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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홀로선 버드나무

< 홀로 선 버드나무 > 32. 향기

by 영숙이 2020.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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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세숫대야에다가 물을 담아 난로 위에 올려놓고 윤선생님은 연통 옆에 서서 어두워 오고 있는 창밖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겨울의 어둠은 날씨가 아무리 따뜻하다고 하여도 어김없이 일찍 찾아와서 이 조그마한 사무실을 부드러운 검은 휘장으로 둘러싸 버리고는 한다.

 

      " 뭐하시려고요? "

      " 발 씻으려고. 집에 가서 씻으려니까 귀찮아서. "

 

   물이 적당히 데워진 세숫대야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선생님은 매 맞기 위해 조심스럽게 손을 내미는 아이처럼 바지 끝을 올리고 천천히 양말을 벗기 시작한다.

   네 개의 시선이 선생님의 손 끝을 따라 움직였다.

   발은 어제 목욕한 것처럼 깨끗해서 오랜만에 100점 맞아 의기양양해하는 어린아이처럼 영숙을 올려다보곤 크게 웃음 짓고 만족스러운 몸짓으로 손을 넣어 발을 씻기 시작하였다.

   영숙은 의자 등받이에 턱을 괴고 윤선생님이 발을 씻고 타올로 닦고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 끝마치고 얼굴을 들었을 때,

   여느 때와는 달리 따뜻하게 풀린 윤선생님의 표정을 바라보며 영숙이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윤선생님은 물을 버리려고 세숫대야를 들고 밖으로 나가고,

   창 밖을 보니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움이 사무실을 푸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선생님의 손과 발이 들어 있었던 세수 대야 속에 영숙이의 손과 발도 함께 들어앉아 있었던 듯한 따뜻한 느낌이다.

 

   연극이, 또 하나의 단막극이 이 네모진 공간의 무대 위에서 아직도 여운을 남긴 체 마쳐진 느낌이 든다.

   방금 영숙이 읽은 책 구절이 떠올랐다.

   

       ㅡ 이 시간은 영원으로 이어진 한 순간.ㅡ

 

   다음 날 아침 출근하는데 진료실 침상 위에 선생님이 옆으로 길게 누워 있었다.

   영숙이는 언제든 저 문을 열고 저 앞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도 결코 저 문을 열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안다.

   자신의 냉정함과 이기심이 때로는 밉다.

   

   올바른 길을 걷는다고 해서 그 앞에 반드시 행복이 기다리고 있으리란 보장도 없다.

   그러나 세상은 한번 태어나서 한번 사는 것.

   두 번 사는 법이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떳떳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바르게 살면 당당하다.

   한 때의 행복한 감정에 내 인생 전체를 내던지기에는 난 너무 타산적이며 냉정한 것이다.

   영숙이는 지금 자기장처럼 본능적으로 잡아당기는 힘에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는 중이다..

   

   문을 열고 윤선생님을 향하여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30대의 젊은 남자.

   이 시골의 건강하고 맑은 공기.

   무료함.

   스트레스를 발산할 수 있는 오락이 없다.

 

   밤새,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며 베개를 껴안고 뒹굴었을까?

   그리고 아직도 그 여음이 배어 있다.

   육욕의 냄새.

   

   후각을 자극하는 느낌의 전달.

   그러나 영숙은 그 외곽에 멀리 떨어져 있고 그래서 딴 세계의 사람 같은 착각이 든다.

   청소를 하면서 윤선생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부인은 아기를 낳은 지 이제 2달.

   자기 몸 추스르고 아기를 돌보느라고 정신이 없을 터

   부인은 위로 아들 2명까지 돌봐야 하니 얼마나 힘들까.

   아들들이 엄마를 도와줄 것 같지도 않고,

   아들 있는 엄마들은 똑바로 누워서 자지를 못한다고 한다.

   아들이 위에서 엄마 품으로 뛰어들까 봐 인데 거기에 2명이면 장난 아니게 힘들 텐데.

 

   선생님을 나무랄 일도 아니다.

   선생님 말마따나 한창나이에 볼 거라고는 홀로 선 버드나무뿐인데

   겨울이라 시골 사람들은 밖에 나다니지 않으니 환자도 많지 않고

   하루 종일 사무실에 갇혀 있다가 집에 가서 밥 먹고 나면

   들여다볼 텔레비전도 없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라디오도 없고

   할 거라고는 잠자는 일뿐인데 아무리 자고 나도

   시골의 겨울밤은 길고 길어서 새벽도 빨리 안 찾아온다.

 

< 나의 작은 사무실에서 >

 

   나의 작은 사무실 안에서

   스쳐가는 바깥사람들을 내다본다. 

   오토바이로 쌩,

   웅크리고 지나가는 시골 사람들.

 

   나의 작은 사무실 안에서

   몸이 점점  작아져 보이지 않으면

   저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으려나.

 

   그분은 미술 선생님이신 부인을,

   개미를 검지로 비벼대는 어린 아들들을 사랑했다.

 

   날 만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도

   서울 응암동 뜰이 있는 미니 이층

   둘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꿈을 흔들어 깨우고

   무지개를 기왓장으로 쥐어 주고는

   창 밖에서 홀로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추운 어깨로, 

   방금 떠날 듯이 오신 모습 그대로,

   가방 하나에 결혼 생활을 챙기어 훌훌 가버릴 수도 있다는 

   부인 곁으로,

   미래를 함께 하기 위하여 

   무심히

   그렇게 가 버릴까?

 

   나의 작은 사무실 안에서

   감초 차 향기에

   숨소리를 가라 앉혀 마신다.

 

   <감초차>는 결명자와 구기자와 감초를 섞어 끓인 것으로 처음 먹을 때는 한약처럼 쓰게 느껴졌으나 맛에 익숙해져 음미할 수 있는 정도가 되니까 입안에 향기가 그득 차고 깨끗해지는 것 같았다.

   숨이 막힐 정도의 향이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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