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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City life of JINNSSAM

Marriage life of JINNSSAM 1

by 영숙이 2020.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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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편 23 : 6) - 내가 변하지 않으면 내 삶은 변하지 않는다. 나의 시야. 관점. 가치관. 생각을 변화 시킬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시다.

 

1. 이강일 선생님 전 상서

 

  벌써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ㅡ 아직도 고교 입학시험 때 체력장 달리기 출발선 앞 책상 뒤에 앉아 계시던 선생님과 시선이 마주치니 씩 웃던 웃음 때문에 가무스름한 얼굴에 유난히 흰 치아가 선명하게 떠오르는데 그토록이나 세월이 흘렀다니 믿어지질 않습니다. ㅡ

 

  입학식 후 선생님이 유일한 총각 선생님이시라고, 또 국어 선생님이시고 해서 첫 시간 갸웃이 수업을 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에 무조건적(?)으로 좋아하기로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ㅡ 요즘 아이들에게는 영웅이 없어요. 숭배할 영웅이 연예인인 아이들에게는 다만 연예인의 겉모습  만을 흉내 낼 뿐 그 아이들의 영혼을 채울 물 한 모금 구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ㅡ

 

  원래 좋아하던 국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인기 선생님 눈에 뛸려고 글도 썼었습니다.

 

  ㅡ 어쨌든 뭐든 열심히 하는 것이 특기인 저로서는 일학년 때 필드하키 선수로 선발되는 바람에 공부를 소홀히 하였고 그때 선생님은 국민학교 선생님과 결혼을 하셨습니다. 결혼을 안 하셔서 담임을 안 준다는 말이 아이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을 때였죠. ㅡ

 

  2학년 반편성이 있는 봄방학전 저는 우수반인 7반에 편성되었습니다.

  그런데 봄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오니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부르셔서 갔더니

 

  ㅡ 넌 2학년 3반으로 가야 돼. 네가 우수반에서 제일 끝 등수인데 다른 아이 성적이 잘못된 게 있어서 네가 열반으로 가게 됐다.ㅡ

 

  는 거였습니다.

  제가 눈물을 떨구자 선생님은 이따가 다시 와보라는 거였습니다.

 

  ㅡ 방송실 창밖에는 새로 편성된 반으로 모여 서서 전체 조회를 하고 있었고 그 광경을 바라보며 울고 서 있는 내 귀에 담임 발표가 들려왔습니다. ㅡ

 

  2학년 3반 이강일 선생님

  환호성이 일어났습니다.

 

  난 그 순간 2학년 3반이 되기로 결 샘 했고,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교무실로 찾아가서 눈물 닦은 말끔한 얼굴로 씩씩하게

 

  ㅡ 선생님. 저 2학년 3반으로 가겠습니다. ㅡ

 

  담임 선생님은 눈을 동그랗게 떴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선생님 이름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힘이 되었고 그래서 필드하키도 그만두고 공부만 하기로 정하고 독서실에 등록해서 정말 열심히 공부만 했었습니다.

 

  ㅡ 시(詩)도 열심히 쓰고 그리고 국어과에서 2학년 전체 제일 좋은 국어 성적으로 메달도 받고 그때 좋아하던 선생님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좋고 싫음이 별로 얼굴에 나타나셨진 않지만 분명 우수반 아이들을 제치고 제가 1등 국어 성적 내신 게 너무 좋으신 듯한 것을 전 느꼈습니다. ㅡ

 

 

  수학여행 그리고 강릉 경포대에서 밤을 지새운 일.

  선생님은 숙소 현관에서 아이들 못 나가게 하시느라 밤을 새우셨고 저도 잠을 안 자고 새벽 해 뜨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생각이 납니다.

 

  ㅡ 선생님과 어쩌다 보니 단둘이 찍은 사진도 있어서 아이들의 선망 어린 질투도 받아 보았고 그 사진을 얼마나 열심히 드려다 보았었는지. ㅡ

 

  가끔 선생님이 시집을 소개하시면 그 책을 사서 밤을 새워 읽으며 언젠간 나도 이렇게 시집을 내리란 상상으로 행복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자 소개란에 한결같이 선생님들이신 것 때문에 저도 저자 약력 소개에 선생님으로 기록되고 싶어서 선생님이 되리란 꿈에 부풀어서.

