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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세대 탐구 생활/편지글

편지글 23

by 영숙이 2020.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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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해,

 

  진해,

 

  수많은 벚나무들의 행렬.

  고운 연분홍 꽃잎들이 지천으로 날리던 몽환의 4월도 가고,

  꽃잎 떨어진 자리의 붉은 생채기들을 어루만지며 치유의 푸른 잎들이 솟아 올라

 

  오월

  신록의 계절을 만들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편지를 드리고 싶었는데, 한동안은 몸이 아팠고, 다음엔 하늘 일 없이 바빴고 또 새롬 아빠 때문에 부담이 되었습니다.

  제가 시집을 읽으며 몇 마디 메모해 둔 것을 보고 새롬 아빠가 너무 과장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시에 대해 제가 뭘 알겠습니까.

  어쨌든 그냥,

  읽으면서 아무렇게나 끄적거려 놓은 것이지만 그중 한 마디라도 쓸모 있는 말이 있기를 바라면서 보내 드립니다.

 

 짬짬이 읽었지만 아직 다 읽은 것 같지 않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와 나중 읽을 때의 느낌이 다르더군요.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꼭꼭 씹어봐야 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쓰신 것을 거의 다 실어 놓으신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가끔 미숙하게 느껴지는 시들도 있었습니다. 

  양을 반으로 줄여 골라서 싣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만 또 시공부 하는 사람들에겐 도움이 될 것도 같습니다.

 

  지방 출판사에서 출판한 거라 그런지 오자가 꽤 있더군요.

  글자 좀 틀리게 쓰는 거야 뭐 그리 대수로울까 싶기도 하지만, 오자는 그 책의 첫인상을  흐리는 것 같습니다.

 

  또 시어들 중에 사랑, 기쁨, 슬픔, 아름다움 등의 단어들이 간혹 눈에 뜨이는데, 이런 추상적인 낱말들은 모호하고 막연하기도 하고 진부하기도 하고......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 무튼 시의 맛을 떨어뜨리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단어를 절대 쓰지 말아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 단어가 시 속에서 무르녹아 있어야 하는데 어쩐지 시가 덜 익은 듯 생경하고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물론 깊이 있고 좋은 시도 많습니다만, 시집을 다 읽고 난 전체적인 인상이 닫힌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 또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보는 아이와 같음은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그동안의 시들을 모두 다 모아 두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때로는 시어를 좀 더 신중하게 고르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혹은 표현 기법을 좀 더 개발해야 되지 않을까(즉 비유라든지 상징 등을 관습적이 아닌 독창적인 것으로) 라거나 이 시는 좀 깊이가 없다, 표면만 핱고 있는 것 같다 라는 등의 생각이 드는 시들이 있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얘기하라시면 그건 조금 어렵습니다.

  그저 저 자신의 모호한 느낌일 뿐이고 시에 대해 저 자신 깊이 있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애 대한 열망의 단계, 문 앞에서의 망설임에서 이제는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깊이 문 안으로 들어가셔서 형님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가꾸어 보여 주시길 기대합니다.

 

  제가 잘못 읽고 판단한 거라면 용서하십시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한계 안에서만 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 시선 속에는 이무 것도 이룬 것이 없는 사람으로서의 선망, 질투, 시기가 다분히 섞여 있을 것입니다.

  형님의 시를 다 읽었지만 사실은 다 읽었다고 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음미해 봐야겠습니다.

  다음엔 더 나은 의견을 드릴 수 있는 좋은 독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1995. 5. 5. 노마 엄마 올림. 

 

 

2. 벌써부터 편지를 보낸다면서 항상 그렇듯이 말이 먼저였고 행동이 따라 주지 않는군.

 

  그렇다고는 해도 마음속으로 얼마나 많은 편지를 썼는지를 말하진 않겠어.

  너무나 하고 싶은 말이, 감사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막상 쓰려고 하니 하나도 안 나오네.

  언제나 그렇지.

