 쇠고기를 사가지고 군수 할아버지 집에 가져다 드리라고 해서 내가 가져다 드리고는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그냥 군수 집이라서 그러는가 보다 했는데 나중에 엄마 이야기를 들으니 그분 덕분에 군청에서 근무하셨단 이야기를 듣고 그래서 명절마다 쇠고기를 사서 보내셨구나를 이해 하였다.

 

아버지는 군청에 산림과 소속으로 충청북도 전역을 발령 받아서 다니셨지만 주로 영동군, 옥천군,청주 도청에서 근무를 하셨다.

내가 옥천군 마암리에 있는 외갓집에 살게 된 것은 아버지가 청주에 근무하실 때 호구 조사를 다니시느라 버스를 타고 출장을 가시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셨던 것이다.

버스가 높은 언덕을 굴러 떨어져서 차안에 꽉 타고 가던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생존하셨고 아버지를 간병하러 영동군에 살던 엄마가 청주로 가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사고 중에도 호구조사 자료를 품에 꼭 안고서 잃어버리지 않아서 표창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외갓집에서 살게 되었고 아버지가 4학년 때 옥천군청으로 발령 받아서 오셔서 그때부터 옥천 읍내에서 살았다.

 

옥천은 나에겐 특별한 곳이다.

추억과 향수와 고향이 어울어진 곳.

아직도 옥천 여중 앞에 있는 성당을 서성거리던 생각이 난다.

 

옥천 여중 2학년 때와 3학년 때 우리 가족이 성당 사택에 세를 들어 살았기 때문에 눈만 뜨면 성당을 어슬렁 거렸었다.

사춘기 소녀에게는 모든 것이 특히 수녀님이나 신부님이 참 신기해 보였다.

하얀 미사보를 쓰고 기도를 하고 있는 신자들의 모습이 정말 신기했었다.

 

지금도 수녀님이 성경공부 하러 오라고 했을 때 시간을 못맞춰서 못갔었던 게 못내 아쉽다.

그때 성경공부 하러 갔었다면 지금 카톨릭 신자일까? 

매 맞기 전에 하나님 앞에 순종했을까? .

어쨌든 하나님 부름을 받는게 운명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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