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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세대 탐구 생활/어린시절 이야기

또순이 어렸을 적에 95 - 연예인 이야기

by 영숙이 2019.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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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연예인 이야기 - 1)

 

      지금의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으면

      유튜버, 연예인 등이다.

      그만큼 대중화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때의 연예인은?

     먼저 또순이 초등학교 때에는

     외갓집에 살 때에는

     이모들이랑 옥천 시내에 있는 유일한 극장으로

     영화를 보러 갔었다.

 

 

     영화 줄거리와 배우는

     남자 주인공은 신성일이었고

     여자 주인공은 문희, 남정임, 윤정희였다.

     신성일이 엄청 부자였는데

     여자 세명을 한꺼번에 사귄다는 내용이었다.

     

 

     전용 극장에서

     문희와 영화를 보고

     남정임과 영화를 보고

     윤정희랑 영화를 보고 해서

     여자들의 마음을 훔친 다음

     세여자들에게 들켰는데 

     알고보니 유부남이었고

     대단한 부자 부인은 김지미였다.

 

 

     두근 두근 

     정말 영화가 신기 하였다.

     말소리도 엄청 신기하게 들리고

     크게 확장해서 나오는 배우들의 얼굴도 신기하고

     전용극장에서 영화 보는 장면도 신기하고

     거기에 나오는 배우들도 전부 신기하였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지금도 그 두근 거림이 울리는거 같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영화 줄거리도

     두근 두근.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지금의 화성에 놀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

     언제인가는 우리도 화성의 위성 센타에서 살게 될까나?

     그건 글로벌을 넘는 우주 스페이스 시티가 될 것이다.

 

 

175. 연예인 이야기 - 2) 

 

 

      군서 시골에서 살 때에는

      학교 운동장에서 흑백 영화를 

      군서면에 사는 전체 사람들을 대상으로

      보여 준적이 있었지만

      내용도 장면도 잘 기억이 안난다.

      그냥 검은 사람모양 그림자가 왔다 갔다?

 

 

     기억에 남는 연예인은

     그때 한창 잘 나가던

     남진, 나훈아, 이미자 였다.

     

 

     남진의 " 저 푸른 초원위에 "

     나훈아의 " 바다가 육지라면 "

     이미자의 " 섬마을 선생님 "

 

 

    그 시절 제일 흔한게 라듸오였고

    라듸오를 틀면 틀림없이 나오던 노래였다.

 

 

    전 국민의 애창곡으로

    이 노래를 모르면 간첩?

    아니 간첩도 이 노래를 배워서 넘어와야

    간첩할동을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원래 가요의 가사는

    그 시대를 대변하는 것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평생 살고 싶다는 미래에 대한 희망.

   

 

    한창 베트남으로 파병을 하던 시절이었으니까

    바다가 육지라면 이라는 가사는 더 애타는 노래 였을지도 모른다.

 

 

   베트남에 젊은 이들을 파병하게 되고 

   미국에서 받은 원조로

   경부 고속도로를 만들고 있었으며,

 

 

   베트남에 많은 젊은이들이 가서

   그들 때문에 벌어 들인 돈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던 때였다. 

   

 

  섬마을 선생님은

  갈 곳 없는 섬 아가씨들에게

  선생님이 얼마나 선망의 대상이었을지를.

  

 

  암울한 시대의 여성들에게 애타는 연정을 불러 일으켰던,

  여가수가 애절하게 부르던 노래이다..

 

 

  또순이도 매일 라듸오만 틀면 나오는 가요를

  지금의 도시처럼 소리지를 데가 없는 시절이 아니니까

  있는 목청껏 고래 고래 노래를 불렀었다.

 

 

   (요즘 아직까지는 매일 카페에 놀러 오는 헌이가

    오늘은 와서 막 소리 지르고 싶다고 한다.

   

    - 카페 맞은 편 아무도 없는 보도에 가서 질러봐

      아니면 운동장에 가서 지르던지

   

    - 싫어?

      그럼 태권도 도장에서 지르면 안돼?

      얼굴이 일그러 진다.

   

   - 태권도 도장에서 소리 지르면 혼나요. 

   

   - 요즘 아이들은 정말 소리 지를 데가 없다.)

 

   

   마루 바닥에 엎드려서

   라듸오를 따라 목청껏 따라 부르고는 하였다.

   

 

   가요만 따라 한게 아니라

   팝송이 흘러 나오면

   가사도 모르고 발음도 안되었지만

   무조건 따라 하기 일쑤 였다.

   

 

   하루는 팝송을 따라 하는 또순이를 보고   

   아버지가 웃으면서 한마디 하였다.

     " 잘하네? "

   또순이는 엄청 부끄러워서 수줍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메아리가 들리는 거 같다.   

  앞산을 향하여  소리 소리 지르면

  소리가 앞산에 부딪혔다가

  메아리로 돌아 오고는 했었다.

 

 

  앞산과 뒷산에서 들려오던 소쪽 새 소리는

  군서 시골을 떠난지 50년이 넘었어도

  여름이면 가끔 들려 오는 소쪽 새 소리 속에

  아직도 청량하게 귓가에 맴돌고는 한다.

 

 

  처음 울산에 오던 40년 전에는 

  여름 밤이면 참 많이도 소쪽 새 소리가 들렸었는데

  어느 때 부터 인가 차츰 차츰 소리가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요즘은 대공원 쪽에서 깊은 밤중에나 아주 귀하게 한번씩 들릴 뿐이다.

