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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세대 탐구 생활/또순이 어렸을 적에

또순이 어렸을 적에 90 - 갈포

by 영숙이 2019.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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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갈포

 

     돈이 될만한게 많지 않던 시절이다.

     

   

     아버지가 공무원이셔서 학비 때문에 고생 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는 생활비나 아이들을 위해 투자하는 일에 인색하셨다. 

     

 

     무엇인가가 늘 부족하다는 것에 익숙했지만 불만이 있지는 않았다.

     학교를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아이들이 많았었고,

     특히 장녀는 밑에 동생들 그중 남동생들을 위해 희생해야 했던 시절이고

     그래서 딸들은 가발공장,  봉제공장, 식모, 버스 안내양으로 일하던 때였다.

 

 

     외갓집에서 갈포를 해서

     만원(보통 노동자의 한달 월급)이상의 돈을 만들어 왔던 또순이 때문인지 

     집에서 갈포를 하게 되었다.

     갈포는 칡으로 만든 것으로

     주로 벽지와 같은 실내 장식용품으로 제작 되었다.

     갈포로 만들어진 짧은 것을 길게 이어가는 단순 작업이었다.

 

 

     어른이 되어서 갈포로 만든 벽지를 보았는데

     단순한 종이 벽지에 갈포를 표면에 붙여

     고급벽지로 만들어 낸 것 이다.

 

 

     또순이 엄마는 그때부터 집에서 할 수 있는 가내 수공업을 하셨다.

     대전에 이사 오셔서는 축구 공 꿰매는 일부터 하숙까지

     5명의 아이들을 키우면서 집안에서 일을 하여 가계에 보탬이 되셨다.

 

 

170. 자개농

   

   

     주인 집 아주머니는 조개 껍데기로 무늬를 오려

     자개장농 만드는 재료를 만드셨다.

     그래서 늘 집안에서 일하시느라 집 밖에 나오시는 일이 없으셨다.

 

 

     자개장롱은 주문이 있을 때만 만들었는데

     젊은 남자 일군들이 2~3명은 되었다.

 

 

     자개장롱은 자개를 박아 꾸미고 옻칠을 한 장롱으로     

     검은 색 매끈한 판 위에 이쁜 무늬로 오려진 자개가 붙여져 있다.

 

 

     옻칠을 하느라 우물에서 물을 퍼서 쓸 수가 없었고

     우물과 그 옆 창고에서 작업을 하느라 늘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였다.

 

                                                      

     안집에서 얇게 갈아진 조개와 

     얇아진 조개 위에 그릴 여러장의 밑그림이 무척 신기하였다.

     

 

     또순이 나이가 들어서 전복이 흔해져 먹게 되었을 때

     전복 껍질 안에 화려한 무늬 때문에

     전복 껍질을 한동안 버리지 못하고 모았었던 적이 있다.

     아마 또순이 어렸을 적에 보았던 화려한 자개 문양 때문이었으리라.

 

 

     또순이 엄마도 누군가 자개 장롱을 주문하여

     다 만들어진 자개 장롱이 집 앞을 지나 대문 밖으로 나가는 걸 보면서

     아마도 자개 장롱을 가지고 싶으셨으리라

     대전으로 이사 와서 오랫동안 검은색 자개 장롱이 안방에 놓여 있었다.

 

 

     이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개 장롱을 만나는 일도 드물고

     만드는 고장에서도 보기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171.  <1965 - 1975년대 시대상>

                                                                             인터넷에서 가져옴

 

서울로, 서울로 

  
    1960년대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산업화는 농촌에서 도시로의 대규모 인구 이동을 낳았다. 이러한 이동의 중심에는, 그럴듯한 도시 생활과 취직에의 꿈을 안고 상경했지만 결국 열악한 환경의 저임금 노동력으로 동원되었던 15세-19세의 나이 어린 소녀들이 있었다. 특히 가족의 생계가 압박을 받는 하층 가정의 경우 가장 먼저 노동시장으로 방출되는 대상은 미혼의 딸들이었다.
  
   

   이들은 가난이 싫고 농사일이 싫어 새로운 일을 찾아 서울과 대도시로 향했지만, 이들이 쉽게 진입할 수 있는 공식적인 노동시장은 형성되지 않았고,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가혹한 현실이 되어 이들을 소외시켰다. 시골에서 올라온 10대 여성들은 번듯한 공장에서 일하는 꿈을 안고 상경하지만, ‘여공’이 되기까지 보통 몇 년의 식모살이와 버스안내양 생활 등을 감내해야 했다. 이들 대부분이 국민학교 졸업의 저학력인 데다 특별한 기술을 배울 기회도 없었던 터라, 식모로 일하거나 버스 안내양이 되는 길 외에 다른 선택이란 꿈에 불과했던 것이다.
  
   

   농촌 출신 미혼 여성들이 지속적으로 서울로 유입되면서 서울시 전체 가구의 31.4%가 가정부를 두고 있었으며, 1972년 조사에 의하면 그 수는 무려 24만 6천여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밥 굶지 않고 사는 서울 가정이면 의당 식모를 둬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당시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사 보조노동을 수행하는 가정부 일이 여성들이 수행하는 노동의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1964년 당시 식모들은 5백원-6백원 정도의 월급을 받고 있었는데, 평균 노동자들의 임금이 1만원을 넘어서는 것과 비교해보면 매우 열악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 월급이란 것도 표면상의 계약일 뿐이고, 월급의 정도와 월급을 지급하는 시기는 주인 마음대로인 경우가 많아 매우 불규칙적이었다.   이들이 가정 내에서, 혹은 사회적으로 어떻게 대우 받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새벽 5-6시부터 청소, 빨래, 밥 짓기, 심부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일들”

   을 수행했던 이들이지만, 그 노동의 대가는 남은 찬밥이거나 외출 없는 생활, 부엌데기라는 호칭, 기약 없는 월급이었던 것이다.

 

 

    버스안내원 역시 식모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울로 상경한 소녀들이 쉽게 얻을 수 있는 직업들 중 하나였다.
  

  
    근대화 시기 하층 여성들이 노동시장으로 진입하여 주변화 되는 경우는 버스안내원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1961년부터 서울 시내버스의 안내원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교체되면서 미혼여성들이 대거 버스안내양으로 취직하였다.         “친절한 안내를 통해 서울의 이미지를 높인다”

   는 이유로 여성을 고용했지만, 안내원이라는 직업은 하루 평균 19시간 동안 북적이는 만원버스에 매달려야 하는 고된 노동이었고 평균 2천4백원(1966년 기준)의 임금을 받는 저임금 직종이었다.
  
  

   겨울철에는 버스에 난방이 되지 않는 탓에 동상에 걸리기 일쑤였고, 승객을 과도하게 태우다보니 버스안내양은 버스에 매달린 채 도로 위를 달리게 되는 위험천만함을 감수했다. 또한 버스안내원으로 일하는 여성들은 거의 대부분 기숙사나 차주의 집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공식적인 출퇴근이 존재하지 않았다. 결혼하지 않은 10대 여성들이 주를 이루었던 버스안내원의 노동 또한 ‘공적인 영역’에서의 노동으로 의미화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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