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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세대 탐구 생활/어린시절 이야기

또순이 어렸을 적에 43 -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 < 1 ~ 8 >

by 영숙이 2019.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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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

       - < 2002년 4월 19일 13:36>  40대에 서화동우회 까페에 올렸던 글임

     

<1>

       지금도 추석 날 밤에 뒷동산 위로 둥실둥실 떠 올라 있던 보름달을 기억합니다.

      그처럼 크고 환한 달을 그 후로는 본 기억이 없습니다.

     

       

      모두들 새 옷을 입고 겨울을 위한 새 교복을 입고 웃음이 둥실 둥실 떠오르는 얼굴로 달이 떠오르길 기다렸습니다.

      타향살이 하느라 고향을 떠나 있던 가족들이 모여서,

      추석 달을 보면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 하여 둥실둥실 보름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렸습니다.

     

 

      이젠 그처럼 환하고 커다란 달을 보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아스라한 추억 만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그 달을 보여 주고 그 달에 대한 추억을 만들어 줄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거지요.

 

 

      보여 줄 수는 없다 해도 이야기 나눌 수는 있겠지요!

      누구나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은 있겠지만 우리처럼 시골에서 보낸 사람의 추억만 할까요?

 

 

 

< 2 >

    이멜을 쓰다 말고 꼭 해야 할 일을 하러 가야합니다,

     ( 아침 조례 - 담임 선생님이 연가를 내서 부담임이 해야 합니다. )

     갔다 온 후의 마음이 여전히 이 글을 쓰고 싶어 할런지 의문이군요.

     

 

     첫 번째 글을 쓴 이후로 두 번째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졌었는데 두 번째 글을 쓰고 싶어지게 된 동기는 동창생이 저에게 개인적인 이멜을  띄웠기 때문이고 그 글에서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계속 감동을 줄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쓸 수 있다면 좋겠네요.

 

 

    밤새 컴퓨터를 하고 학교에 와서 엎어져 자는 아이들을 억지로 깨워 1시간 수업하고 와서 컴퓨터 앞에 앉으니 그래도 쓰는 일이 저에게는 수업하는 일보다는 좋은 것 같습니다.

 

 

< 3 >

    6 학년은 3개 반이 있었습니다. 

    1,2반은 비진학반, 3반은 진학반이었지요.

    지금은 한 반에 35명이지만, 그 때는 한 반에 70명 가까이 되었지요. 때로는 70명이 넘을 때도 있었으니까요.

 

 

     대도시에서는 고액과외가 승했고

     학벌과 인맥이 상속되다시피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렇지만 시골에서는 아직도 대도시로 무작정 상경하는 시절이었고 교육과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누이들이 공장으로 가야 하는 때였습니다.

    누이들이 공장 가서 힘들게 버는 돈으로 집안의 기둥인 아들들이 공부하는 때였습니다.

    지금도 이틀에 한 번씩 우체부가 가져오는 신문이 아닌 구문을 대청 마루에 깔아 놓고 가발공장, 방적 공장 등에 대한 기사를 읽던 기억이 납니다.

   

 

     농경 사회였던 우리나라의 농촌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버둥치던

     그래서 공장을 세우고

     싼 인건비로 싼 물건을 만들어 외국에 수출하고

     가발 수출로 얼마 벌고 나이론 옷이 막 나오고 .....

 

 

     굶어 죽지는 않는다 해도

     먹고 사는 문제가 다 해결이 안되었을 때니까

     진학반이라 해도 50명은 남학생이고 여학생은 18명 뿐이었습니다.

 

 

< 4 >

     담임인 배석칠 선생님, 최재술 선생님, 그리고 다른 또 한분의 6학년 담임 선생님 세분이서 돌아가면서 진학반의 공부를 맡아 가르쳤습니다.

