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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홀로선 버드나무

< 홀로 선 버드나무 > 15. 만명리 치과 진료

by 영숙이 2020.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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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명리 치과 진료>

 

   월요일 아침.

   

   바람이 몹시 부는 아침이다.

   출근하는 몸이 바람에 불려 어디로 인가 날아갈 것만 같은 그런 아침이다.

   

   영숙은 전날 밤 마신 술 때문에 아직도 띵한 머리로 부지런히 사무실을 향하여 걸었다.

   술이 자신을 위로해 줄까! 기대했던 어리석음을 후회하지 말자.

   생활의 쳇바퀴를 돌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쓸데없는 고통 따위는 사라지리라!

   

   영숙은 문득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바람의 냄새를 맡는다.

   아침 햇살만큼이나 투명하고 아린 바람의 냄새.

   고독과 우울한 어두움이 스쳐 지나간 자욱은,

   바람이 영숙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을 때처럼 아무 표시 없이,

   아리고 아프고 그리고 텅 빈 공백 만이 남을 것이다.

   

   치과 진료차가 와서 모두들 만명리로 출장을 갔다.

   지금 지난밤과는 상관없이 까닭 없이 기분이 좋은 까닭은 아직 엊저녁에 마셨던 알코올이 깨지 않아서 어지러운 상태이기 때문일까?

   영숙이는 영숙이 자신을 지탱하고 다스릴 수 없는 것일까?

   건강은 어떻게 조절하려고, 건강이 나빠졌으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자.

   공기가 좋은 곳이라 다행이다.

   도시의 매연은 나를 감싸고 있는 두려움.

 

   진료차 창밖으로 보이는 황금벌판.

   병충해에 약한 신품종인 녹풍은 굉장한 피해를 가져왔다.

   시험장에서야 월등한 수확력을 보였으나 병충해에 약하여 목도열 병 때문에 들판 곳곳은 나무 색으로 물들어 허물어져 있었다.

   

   만명리 부녀 회장 집에서 지소장님이 마을 사람들을 진료하였다.

   이빨이 하나도 없는 할머니의 축 늘어진 가슴.

   의사 선생님이 무서워 우는 아이를 달래는 아줌마.

   마루에는 동리 사람들이 몇 사람 모여서 방 안에서 하는 진료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영숙이는 지소장님이 하는 진찰을 돕기도 하고 약 포장지도 쌌다.                     

   점심을 먹고 나니 추수철이라 바빠서인지 몇 번을 방송했는데도 환자가 거의 없었다. 영숙은 윗방으로 해서 마루로 나왔다가 마당가를 한 바퀴 돌고는 진료 차에 가서 사람들을 관찰했다.

   

   치과 진료차는 바빴다.

   이가 아파도 웬만큼 아프기 전에는 병원에 못 가는 사람들.

   동네 사람 거의 다 치과 환자인 듯 길게 늘어서 있다.

   이들을 위하여 치과 진료차는 꼭 필요한 것 같았다.

   그러나 전국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치과 진료차는 1년에 한 번 그것도 운이 좋아야 이 마을에 오는 것이다.

 

   들일에 거치러 진 엄마들.

   바빠서 돌볼 새 없이 방목해도 건강하게 자라는 까맣게 그은 아이들.

   모두들 참으로 건강해 보인다.

 

   만명리 부녀 회장 집에 남편은 우리가 진료하러 도착했을 때 안방에 하얀 모시옷을 입고 길게 누워 있었다.

   우리가 왔는데도 누워서 벌떡 일어나지 않고 머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길게 누워 있다가 진료를 시작하려고 준비하니까 그때서야 겨우 일어 나서 사랑채로 건너갔다.

 

      ㅡ 뭐 저런 남자가 있지? 뭐하는 남자임? ㅡ

 

   우리가 뜨악한 표정으로 부녀 회장 남편을 쳐다보자 부녀 회장 왈 ~

 

      ㅡ 우리 남편이 청주 대학 나왔어요. 대학 나왔다고 농사일은 못 하겠데요. 옷도 여름에는 모시옷 아니면 안 입어요. ㅡ

      ㅡ 헐 ㅡ

 

   남편이 대학 나왔다고 말하는 부녀 회장의 얼굴은 자부심과 자랑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부녀 회장은 동네 일이니, 농사니 그런 것을 혼자 다한다는데  사지가 멀쩡한 남자가 체격도 큰 남자가 한 여름 대낮에 하얀 모시옷을 입고 방안에 길게 누워 있는 모습은 정말 꼴불견에 못 볼 꼴이었다.

   그걸 또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는 부녀 회장이라니 ㅡ

   영숙이는 속으로 욕이 저절로 나왔다.