 

  ㅡ 고3학년 그리고 간호학교 졸업 후 보건소 취직 그리고 드디어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고향인 대전에서 천리 타향인 울산이지만 기꺼이 문학수업에 좋으리라며 지도에서 울산이란 지명을 찾아내고, 전화번호부 뒤져서 울산 가는 고속터미널을 찾아내고, 드디어 출발하는 날 아침 고속 터미널에서 예감처럼, 운명처럼,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졸업 후 한 번도 뵙지 못했었는데 그토록이나 우연히 선생님을 뵐 수 있었다니. ㅡ

 

  "유성고등학교에 계신다."는 한마디뿐이었지만 선생님의 보기 좋은 미소는 여전하셨고 조금 몸무게가 더 나가고 세월의 그늘이 얼굴에 드리워진 듯하였지만 선생님이 되어 울산에 간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시던 선생님의 모습은 여전히 변함없으셨습니다.

 

  ㅡ 수업 들어가면서, 나오면서, 수업하면서, 선생님이 하시던 말, 취하던 태도, 이때는 이렇게 하셨고, 저 때면 저렇게 하셨고, 그리고 학생들을 대하시던 태도 등이 생각났습니다.

  매 순간마다 번뜩 떠오르는 거였습니다.

  그리곤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모습대로 행동하려 애썼던 것 같습니다. ㅡ

 

  확실히 선생님은 우리들의 우상이셨고 그리고 지금 생각해도 성실하고 온화한 이해력 있는 선생님의 모습은 묵묵히 일선에서 일하시는 선생님들의 귀감이 아니신가 생각이 듭니다.

 

  ㅡ 참 고2 학년 때 선생님 댁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순애라고 미술부 아이인데 미술대회에 참석하지도 않았는데 담당 선생님이 서무실에 찍을 도장 가려 오란데서 분개하여 선생님 댁을 찾아가 이야기했었던 기억입니다.

  그럴 수 있느냐고 하면서.

  선생님 댁은 깨끗하고 조용한 작은 방 2칸에 작은 부엌 한 칸의 한옥 집이었고 그리고 노모님이 차를 끓여 내오던 생각이 납니다.

   선생님 댁을 방문하고 나서, 느낀 감정은 외려 선생님이 더욱 존경스러웠습니다.

  조용하신 선생님 성품만큼이나 집은 먼지 청결하고 조용한 집안은 제가 상상하던 대로였으니까요. ㅡ

 

  지금 3교시가 끝나는 종이 쳤습니다.

  제가 교사가 된지도 벌써 만 16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벌써 4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고 이번 봄에 제가 첫 시집(詩集)을 냈습니다.

 

 

  시집(詩集)을 내고서 그동안 잊고 지내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르는 거였습니다. 

 

  ㅡ 이번 스승의 날에는 편지와 함께 시집(詩集)을 보내리란 생각이었고 그리고 지금 실천하는 중입니다.  ㅡ

 

 

 선생님.

 선생님이 떨어트린 씨에서 싹을 틔우고 줄기를 키우고 그리고 드디어 그 열매로서 시집을 얻게 되어 그 열매 하나를 선생님께 보내 드립니다.

 

 

 ㅡ 자연의 이치는 영양과 온도와 습기가 알맞아야 튼튼한 나무를 키우는 것 같습니다.

  영양이 너무 풍부해도, 또 온도가 너무 높아도, 습기가 많아도, 씨앗이 싹트고 자라는데 지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 키우기도 이런 것이 아닐까 문득 생각해 봅니다. ㅡ

 

  어찌 되었던 교육이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처음 교단에 설 때는 "꿈을 키우는 소녀"란 주제로 섰었건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는 왜 그리 자신만만할 수 있었는가 싶습니다. 

 

  ㅡ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혹 선생님이 기억 못 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1975년 충남여고 제5회 졸업생이고요.

