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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세대 탐구 생활/어린시절 이야기

또순이 어렸을 적에 45 - 산림 감독원

by 영숙이 2019.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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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산림 감독원

 

       아버지는 군청 산림 조합 소속 공무원 이셨습니다.

 

       1945년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산에 나무로 부엌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을 뎁히고 밥을 해먹는 상황이라 산에 나무가 없는 민둥 산이 많았습니다.

 

       산에 나무가 없으니 해마다 비가 오면 대홍수가 나고 애써 지은 농사가 다 못쓰게 될 뿐만 아니라 논에 황토가 넘쳐나서 땅도 못쓰게 되고  비가 안오면 지독한 가뭄이 반복되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습니다.

 

       시골에서는 겨울이 지나면서 양식이 떨어지고 논이나 밭을 갈기만 하고 아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봄철이 되면 보릿고개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릴 뿐만 아니라 부황이라고 누렇게 떠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 했습니다.

 

       지금은 굶주리는 세계인들을 도와 주는 나라가 되었고,

       지금의 아이들은 왜 굶어 죽을까?

       이해를 못하겠지만,

       우리 어린 시절에는 우리 나라도 지구 최고 빈민 국가 중 하나여서 1년 개인 총소득이 44달라라고 했나요?

      굶주리고 굶어서 죽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나라에서는 산에 나무를 심도록 4월 5일을 식목일로 만들었으며

       산림 조합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산에 나무를 심는 일을 관장 하도록 하였습니다.

       또 산림 감시원을 두어서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땔감으로 사용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 하였고,

       집안에서 나무 단이 나오면 벌금을 매기던 시절 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군청 소속 공무원 이셨습니다. 

 

 

       시골에서는 산림 감독원을 줄여서 산감인 것을 빗대어 상감이라고,

       집안에 나무 단이 있는 것이 걸리면

       벌금이 100만원 200만원 나오던 시절이니까 그만큼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덕분에 또순이는 상감 딸, 땡감 딸 등등의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사실 왜 그렇게 불리는지 그 당시는 잘 몰랐고

        엄마한테 물으니까 아버지 하는 일이 산림 감시라서 그렇다고  설명해 주었지만 정확한 의미는 몰랐습니다.

 

 

        이제 50년이 지난 후 돌이켜 보니

        아이들이 왜 그런 별명으로 불렀는지 이해가 됩니다.

 

 

        이런 저런 연유로 한 번은 아버지가 부패 공무원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나무 때문에 벌금이  나오니까  고발을 하였는지

        동료 공무원 때문 이었는지 또순이는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아버지가 집에 들어 오시지 않는 날이 두달 가까이 되었고 

        아버지가 월급을 안 가져 오시니까 

        집에 식량이 떨어져 순 보리밥을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집에서 순 보리로 밥을 먹은지는 꽤 되었지만 

        학교 도시락에는 쌀을 섞은 보리 밥을 싸 주셨습니다.

        엄마의 시름은 점점 깊어져 가고

        어느 날 점심 도시락을 여는데 도시락 가득 순수 보리쌀로 만든 

        보리 밥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무심코 도시락 뚜껑을 열었는데

        그동안 쌀보다는 보리쌀의 비율이 점점 더 많아지기는 하였지만

        거뭇거뭇한 순수 보리 쌀이 가득 들어 있었던 건 처음 이었습니다.

        또순이는 놀라서 도시락 뚜껑을 얼른 닫고 돌아 앉았고

        그 날 점심은 굶었던 기억이 납니다. .

 

 

        학교 안가고 집에 있는 날이었는데

        아버지가 집에 오시고

        손님도 오시고

        엄마는 부엌에서 음식하시느라 분주 하셨습니다.

 

 

        또순이는 큰 방 마루 앞에

        빨간 쉐타를 입은 여동생과 서  있다가 손님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손님이 여동생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 참 예쁘게 생겼네 ! "

        그러고는 지폐를 꺼내서 동생 손에 쥐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또순이가 보아도 여동생은 피부가 하얗고 오동통해서

        정말 예쁘게 보였습니다.

        여동생을 바라보면서 또순이가 속으로 생각 한건

            " 난 안 예쁘구나! "

        한번도 누군가가 또순이가 예쁘다고 말해 주거나

        예쁘다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준 기억이 없습니다.

        엄마나, 아버지나, 그 누구도 .... 지금도 ㅋㅋㅋ

       

 

        아버지는 군청 산림 조합 소속 공무원 이셨습니다

        시골 사람들이 두려워 하던 상감이었습니다.

        30 몇 년이 지난 후 서화 동우회에서

        그 무섭던 상감이었다고 말하더군요.

        또순이도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두려워 했지만

        다른 사람도 다른 이유로 그랬었나 봅니다.

 

 

<<까페 ㅡ 서화동우회에서 >>

 

 

        반갑습니다. 또순이 선배님.....

