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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의 할렐루야

by 영숙이 2020.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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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에 대하여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독일어: Georg Friedrich Händel, 영어: George Frideric Handel 조지 프리더릭 핸들[*], 1685년 2월 23일 ~ 1759년 4월 14일)은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한 바로크 시대 작곡가이다. 헨델은 46곡의 오페라와 우수한 오라토리오를 비롯하여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쳄발로, 오르간 분야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명쾌하고 호탕하며 신선하여 생생한 리듬에 성악적이라고 평가된다. 독실한 개신교(루터교) 신자인 헨델의 대표적인 교회음악은 《메시아(Messiah)》로서 당시 영어 번역 성경인 킹 제임스판 성경[1] 의 구절에 곡을 붙인 오라토리오이다.

 

생애

헨델은 프로이센 할레(현재는 독일 영토)에서 태어났다. 함부르크, 피렌체 등지에서 활동하다 1712년 이후 런던에 정착하였다. 앤 여왕의 비호를 받아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1726년에는 영국 귀화하여, 죽을 때까지 영국에 살면서 오페라 46작품과 오라토리오 23작품, 많은 양의 교회음악은 물론 많은 기악음악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헨델의 일생이 그리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악파인 보논치니(1670년-1747년)와는 음악상의 적수였다. 이들의 경쟁과 헨델을 질투하는 음모 때문에 수차례의 파산과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당했지만 헨델은 그를 원망하지않고 오히려 보논치니의 질투를 은근히 즐겼다고 한다.

  1708년 피렌체와 베네치아로 수업하러 갔다가 이탈리아의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과 만나 오르간과 하프시코드의 경기를 하여 그 뒤부터 그와 친교를 맺었다

  헨델은 그 후 영국으로 건너가 1732년까지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필생의 대작인 《메시아》가 24일이란 단기간에 탈고하여[2], 1742년 4월 12일 더블린에서 초연하여 절찬을 받았다. 메시아의 초연후 8년째인 그가 65세 되던 해에는 완전한 승리자가 되었다. 그의 생존시의 《메시아》 공연만 해도 34회나 되었다고 한다. 그는 1732년의 《에스테르》 개정판에 이어 1735년 사순절(四旬節)[3]에는 성가작품을 포함한 약 15편의 오라토리오를 헤이마케트 극장에서 연속 연주하여 점차 오라토리오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또 1736년에는 《메시아》에 버금가는 유명한 오라토리오 《알렉산더의 향연(Alexander’s Feast)》을 작곡하고 1738년1751년까지도 거의 모두를 오라토리오의 작곡에 경주하였다.

  헨델은 가난한 음악가 구제회에 1000 파운드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났다. 영국의 국가적인 음악가로서 존경을 받아 사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헨델과 바로크 음악

 

  헨델은 그 명성을 거의 그의 극적 작품에서 얻었지만 통주저음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바로크적 협주양식에 기초를 두고 유려한 벨칸토의 성악적 멜로디와 결부하여 항상 간결·명쾌하며 밝은 표현을 나타냈다. 그의 멜로디에서 벨칸토 양식은 독일의 내면적인 힘찬 표현과 결부되어 호모포니의 방향으로 향한다. 또한 바로크 특유의 일정한 악형(樂型)의 반복이 사라반드, 쿠랑트, 가보트 등의 리듬에 지탱되면서 단조롭게 고수(固守)되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바흐에서 볼 수 있는 표현의 길이라든가 다양성은 없으나 그 대신 알기 쉽고 명쾌한 표정을 보여준다. 그는 합창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헨델의 할렐루야>>  

  1741년 겨울.   

  어두운 런던 거리 한 모퉁이에 지친 다리를 끌며 흐느적흐느적 걷는 한 초췌한 노인이 있었다.

 

  꾸부정하게 허리 굽은 모습의 그는 이따금씩 터져 나오는 심한 기침 때문에 한동안 걸음을 멈추곤 했다.

  조오지 프레데릭 헨델.

  그가 저녁 산책 중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허름한 차림새에 초라하고 지쳐 보였지만 그의 마음속은 마치 용광로 속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마음에는 지난 날 누렸던 그 영광스러운 기억들과 현재의 심연처럼 깊은 절망감이 어우러져 싸움을 벌이고 있는 전쟁터였다.

 

  지난 40여년 동안 그는 영국과 유럽 일대에 걸쳐 하늘을 찌르는 명성을 누려온 대 작곡가였다.