  2학년 3반 담임을 이강일 선생님이 하셨고 1학년 때는 배(?) 선생님(생물과) 3학년 때는 김현일(지리과) 선생님이 담임이셨습니다. ㅡ

 

  대전 간호학교로 진학하여 졸업 후 순위 고사를 치르고 기다리는 동안 보건소에 임시로 있다가 울산여상 교사로(당시 사립) 발령받아 근무하다가 현재는 울산서 여상(공립)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ㅡ 간호학교 졸업 후 자취하면서 계속 시작(詩作)을 하였습니다만 당시 시집(詩集)을 내지 못하고 시(詩)를 몇 편 만 남기고 모두 태웠습니다. 그 후 결혼 후 계속 시(詩)를 썼으며 이번에 그동안 썼었던 시(詩)를 모아서 시집을 냈습니다. ㅡ

 

 

  보내 드려야 할 분이 많지만 선생님에게도 꼭 보내 드려야 할 분 중 1위의 순서로 보내고 싶은 분입니다.

  시집(詩集)을 받으시고 혹 선생님이 보시고 2권 중 1권은 제가 고쳐야 할 것을 지적해서 보내 주신다면 제가 앞으로의 공부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 들지만 부담되시면 그냥 책꽂이에 꽂아 두시고 선생님이 가르치신 제자가 보낸 시집(詩集)이라는 것을 가끔 일깨우시기만 한다 해도 결코 섭섭하게 생각지 않겠습니다.

 

  ㅡ 방금 종례하고 왔습니다.

   이곳은 15 학급의 작은 학교입니다.

  선생님은 34분입니다.

 

  선생님의 조용하고 조신하면서 힘 있는 발걸음.

  천천히 또박또박 듣기 좋은 목소리. 

  단정한 모습.

  씩 웃으시던 모습.

  칠판 글씨.

  평소 성실하신 모습이 특히 떠오릅니다.

 

  ㅡ 오늘은 스승의 날 기념 체육대회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무척 바쁘군요.

  어제저녁에는 남편에게 선생님 이야기를 하고 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혹시 기억하지 못하실지도 모르니 사진을 복사해서 동봉하라고 하더군요.

  저의 가족은 아들(11살) 하나, 딸(3살) 하나입니다. ㅡ

 

  매일매일이 정말 바쁩니다.

  어제저녁에 작은 애가 감기 기운 때문에 시간마다 엄마를 찾더군요.

  깊이 잠들지 못하고 그리고 큰애도 요즘 스트레스가 쌓이는지 짜증을 내구요.

  산다는 게 모두 그런 것 같아요.

  삶의 모습이랄까.

 

  ㅡ 역사에 우람한 고목으로 남기엔 너무도 적은 모습이지만 뭔가 이루려고 남기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합니다. ㅡ

 

  제 자랑이지만 전 꽃꽂이 사범 자격증도 있어요.

  그리고 요즘엔 볼링도 배우러 다녀요.

  저 학교 다닐 땐 볼링은 약간 불량한(?) 스포츠였나요? 지금은 가장 대중화된 운동 중  하나지요.

 

  ㅡ 싹을 틔우고 흙을 파헤치고 나무로, 큰 나무가 되기 위해선 많은 노력과 힘이 들겠죠? 모든 환경과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스스로의 껍질을 깨지 못한다면 성장할 수 없는 것이란 생각입니다.

  스스로의 발전은 오직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만이 이루어진다고 했나요? ㅡ

 

  여고 시절 선생님에게 시(詩)를 들고 가 무작정 봐 달라고 그리고 고쳐서 돌려주시던 선생님의 제자가 이제 시집(詩集)을 내고 이렇게 띄울 수 있다니 정말 꿈만 같습니다.  교지에 단편이 실리고 그리고 방송실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서 숙제로 받은 원고지를 몰래 읽어 보면서 한숨을 쉬었던 기억도 납니다.

 

 

  ㅡ 선생님. 항상 건강하셔요.

  어디에선가 열심히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이 제자를, 그리고 이렇게 먼 곳에서 선생님을 바라보며 뛰고 있는 제자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요. ㅡ

 

  두서없이 이것저것 20년의 사연을 줄여서 적어 보았습니다.

  혹여 제가 실수한 것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하세요.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이 선생님과 선생님의 가족에게 항상 함께 하길 바라오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95. 5. 12일 울산서 여상 진 영숙 올림.

<여고시절 많은 아이들의 질투를 받았던 선생님과의 사진>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끝까지 노력하면 무엇인가 될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시절의 마지막 글입니다. ㅡ 교만했고, 부끄럽고 어리석은 그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잘 몰랐던 시절 이었습니다.>

  이제 30년이 지나 쓰는 일을 포기하고 잊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조차도 잊고 있던 꿈을 깨우시고 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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