        존함은 익히 모르고 있었지만

        아버님의 명성은 저희들이 익히 알고 있었죠.

       

 

        군서면에 떴다하면 발 없는 말이 십리는 충분히 가고 남았죠.

        선배님의 동생 이름이 " 또돌이 " 혹시 맞는지요.

 

       

       상감 떴다 하면 이리저리 허둥대는 모습이 지겨워......

       사실 집집마다 마루 밑에 안들어가 본 사람은 군서 사람이 아니지요.

       구들장밑, 마루밑, 헛간은 기본이라 피할 방법이 없구요

       땅 파고 묻어 놓아도 어찌 그리 귀신같이 찾아내시는지

       역시 상감마마세요.

 

 

       아버님 덕분에 또돌이하고 상지리 친구들은 

       우리 사정리 애들 때문에 학교를 다니기가  상당히 불편하였습니다.

 

 

       그 후유증이 이십여년 가더라구요.

 

 

       또순이 선배님!

       뚜렷하고 아름다웠던 추억을 일깨워 주시어

       대단히 반갑습니다.

 

 

      이번 체육대회에 혹여 뵈올 수 있을런지 ......

     

 

      다음에 또 인사 올리겠습니다.

 

 

      감사하고 반갑습니다.

   

                    ㅡㅡ 49회 김*성 올림 ㅡㅡ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왕 신분이 밝혀진 바에야 지금의 또순이 모습을 써보겠습니다.

 

   또순이는 한마디로 함께 부흥회에 참석하였던 동료교사의 말대로

      " 예수 골수 당원 "

  입니다. 

  " 예수 골수 당원 " 이기를 열렬히 원하는 사람입니다.

  지금도 매일 이렇게 기도합니다.

     " 예수님! 저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

 

 

   예수님의 사람으로서

      "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서 예물을 드릴 때, 네 형제가 너에게 나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제단에 예물을 놓아 두고, 가서 먼저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후에 다시 와서 예물을 바쳐라(마:5장 23,24절) "

   는 말씀처럼

   아무리 공무원으로서

   치산치수의 국가 정책에 따라

   수행하였을 업무 였을지라도

   폐가 되었다면 제가 대신 깊이 사과 드립니다.

 

 

   조상이 지은 죄일지라도 우리가 회개 할 책임이 주어진 것입니다.

   회개함으로 용서함을 받아

   사탄의 세력을 예수 이름으로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조상의 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죄,

   내가 속한 도시의 죄 등등

   수많은 죄들을 회개함으로써

   막혔던 축복의 물꼬를 여는 것입니다.

 

 

 

      " 너희 중에 죄 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요8:7절) "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얼마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회개함으로 깨끗케 되어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 입니다.

 

 

   고향 카페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무척이나 조심스러웠습니다.

   이제는 전혀 연고지가 없는 그 곳에

   새삼 발을 들여 놓는다는게 두렵기도 했거든요.

   그렇지만 말 그대로 따뜻한 고향 카페가 아닙니까?

   고향이기에 따뜻한 엄마의 품처럼

 

   객고에 시달리는 우리의 영혼을

   예수님처럼 따스하게 품어 주리라 믿습니다.

 

 

   다람쥐 체바퀴마냥

   그저 날마다의 일상생활에도 숨가쁘게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향 소식을 주고 받을 수 있음에 위로를 받습니다.

 

 

   모두들 평안하시고 형통하시길 바랍니다.

                                                        ㅡ 울산 또순이 올림.

< 뒤에 보이는 기와집이 상지리에서 살던 집이다. 옆에 초가 지붕은 소를 키우던 외양간. - 마당에서 아버지가 타고 다니시던 자전거에 기대서 찍음. - 머리 땋은 빨간 쉐타의 예쁜 여동생이 보인다. >

 

105-1

 

<< 산림 녹화 >> - 퍼온 글임.

 

 

   일제 말기부터 시작된 전쟁물자 조달, 해방 후의 인구증가, 6.25전쟁 그리고 전후복구를 위한 자재수요의 증가, 여기에 국가의 산림관리 기능 실종까지 가세하여 산림자원이 더욱 황폐화의 길을 걸었다. 특히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임산연료 이외에는 대체연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막대한 양의 나무를 소비했던 우리나라 특유의 온돌문화는 민둥산을 만들어내는 주범이 되었다.

   산림 남벌은 마을 주변의 산으로부터 시작, 점차 확대되어 대부분의 산은 민둥머리 붉은 산으로 변했다. 그 결과 마을 주민들은 나무를 하기 위하여 더 먼 산으로 가야 했고, 심지어 나무가 없어 나무뿌리와 들풀, 산풀까지 베어다 땠다. 땔감을 마련하는 시간은 자꾸만 늘어났고 멀리 떨어진 벽지의 산마저도 고갈되었다. 마침내 울창했던 우리나라 산림은 오지의 국유림을 제외하고 전 국토에 걸쳐 완전히 황폐화되었다.