 

 

175. 연예인 이야기 -3)

 

 

     대전에 이사와서

     고등학교 2학년 때

     드디어 TV를 샀다.

 

 

     흑백 TV 였지만

     우리 모두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한 기계였다.

 

 

    전기 절약을 위해서

    12시가 되면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 "

    하고 애국가가 나오면서 꺼지고

    아침 6시인가? 정해진 시간에 켜졌다.

 

 

    그때의 주인공들은 당연 포크송 가수였다.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조영남 

    등등등

 

 

    김상희, 혜은이, 조용필

    등등등.

 

    

    어쨌거나 그 즈음부터 본격적인 대중문화의 문이 열리고 

    연예인들의 활동이 시작 되었다. 

 

 

<< 참고 >> 다음은 퍼온 글임

 

1.

남진 - 저 푸른 초원 위에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백년 살고 싶어

봄이면 씨앗뿌려,여름이면 꽃이 피네.
가을이면 풍년되어,겨울이면 행복하네.

멋쟁이 높은 빌딩 으시대지만
유행따라 사는것도 제멋이지만
반딧불 초가집도 님과 함께면
나는 좋아 나는 좋아 님과 함께 같이 산다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백년 살고 싶어

 

 

2.

 

이미자 - 섬마을 선생님

 

 

해당화 피고지는 섬마을에
철새따라 찾아온 총각선생님
열아홉살 섬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구름도 쫓겨가는 섬마을에
무엇하러 왔는가 총각선생님
그리움이 별처럼 쌓이는 바닷가에
시름을 달래보는 총각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3.

 

나훈아 -바다가 육지라면 

 

 

얼마나 멀고먼지 그리운 서울은
파도가 길을막아 가고파도 못갑니다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배 떠난 부두에서 울고있지 않을것을
아~~바다가 육지라면 이별은 없었을 것을


어제온 연락선은 육지로 가는데
할말이 하도많아 하고파도 못합니다
이몸이 철새라면 이몸이 철새라면
뱃길에 훨훨날아 어데론지 가련만은
아~~바다가 육지라면 눈물은 없었을 것을

 

 

4.

 

월남 파병 - 1

 

 

베트남 전쟁은 한국과도 연관이 많다.

당시 전투 병력이 모자라게 된 미국은 당시 한국에 주둔해 있던 미군 중 제2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월남전 종료와 비슷한 시기에 닉슨 정부에서 제7보병사단을 본토로 철수 해체)을 베트남에 파병하려고 했었다.

미군이 빠져나가 전력에 공백이 생겨 벌어질 북한의 침공이 두려웠던 박정희 정부는 미군 측에 먼저 "우리가 너네 대신 병력을 보내줄게!"라고 제안을 하게 된다.

미국이 이를 승낙하여 우리나라도 육군 수도사단(맹호부대), 해병 2여단(청룡부대)의 전투 병력을 보내고, 뒤이어 육군 9사단(백마부대)을 파견한다.

원래 처음에는 육군 수도사단만 보내려고 했는데 해병대 측이 참전 의사를 강하게 표명한 데다가 파월 사령관 채명신이 해병대도 전투 경험을 갖게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여 상부에 건의해서 해병대의 파병이 이루어졌다.

9사단의 추가 파병은 미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게 5만 병력 규모의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으며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에 걸쳐 56만 3387건의 작전을 수행했다..

 

월남 파병 - 2

 

월남 참전으로 우리나라는 분명 경제발전의 기반을 구축했습니다.

5천명의 전사자와 수 만명의 피와 땀으로 지금의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참전배경, 정치상황등은 빼고 경제적으로 관련된 부분만 말씀드리면,

60년대 우리의 경제는 세계 최하위 빈곤국가로 북한 보다도 더 못살았습니다.

 

대부분의 물자는 해외의 원조에 의해서 유지될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이런 상황하에서 한미동맹의 명분 아래 64년 파병결정이 되면서 본격적인 전투부대 파병을 하게됩니다.

 

파병의 조건으로 1966년 미국과 브라운 각서를 체결하는데, 그 내용중 경제관련된 부분만 보면,

 

1. 경제개발 차관제공
2. 수출장려 및 기술원조
3. 경부고속도로 건설지원
4. 베트남에 건설사업 참여등의 지원을 미국으로부터 약속받는데 이 규모가 대략 10억달러 정도입니다.

 

이 금액은 당시 우리의 수출 규모 61년 4천만$, 71년 11억3천만$, 76년 77억1천만$ 를 보면 엄청난 규모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렀던 71년도 수출액이 참전하기 전에 비해 28배, 고도성장의 경제기반을 구축한 이후 77년도의 수출액이 5년 전에 비해 7.1배의 성장을 기록합니다.

이후 월남에서 철수한 국내의 각 건설업체들은

베트남에서의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석유파동으로 급격히 성장하는 중동시장에서 건설붐을 일으키며, 막대한 자본을 축적합니다.

이렇게 축적된 자본은 지금 우리 거대기업의 모체로 또는 그 자본의 투자 대상이 되어 지금의 경제성장의 기반을 구축하게 됩니다.

님께서 질문하신 파병하고 미국에 돈을 받은것은 참전한 장병들의 월급을 포함한 군사원조와 관련된 것이며,

경제관련된 부분은 직접적인 자금지원이 아닌 원조와 사업참여에 관련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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