 

 

    여름이면 최재술 선생님은 런닝을 입고 가르치셨는데

    소매 있는 런닝 샤쓰가 비쳐서 가슴에 점 두개와 배꼽 근처의 점 한개가 확실히 보여서

    하나, 둘, 셋 이렇게 공부 시간에 그걸 헤아리면서 바라보던 기억이 생각납니다.

       ( 만약 선생님인 살아계셔서 제가 이걸 기억하고 있다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요? )

 

 

< 5 >

     우리 동네인 상지리에서 학교까지는 아이 걸음으로 한 시간씩 걸렸던 것 같습니다.

     아무 연고지도 없었던 그 시골에 다만 아버지의 설계도에 따라 4학년 때 전학 와서 6학년 때 쯤에는 이방인에서 확실한 시골아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집에서 아침 7시까지 학교에 가려면 6시에 집을 나서야 했습니다.

     6시에 집을 나서기 위해서 대충 끓인 밥을 찬물에 말아,

     안스럽게 들여다 보는 엄마 얼굴을 마주 보며 훌훌 마시고는 대문을 나서고는 하였습니다.

       (그때 시작된 밥 말아 먹는 일이 지금도 계속 되고 있으니...)

 

 

     벌판 가득 아침 안개가 뿌옇게 갈여 있고, 막 더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아 서서히 안개가 걷혀 가는 시골 풍경.

     고요하고 깨끗한 풍경.

     아침 이슬.

     새 소리.

     언제인가는 어른이 되면 시인이 되어 꼭 적어 보리라 생각하고는 하였습니다.

 

 

      벌판 가운데 방앗간,

      철마다 달라지는 벌판의 색조,

      산 고개를  돌아 들판 저편 사정리가 눈에 들어 오면 목청껏 친구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 명숙아! 학교 가자! "

      한약방 집 딸이었던 친구의이름을 부르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애와 그 동네에 사는 차순이가 나타나고는 하였습니다. 

      그 애들이 도로 까지 내려 오면 셋이 뭉쳐서 놀며 걸으며 학교를 갔습니다.

 

   

< 6 >

      차순이.

      얼굴이 까맣고 여위었던 그 애는 감자 몇 알을 들고 와서 우리들에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한약방 집 딸은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고 또순이는 감자를 받아 껍질을 하나하나 까고 있으면 차순이가 감자 양쪽을 두손으로 꼭 눌러서

         " 이렇게 하면 껍질 안까도 알맹이만 쏙 나와! "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범을 보이는 차순이를 따라서 또순이도 해 보지만 번번히 실패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철 없던 또순이였습니다.

     차순이에게는 그게 아침이었던 것을.

     그 몇알의 감자도 내가 뺏아 먹게 된 것을 .

     

 

     어느 날 갑자기 그 애가 서울로 전학가고 나서 그 애가 살던 집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약방 집에 놀러 가서 그 애네 집에서 밥도 먹구 놀다가 뒷산 개울에 가게 되었는데 개울 가까이 동네와 약간 떨어져서 자그마한 흙집 한칸이 있었습니다.

 

 

         " 차순이네 집이야! "

      하는 소리를 듣고 또순이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집은 어린 내가 보아도 허름하고 조그마해서 보통 집의 외양간도 그보다는 좋을 것 같았습니다.

          ' 아! 차순이가 저런 지버에서 살았구나! '

       멍하니 그 집을 보고 있는데 옆에 있는 친구는 약간 미안해 하는 얼굴로 땅 바닥을 발끝으로 차고 있었습니다.

 

 

         " 서울 어디로 이사 갔을까? "

         " 서울 어디라는데 뭐라더라? "

         " 왜 이사 갔니? "

         " 여기서는 먹구 살기가 힘드니까 서울로 이사 갔겠지! "

         " 서울 가면 학교 다닐려나? "

         " 글쎄! 학교 다닐 수 있을까? 어느 날 갑자기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온 식구가 없어졌는데 차순이도 같이 "

 

 

       비옥하게 가꾸어져 아직도 몇몇 채소가 남아 있던 자그마한 텃밭을 지나 오면서 차순이가 참 안됐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차순이가 전학 간 줄 알았는데 그렇게 갑자기 사라져 버린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 것도 온 식구가 다 함께.

