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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홀로선 버드나무

< 홀로 선 버드나무 > 21. 따스한 겨울

by 영숙이 2020.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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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겨울>   

 

   겨울은 여전히 따뜻하기만 했다. 

   아마도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린 모양이거나,

   밀려 버린 시간 때문에 겨울이 지난봄에나 추워지려나..

   유난히 따뜻하고 포근한 겨울.

   영숙이는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지만 어렸을 적 외갓집에서 외 할아버지가 소리 하시는 것을 들으며 따뜻한 아랫목에 아슴히 잠들 때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아늑하고 기분 좋게 무엇인가가 영숙이를 감싸 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창 밖으로 조용히 눈이 내려 온다.

   하늘하늘.

   영숙이는 창 문 앞에 서서 초록색 원피스 양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생상스 첼로 협주곡 1번( Saint - Saens - Cello Concerto No. 1)을 듣고 있었다.

   영숙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섬세하게 떨려 나오는 고은 음색이 창 밖의 눈과 어울려 따뜻한 실내를 가득 메우고 버드나무는 오늘 만은 외롭지 않은 몸짓으로 침착하게 가지를 늘어 뜨린 체 눈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디에서 왔을까?

   건너편 산등성이의 전나무 위에 있는 까치둥지에서?

   까치 두 마리가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저리 정답게 하는지 이리저리 경쾌하게 옮겨 다니면서 노래를 하고 있었다.

   

   까치의 까만 날개.

   그 날개의 흰 선과 내려오는 하얀 눈.

   휘늘어진 나뭇가지.

   한 폭의 동양화를 만들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눈을 영숙이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지금 이렇게 홀로 서성이면서 쓸쓸해하고 있는 것일까?

   순수한 아름다움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의 마음.

   나이 먹는다는 것은 점점 더 순결한 아름다움에 대한 신선한 감각을 잃어 간다는 것일까?

   영숙이 너는 왜 눈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다고는 못하면서도 실제로 눈이 오는 것을 두려워했는지.

   

   선생님의 구부정한 옆모습이 겨울이어서 앙상하게 드러난 면사무소 철조망을 따라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면서.

 

      " 선생님은 왜 그렇게 땅을 바라보며 걸어요? "

      " 학교 다닐 때 기차 통학을 했기 때문에 시간을 대느라고 언제나 빨리 걸어 다니든 것이 습관이 되어서 걸음걸이가 그 모양이야! 고치려고 했지만 이젠 안 고쳐져 걸음걸이 모양이 영 보기가 별로지? "

 

   고치지 못한 것이 아니고 안 고쳐도 된다는 자만심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윤선생님이 면사무소 문을 지나 버드나무 밑으로 해서 회색빛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선생님의 저 회색 빛 얼굴이 계속될 것인지.

   무엇이 그렇게 춥게 만들고 있는지.

 

   선생님 모습이 이쪽 건물 현관으로 사라졌다가 곧 사무실 문 앞에서 열쇠를 주머니에서 꺼내는 포즈로 영숙이를 들여다보았다.

 

      " 안녕하세요? "

      " 잘 지냈어요? "

   

   곧 이어서 저쪽 진료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난로 뚜껑을 여는 소리.

   영숙은 다시 돌아서서 창문을 통하여 선생님이 뜰에다 다 탄 연탄을 버리고 새 연탄 가지러 창고로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 손은 여전히 주머니에 넣은 체 한 손에는 연탄집게를 들고 있다.

   제법 눈이 뜰 안에 쌓인다.

   

   가정 음악실 시간이 끝나고 음악 대신에 기쁜 듯이 빠르게 이야기하는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난로 위에는 허브차가 바쁘게 소리를 내며 끓고 있다.

   영숙은 냉장고에서 컵을 꺼내어 선생님이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준비해놓고 설탕을 탄 따뜻한 허브차를 들고서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추운 사람.

   눈 사람처럼 차갑고 창백한 사람.

   얼굴에 인간의 따뜻한 입김

   감정을 불어넣어 주고 싶은 사람.

   그 눈동자에 무엇인가가 떠오르게 하고 싶다.

   단지 그뿐.