  새로운 곡이 발표될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왕실에서도 그에게 온갖 명예를 안겨 주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어떤가?

 

  마치 보잘것 없는 길거리의 돌멩이처럼 그들 모두에게서 버려진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지금은 그날 그날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의 빈궁 속에 빠져 버리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4년 전에는 뇌출혈이 생겨 오른쪽 반신이 마비되었다.

 

  걷기는 커녕 영감이 떠오를 때도 손을 움직여 음표 하나 그릴 수 없었다.

  의사들은 도저히 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고 단정하였다.

  그만큼 병세는 절망적인 상태였던 것이다.

 

  헨델은 온천에 매일 1시간씩 몸을 담그고 있으면 차도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독일의 '악스 라 샤펠'이라는 온천장에서 목욕을 했다.

 

  한번에 계속해서 3시간 이상은 온천물 속에 있지 말라는 의사들의 경고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에 대한 무서운 욕망은 의사들의 말을 무시했다.

  한번에 9시간 이상씩 물속에 들어가 있곤 하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병세가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무기력한 근육에 생기가 돌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손과 발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재생의 환희>>

 

  그는 끓어 오르는 창작열에 도취되어 연달아 네 편의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다시 갈채를 보내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장마 때 잠시 내리쬐는 햇볕처럼 잠시 반짝이다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열렬한 후원자 케롤라인 여왕이 작고 한 후 공연이 점차 줄게 되고 겨울의 혹한이 휘몰아쳐 왔다.

  얼음장같은 극장에 관객은 줄고 공연은 속속 취소되었다.

 

  날이 갈수록 생활고는 더해 갔다.

  창의력도 의욕도 감퇴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점점 지쳐 갔다.

  60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정신적인 타격은 노쇠를 촉진했고 이제는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말자고 스스로를 위안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처럼 깊은 절망감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저녁이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산책을 나서곤 했다.

  방안에 가만히 누워 있다는 것은 마치 스스로 죽음을 손짓해 부르는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헨델은 계속 인적이 없는 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저 만치 어둠 속에서 교회의 종탑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문득 발을 멈추었다.

  그 순간 그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아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혔다.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저에게 소생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가 또 사람들로 하여금 저를 버리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에게 창작 생활을 계속 할 기회를 주지 않으십니까?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십니까!"

 

  그는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는 밤이 깊어서야 한없는 슬픔 가운데 초라한 숙소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 소포 한 덩어리가 있었다.

  그는 조금 이상스럽게 생각하며 그 소포를 풀었다.

  내용물은 한 묶음의 오라토리오 가사였다.

  시인 '찰스 제넨스로부터'라는 서명이 들어 있었다.

 

  헨델은 그 가사 뭉치를 훑어 보면서 투덜거렸다.

  "방자한 녀석, 이류 시인인 주제에..."

  그는 모멸감이 앞섰다.

  혼잣말로 불평을 터트리면서, 동봉한 편지를 대충 읽어 내려갔다.

  곧 그 가사를 붙여 작곡을 착수해 주기 바란다면서 덧붙여

  '주께로부터 말씀이 있었다' 고 씌어 있었다.

 

  헨델은 다시 분통을 터트렸다.

  헨델은 사실 그다지 믿음이 두터운 편은 아니었고 성격도 워낙 격렬했다.

     

  "아니, 그래 뻔뻔스럽게도 제까짓 놈에게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셨다고?

   그래 나에게 오페라 대본도 아닌 겨우 이 가사 쪼가리를 보내 주었단 말인가."

 

  심히 불쾌한 마음으로 그 오라토리오의 가사 원고를 뒤적거리다가 헨델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상하게 가슴을 찔러오는 대목이 얼핏 눈을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버림을 받았도다. 그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 줄 사람을 찾았건만 그럴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를 위로해 줄 사람은 아무 데도 없었다.》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지옥에 버려 두지 않으셨도다. 그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그로부터 헨델은 글자 하나마다 마치 영혼이 있어 구구 절절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감동으로 그 원고를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말 한마디 글자 하나 하나가 새로운 의미를 지니고 빛나는 것 같았다.

 

  《... 현명한 지도자. 나의 구주가 살아 계심을 나는 알도다. 기뻐하라. 할렐루야.》

 

  헨델은 황급히 펜을 찾아 들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아무렇게나 앉아 악상이 떠오르는 대로 마구 휘갈겨 악보를 그리기 시작했다.