 

   산에 나무가 줄어든 결과,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조금만 비가 와도 홍수가 되어 토사가 밀렸고, 하상(河床)은 논보다 높아졌다. 큰 비만 오면 제방이 터지고 전답이 매몰되었다. 조금만 가물어도 하천에는 물이 흐르지 않고 한발(旱魃)피해가 확대되었고, 약한 바람에도 황토먼지가 뿌옇게 날렸다. 산속에는 새와 짐승들이 점점 사라지는 등 생태계 파괴로 인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당시의 참상은 국토의 사막화를 우려하기에 충분하였다.

 

 

   해방 직후 산림파괴로 인한 국토 황폐화의 부작용을 직시한 지도층들은 산림녹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당시의 산림정책은 사방사업이 역점사항이었다. 임상(林相)이 빈약할 뿐만 아니라 산지가 황폐되어 거의 해마다 홍수피해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사방사업 10개년 계획(1948 ~ 1957)’을 수립하여 황폐임야와 황폐야계(野溪)에 대한 복구를 시도하였는데 6.25전쟁이라는 민족적 재난에 직면하여 그 실적은 계획 대비 5%에도 이르지 못했다.

   1951년 「산림보호 임시조치법」을 제정하여 응급사방에 힘쓰고 미립목지(未立木地)에 아카시아, 오리나무, 리기다 소나무 등 속성수를 조림하였지만 재원부족에다 기술부족까지 더하여 계획이 제대로 집행되지 못했다.

 

   정부는 1961년에 「산림법」을 제정하여 우선 사방사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어 ‘치산녹화 7개년 계획(1965 ~ 1971)’, ‘수계(水系)별 산림복구 종합계획(1967 ~ 1976)’, ‘제1 · 2차 치산녹화 10개년’ 등을 세워 치산치수책을 추진하였다. 봄철 식목일 이외에도 가을철에 ‘육림(育林)의 날’을 휴일로 정하여 매년 마을주민은 물론 군인 · 학생 등을 동원하여 산지의 소유자가 누구이든 나무를 심고 가꾸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산림녹화 추진 초기 20여 년 동안은 산지의 토양이 너무 황폐해서 나무가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그나마 살아남은 나무도 장마 때 토양침식 등으로 떠내려가고 말았다. 대체연료가 없는 농촌 주민들은 식목일에 심은 나무까지 베어다 때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었다.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30여 년 동안에 적극적인 치산사방 녹화사업을 실행하여, 사막화지대와 같이 황폐되었던 산지를 푸른 숲으로 변화시켰다. 산림녹화 성공 요인으로는 경제적 요인, 사회적 요인, 생태적 요인을 들 수 있다.

 

   지속적인 경제 성장, 경제적 시장 구조 형성, 농업생산성 향상, 연료에너지 대체와 지속적 에너지 공급 증대로 인한 경제성장이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특히 전국적으로 무연탄이 공급되고 꾸준한 에너지 대체 정책이 추진되면서, 이것이 국가 경제 발전과 함께 산림녹화에 긍정적이고효과적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중화학 공업의 급속한 발달로 임산물 대용재의 개발 · 생산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임산물 소비절약 등이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있었다.

   경제개발 추진과정에서 산림황폐에 의한 한발 · 홍수 등이 빈발함에 따라 식량감산과 도로침수 · 유실 등에 의한 산업생산의 피해가 심각함을 인식하게 되었는데, 이처럼 산업발전 배후자원으로서 산림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경제개발계획의 일환으로서 산림녹화사업을 추진한 것도 중요한 성공요인이었다.

 

   인적 자원 개발과 시민의식 성장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특히 근면 · 자조 · 협동을 원리로 하는 새마을운동과 치산녹화사업을 연계시킴으로써 마을 주변의 산림을 주민 스스로 협동하여 조림 · 보호하는 체계가 구축되었고, 공동체 단위의 산림계 활동도 활성화 되었다. 마을권 단위의 조림식수가 주민 개개인의 소득과 연계되도록 속성 유실수 위주의 조림을 우선 권장하는 정책도 주효했다.

   이렇듯 새마을 운동을 ‘잘 살아 보자’는 국민 공동체 의식을 고취한 것과 산림녹화에 대한 강력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시민의식 성장 · 국내외 NGO 활동의 증가는 국민에게 산림의 가치를 보다 더 잘 알리고 산림 보호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인구의 도시집중으로 인하여 농촌지역 인구가 감소함에 따라 대부분 농촌지역에 분포된 산림에 대한 인간의 간섭이 적어진 점, 그리고 산지지형이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고, 생물다양성이 풍부했던 점 등도 산림녹화에 긍정적 영향으로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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