       그렇게 살 기 힘든 줄도 몰랏습니다.

       역시 철이 없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몰랐겠지요.

       

 

       그 당시 흔 했던 무작정 상경이거나, 무허가 판자촌이 생각났습니다.

       늘 신문 지상에, 방송에 떠들썩 하고는 했으니까요.

       무작정 상경 어쩌구 저쩌구, 무허가 판자촌에 어쩌구, 저쩌구.

       좋은 이야기는 하나도 써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상황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 7 >

       여름 방학 때에도 학교를 나왔던 우리는 학교 저쪽에 있는 '서화천' 인가요?

       강으로 멱을 감으로 갔습니다.

       날이 더워서 점심 시간을 2시간씩 주었으니까 밥 먹고 강으로 멱 감으러갈다 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여학생 18명이 논길, 밭길을 따라 일렬로 줄을 서서 강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루는 가다가 누구인가가 쉬가 마려웠던 모양이었습니다.

       콩 밭 속에 들어 가서 실례를 하는데 하필이면 오줌이 땅벌 집 속으로 흘러 들어 가서 갑자기 땅벌이 날아 오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뒤에 서서 줄이 앞으로 나아 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벌들이 우리 쪽으로 한 보따리 뭉쳐져서 공격해 오는 것을 보고는 기겁해서 이리저리 흩어져서 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또순이는 강둑을 따라 힘껏 뛰는데

      벌 서너 마리가 끝까지 따라 오는 것이었습니다.

      차순이랑 나랑 강 둑에 죽 일렬로 심어져 있던 버드나무 가지를 잡고 고개를 이리저리 비끼는데

      기어코 얼굴에 두방, 손에 한방 쏘이고 말았습니다.

 

 

      차순이도 벌에 쏘였습니다.

      역을 감고

          (그 시원함이란, 처음 시골에 전학 갔을 때 다른 애들이 뛰어 드는 강물에 멋도 모르고 뛰어 들었다가 죽을 뻔한 적도 있었지만, 그 시원함을 어디 에어컨에 비교할 수 있을까요? )

       멱 감을 때 입었던 검정 빤즈를 치마만 입고 바위 위에 널어 말려 가지고 다시 입고 학교로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도 다 한두방씩 벌에 쏘였는데 아무도 붓지 않았건만

       또순이 얼굴은 퉁퉁 부어 가지고 

       최재술 선생님이

           " 또순이군! 좀 얌전하지! 벌에 소여서 얼굴이 그게 뭔가? "

        으아 그때의 부끄러움이란!

 

 

< 8 >

       이제 3교시가 끝나고 4교시에는  점심을 먹으러 가야 하겠습니다.

       점심 팀이 있는데 먹어야 살지요.

       요즘 아이들은 지금까지 벌 한번도 안쏘인 사람 손들어봐 하면 반쯤은 손을 든답니다.

       우리가 자연을 안 찾아서인가요. 아니면 벌들이 다 이사를 갔나요.

 

 

       이 곳 울산은 얼마나 수질 오염이 심각한지 먹는 물도 신경 써서 먹어야 하는데 초등학교 시절 그 맑고 맑던 강물이 정말 그립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 강을 찾았는데 내가 멱 감던 그 강에 무슨 이끼 같은 것이 뭉쳐서 둥둥 떠 있었습니다. 

       강 바닥에는 발을 들여 놓을 수 없을 만큼 미끄럽게 이끼가 깔려 있었답니다.

 

 

       강이여! 산이여!

       돌아와 다오!

 

 

       오늘은 여기까지 적어 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생각이 나거든 두서 없이 그저 우리 모두들의 살아온 모습과 비슷하려니 행각하고 적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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