  잘하려고 하면 이상하게 실수를 많이 하고 편안하게 마음먹으려고 하면 뒤에 가서 내가 잘못한 일만 떠 올라서 스스로를 자꾸 점검하게 되고.

 

  너무나 많은 말을 머릿속으로 써대고 이제 이렇게 편지 앞에 앉으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말없이 잘해준 롬이 엄마에게 감사하다는 말 뿐이라오.

 

  아직도 고요한 그곳의 풍광이 내 머릿속을 가득 산소처럼 메우고 있다오.

  아침에 거실 문을 열면 서서히 걷혀 가던 새벽안개와 햇볕이 자리 잡아가던 모양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오.

  진쌤이 게을러서 그 새벽안개를 한번 손에 쥐러 나간다면서 말 뿐으로 실천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가까이서 그렇게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느낌이 가득이었다오.

 

  글이라는 것이 어느 때는 과장되게 어느 때는 지나치게 축소시켜 사물을 표현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오.

  역시 시인이 아닌 시인 지망생 ~~~

 

  숫용추 못의 호수.

  백조의 호수는 아니라도 무동력 백조를 타고 좋은 추억으로 가득 넘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오.

  계곡의 깨끗한 물줄기는 정말 천상의 것이 아니었나 새삼 의심스럽다오.

  아마도 동하와 현이에게도 평생 잊지 못할 좋은 추억이 아니었나 싶으이.

  동하는 집에 와서 하루 지나니까 아니 실컷 한숨 자고 나더니 심심하다고 재미없다고 하면서 다시 그곳으로 가고 싶어 하였다오.

  그곳에서의 일을 잊지 못하리. ~

 

  매일 앰뷸런스가 뽀뽀 거리는 환경 속에서 매일 학원으로 쫓아다니느라 바쁜 아이에게 그처럼 자연과 가까이 한가로운 시간을 갖게 된 것이 정말 얼마나 좋았는지.

  전에는 자연을 접하러 가자면 피곤하다고 싫다고 하였는데 덕분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것 같아 얼마나 감사한지.

  그곳에서는 한 번도 심심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이곳에서는 아예 입에 달고 산다오.

  심심해.

  심심해.

 

  명쾌하게 정리되고 밝아진 머릿속으로 저절로 시가 써지더니 이젠 커피로 겨우 겨우 머리를 깨워서 생활하기 시작했다오.

  그곳에서 온 후로 바로 문학상에 응모했다오.

  뭔가 하나 해본다는 거.

  아무리 하찮은 거라도 절대로 쉬운 게 없지.

  결국은 다 정리가 안되어 개학 후 까지 끌고 다니다가 겨우 보냈는데 결과야 어떻든 무엇엔가 도전해냈다는 사실에 기쁠 뿐.

 

  학교 교지와 진쌤이 어쩌다 동인으로 가입하게 된 처용 수필에도 글을 내야 하는데 써놓은 것은 있는데 어느 것을 내야 하는지.

  정리하고 정해야 하건만 마지막 단계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는 느낌 이우.

 

  노마 엄마.

  정말 어려운 공부를 그렇게 묵묵히 해내고 있어서 얼마나 자랑스러웠던지.

  모든 어려운 일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만이 바로 역사에 남는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겠소.

  더욱 문학 평론이라니 나와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어서 더욱 기쁘다오.

  부디 건강 조심하고 자신의 일에 끝까지 신념을 가지고 인내와 용기로 올케의 시간을 채우기를 바라면서 이만 쑥쑥 한 편지 쓰기를 끝내겠소.

 

  아참 롬이 아빠도 수고했다고 전해주오.

  노마와 리야도 건강하게 학교 잘 다니고 항상 롬이 엄마 가정에 건강과 사랑이 넘치길 바라면서 이만 줄이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동봉하오.

  지금까지 우리가 교육받은 서양 문화와는 다른 우리 문화에 대한 사랑을 알려 주어서 난 참 감명 갚게 읽었다오.