   점유하고픈 욕망도 또 떠나 버리고픈 욕심도 없이

   머물러 있을 뿐으로 만족하고 싶다.

   

   또

   가슴이 텅 비어 바람 소리가 난다.

   이 기분 나쁜 경험

   가슴이 텅 비어 바람 소리가 나는 기분 나쁜 경험.

   바람이 지나가고 있다.

   이 작은 네모난 공간을 둘러싸고 흐르고 있는 바람은 내속으로도 여전히 흘러들어오고

   그리고 심한 소리를 내면서 빠져나가고 있다.

   

   저 창 밖에 홀로 외로이 바람 속에 서서 바람에 휩쓸리고 있는 버드나무.

   무슨 사랑을 기다리나,

   이 서늘한 바람.

   누가 알까

   그냥 혼자 일뿐이니까 

  

 

   윤선생님이 어제 여러 번 새로 쓰던 서류를 들고 와서 또다시 베껴 쓰고 계셨다.

   몇 번을 다시 쓰는지 모르겠다.

   어제 서류 작성할 때 이름 쓰는 난에 아직 이름을 적지 않아서 영숙이는 선생님에게 물었었다.

 

      " 선생님. 이름 쓰는 난에 이름을 아직 안 쓰셨네요. "

      " 응 써야지. "

      " 선생님 이름이 뭐예요? "

      " 내 이름? 이름이 옛날 이름이라 별로야. "

      " 이름이 뭔데요? "

      " 안 알려줘. "

 

   다시 쓰고 계신 서류에 이름이 쓰여 있었다.

 

      " 윤 갑 현 "

      " 선생님 이름이 윤 갑 현 이여요? "

      " 아 이런 이름을 써 놓았네? "

      " 아 ~ 아 ~ 갑돌이 동생 갑현이네요? ㅎㅎㅎ "

      " 학교 다닐 때 애들이 엄청 놀렸거든. 별명도 많았어. "

      " 한 갑, 두 갑, 담뱃갑...   ".

 

 

 

   오후에 사무실로 화장 품 파시는 분이 찾아왔다.

   화장품 파시는 분이 무료니까 얼굴에 마사지받아 보라고 강력하게 권하여서 망설이다가 영숙이는 얼굴에 콜드크림 마사지를 받았다.

   콜드크림으로 얼굴을 닦아내고 마사지 한 다음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눈썹도 수정해 주고 입술도 빨갛고 진한 루주 색깔로 짙게 칠해 주었다.

   

    곽 양과 안양 언니는 이쁘다고 마구 칭찬해 주었지만 부끄럽고 어색해서 어디 숨고 싶었다.

   그렇게 진한 화장은 태어나서 난생처음이다.

   거울을 보니까 하얗고 뽀얀 분을 바르고 입술에는 새빨갛게 칠한 어떤 낯선 여자의 얼굴이 거울 속에서 영숙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놀란 영숙이는 휴지로 입술부터 닦고 얼굴을 닦아 내었다.

 

       " 김양 그렇게 자기 얼굴에 자신이 없어? "

 

   치,

   선생님처럼 잘 생긴 얼굴을 가진 사람이 잘 생기지 않은 얼굴을 가진 사람의 심정을 어떻게 아남.

   사람은 다 자기 수준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이쁜 얼굴은 아니지만 영숙이는 자기 얼굴을 부끄러워한 적도 없고 또 지나친 화장으로 가면을 씌울 생각도 없었다.

   주어진 있는 그대로의 얼굴을 감사하면서 살고 있다.

   

   수업 시간에 어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ㅡ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자기 얼굴을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 태어날 때는 부모님이 주신 얼굴을 갖게 되지만 세월이 흐르면 자기가 자기 얼굴을 만들어 가니까 결국은 자기의 얼굴을 자기가 책임지는 거라고. ㅡ

 

   영숙이 처럼 지나치게 자연 풍으로 안 가꾸어도 곤란하지만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지나치게 인공적인 것에 의존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선생님은 손으로 가린 영숙이 얼굴을 구경하고는 닦아 내는 것을 보고 말했다.

 

       " 김양 그렇게 자기 얼굴에 자신이 없어? "

< 스위스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여행지에서 한달만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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