   

      ㅡ 아니 저럴려고 대학 나왔으면 뭐하러 대학을 나왔담. 차라리 집에서 농사나 도와주는 게 훨씬 나을 뻔했구먼. 저러고 누워 있는 게 부끄럽지도 않나?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왔는데. ㅡ

   

 

   유난히도 맑고 드높은 파란 가을 하늘.

   늙은 감나무는 잎을 다 떨어 트리고 빨갛게 된 감 몇 개를 텅 빈 가지에 그림처럼 매달고 서 있다.

   어떠한 꽃꽂이 보다도 감나무의 빈 가지에 선은 멋이 있었고, 어떤 꽃보다도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걸려 있는 빨간 감들은 예쁘게 보였다.

 

   만명리 치과 진료는 4시경에 끝났다. 

   치과 의사는 키가 작고 별 볼일 없는 얼굴에 안경을 쓴 사람이었지만 치아 하나는 눈부시게 희고 건강하여서 웃을 땐 치열이 보기에 좋았다.

   

   보건소 사람들이 떠나자 보건 지소에는 다시 초저녁의 고요가 내려앉았다.

   선생님과 창 문 앞에 나란히 서서 창 밖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선생님은 심심하니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 집사람을 소개받았는데 장인이 병원으로 나를 찾아왔더라고, 장인 자동차를 타고 점심 먹으러 갔는데 장인이 광주에서 꽤 큰 공장을 하고 있었거든, 집 사람은 미술 선생으로 중학교에 근무하고 있었고. 처가는  내가 결혼할 때 만 해도 재산이 상당한 집안이었어. 우리가 결혼하고 나서는 좀 힘들어졌지. "     

 

      " 집 사람이 그러는데 학교 근무하는 것도 힘들데, 똑같은 걸 10반 내내 해야 하고 중학생들도 말도 안 듣고 힘들다 하더라고. "

     

      " 집 살 생각은 없었는데 병원에 같이 근무하는 친구 중에 응암동 주택에 사는 친구가 그걸 팔고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고 싶어 하더라고, 하루는 그냥 놀러 갔는데 너무 마음에 들어 사고 싶은 거야. 미니 이층 집인데 이리저리 다 끌어 모아 샀지. 살 때는  힘들었었는데 그래도 그때 잘 샀지. 그 후에 집 값이 많이 올라서 만약 그때 안 샀으면 절대로 못 샀을 거야. "

     

      " 전남대 의대 나왔어. 전남대 의대가 굉장한 역사와 전통이 있는 학교거든,! "

     

     " 요새 애들은 무서워. 아 글쎄 지난 번에 집에 갔는데 우리 아들이 개미가 탁자 위를 지나가니까 손가락으로 개미를 비벼서 죽여 버리더라고. "

   

 

   윤선생님은 외과 의사 라서 그런지 이야기하다가 누가  손가락이 아프다고 하면 손가락을 잘라 버리라고 했다.

   안양언니나 곽 양 언니가 발이나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 발이나 다리를 잘라 버리면 된다고 해서 농담인 줄은 알았지만 외과의사라서 잘라 버리라는 소리를 참 쉽게도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가 아들 집으로 가게 되어 집을 팔려고 내놨다고 한다. 이제 겨우 이 방에 익숙하여지려고 하는데 다른 방으로 옮겨야 하다니 서글프기만 하고 이사 갈 다른 방에의 생활이 두렵다. 

   

   한껏 우울한 생각으로 가득 차서 필기도구를 찾으니 없었다.

   사무실로 가지러 갔다 오는데 숙직실에서 들려 오는 용인 아저씨의 즐거운 듯한 목소리.

   아저씨의 목소리는 언어 자체가 웃음 짖는 것 같다.

   그야말로 즐거워서 못견디겠다는 것 같은 목소리이다.

 

   저녁을 먹고 텔레비젼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읽던 책도 다 읽고 무언가를 끄적끄적해보았지만 신통치 않다.

   그래도 영숙이는 무언가를 써봐야지 조금은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억지로라도 끄적여 본다.

 

 

지친 마음을 자리에 눕히면

눈에 띄이는 봉창문 하나.

 

울고 싶으면 실컷 울어라.

웃고 싶으면 마음껏 웃어라.

너만의 공간,

너만의 방이 아니냐.

 

일어나 봉창문을 밀고

밖을 내다보니

골목길을 오르고 있는

지서 사환 아이.

 

우물가에서 무언가를  씻고 있는 아낙네.

짚 동가리 밑에서 서로 쪼아대는 닭 서너 마리.

 

초가집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고 있다.

하얀 눈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겨울날 저녁이다.

 

시간의 그림자가 만들어 낸 어스름이 벌거벗은 나무들 위로,

허공에,

하늘 가에 내려앉고 있다.

               < 청량함의 끝판왕 스위스 ~ 갈 수 있어서 행복한 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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