  놀랄 만한 속도로 음표가 오선지를 메워 나갔다.

 

  다음날 아침 하인이 조반상을 들여 올 때까지도 그는 책상에 엎드려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날이 밝아 아침이 된 것도, 또 조반상이 들어와 있는 것도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충성스러운 하인의 권고에 따라 빵을 집어 들긴 했으나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그는 빵을 입으로 가져가기 전에 연신 손으로 부스러뜨려 마룻바닥에 떨어트리곤 했다.

  그러면서 정신없이 악보를 그리다가 미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방안을 큰 걸음으로 왔다 갔다 서성 거리기도 했다.

 

  때로는 팔을 쳐들어 허공을 후려치기도 하고 큰 목소리로 우렁차게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 내리고 있었다.

 

  "나는 일찍이 그 분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하인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나를 빤히 바라보시는 것 같은데 그 눈에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어요. 하늘나라의 문이 열린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바로 거기 계신다고 소리치기도 했지요. 그분이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닌가 더럭 겁이 날 정도였다니까요."

 

  무려 24일 동안 그의 이러한 광적인 맞아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는 거의 먹지도 쉬지도 않고 무섭게 일에만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기진맥진하여 침대 위에 나가떨어졌다.

  그의 책상 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악보가 마구 흩어져 놓여 있었다.

 

  헨델은 혼수상태에 빠져 계속 14시간을 잤다.

  하인이 겁이 나서 의사를 불렀다.

  그러나 헨델은 의사가 도착하기 얼마 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하인에게 먹을 것을 요구하였다.

  마치 굶주린 들짐승처럼 그는 햄 덩어리를 꾸역꾸역 입으로 틀어 넣고는 음료수를 한없이 들이켰다.

  얼마 만에 그는 불러 오른 배를 쓸어내리면서 물러 앉아 방금 도착한 의사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선생이 나와 더불어 유쾌한 이야기를 하러 오셨다면 환영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몸뚱이 여기저기를 쿡쿡 찌르고 툭툭 두드려 보러 오셨다면 돌아가 주십시오.

   보시다시피 나는 멀쩡합니다."

 

  곡을 완성한 그는 런던에서는 헨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뻔했으므로 <메시아>를 들고 아일랜드로 갔다.

  그는 자기 작품을 연주하는 데 한 푼도 요구하지 않았다.

  공연에서 생기는 모든 수입은 자선 사업 기관에 보냈다.

 

  "<메시아>는 나를 가장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낸 기적이었다. 

    이제 이것은 온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

 

  더블린으로 간 그는 합창대 두 개를 하나로 합쳐 연습을 시켰다.

  공연 날이 가까워 옴에 따라 더블린 시민들의 마음은 점차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입장권은 단 시일에 매진되었다.

 

  좌석을 더 만들기 위하여 부인들에게는 버팀 테 (당시 여자들이 치마폭을 벌어지게 꾸미는 데 쓰던 것)을 쓰지 말고, 남자는 칼을 차지 말고 입장하도록 요청되었다.

 

  1742년 4월 13일.

  공연 몇 시간 전부터 극장 앞에 인파가 장사진을 쳤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더블린에서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하나의 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할렐루야 합창이 연주될 때 당시 왕이었던 조지 2세는 평소에 헨델을 좋아하지 않았던 왕이었지만 할렐루야가 연주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서 있자 모든 관중이 그를 따라 기립하여 노래가 끝날 때까지 서 있었다.

 

  이 유명한 사건은 오늘날에도 합창이 연주될 때마다 청중이 일어나 듣는 관습을 만들었다.

 

  헨델이 살아 있는 동안 이 곡은 해마다 공연되었고, 공연 수입은 모두 파운들링 구제 병원으로 갔다.

  헨델은 앞으로도 이 작품으로 들어오는 수입은 계속 이 병원으로 보내라고 유언을 남겼다.

 

  1759년 4월 7일(그의 나이 74세).

  그는 <메시아>가 공연되는 자리에 참석하였다.

 

  '나팔 소리가 울리리'가 시작될 때 그는 심한 현기증을 느끼고 비틀거렸다.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그를 부축하여 집으로 데려갔다.

 

  며칠 뒤에 그는 '나는 성 금요일 - 예수의 수난일-에 죽고 싶다'라고 말했다.

  4월 13일 <메시아>가 초연되었던 바로 그 날,

  자신의 소원대로 헨델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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