  지난 일요일에 원이 엄마가 다녀 갔는데 그 책을 선물했다오.

                                                    1996. 9. 10. 화요일 울산 동하 엄마 씀.

 

 

3. 선생님께 올립니다.

 

  매섭고 추운 날씨도 한풀 꺾이고 봄도 한걸음 한걸음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가정 편안하시고 건강하게 안녕히 계십니까?

  저는 선생님 염려 덕분에 아무 일 없이 건강하게 방학을 잘 보내고 있답니다.   

  늦게나마 간단하게 문안 인사와 더불어 글을 띄웁니다.

  선생님과의 만남과 추억도 어느덧 1년이라는 발자취를 남긴 채 짝짝 짝짝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갑니다.

  1년이라는 세월이 얼마나 많은 배움의 씨앗과 성장의 열매를 가져다주었는지 저는 잘 모르겠지만 세월이 더 지나 감에 따라 알게 되겠지요.

 

  알게 모르게 선생님께 걱정을 끼쳐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아이가 울산 여상이라는 학교에 입학하여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쁩니다.

 

  선생님을 담임 선생님으로 모신 것도 하늘의 뜻이겠지요.

  좀 더 선생님께 잘해 드리지도 못하고, 시간이 너무나도 안타까울 뿐입니다.

 

  선생님.

  1년 동안 배움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늦게나마 편지지 위에 감사하다는 글을 씁니다.

  그리고 하루의 막을 내리는 끝에 서서 끝맺음을 하려 합니다.

 

  안녕히 주무셔요.

  개학해서 다시 뵙겠습니다.

  건강히 안녕히 계십시오.

                                                      1987. 1. 27. 영자 올림.   

 

 

4. 선생님 전상서.

 

  겨울도 겨울 같지 않은 날씨에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선생님을 뵙지 않은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습니다.

  일찍 선생님께 글월을 올린다는 것이 그만 이렇게 늦게 되었습니다.

 

  참

  새해 인사도 늦었네요.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선생님 댁의 모든 하시는 일이 뜻대로 잘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87년의 한 해가 떠오른 지 벌써 한 달이 넘었습니다.

  1월은 지나고 2월 문턱에 다다랐어요.

 

  개학도 며칠 남지 않았고 얼마 안 있으면 선생님과 다시 만나겠죠?

  친구들이랑 선생님도 보고 싶어요.

  방학이 너무 빨리 지나간 것 같아요.

  별로 한 것도 없어요.

 

  선생님께선 이번 겨울 방학 때 무얼 하셨어요?

  저는 겨우 타자기 한대 부모님께 졸라 장만했습니다.

  저는 열심히 타자를 칠 거예요.

 

  방학 전에 세운 계획이 뜻대로 잘 되지가 않습니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편지 연락 많이 오겠죠?

  제가 제일 늦은 것 아닌가 모르겠어요.

 

  밤이 깊었습니다.

  선생님 몸 건강히 안녕히 계세요.

  선생님 얼굴을 그리며......

                                   1987. 2. 1일 1436 이성희 올림.

 

  p.s 편지가 너무 짧죠? 죄송합니다.

 

 

5. 선생님께

 

  한가닥 빨리 다가왔던 봄 날씨도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리고 오늘은 무척 쌀쌀한 날씨입니다.

  선생님은 닮은 귀여운 아기는 잘 크고 있는지요.

  멀지 않아 파아란 새싹이 돋아나고 아지랑이가 가물거리면 고2라는 훈장을 달게 됩니다.

 

  이젠 고등학교 때의 생활이 어떤 건지를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1년을 돌이켜 보니 그 시간들이 저에겐 꿈만 같이 느껴집니다.

  1년 동안 한 것은 없습니다만 얻은 것도 많은 것 같습니다.

  제 나이로 보면 자기 일은 스스럼없이 잘해 나갈 수 있는 좋은 나이지만 전 나이 값을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젠 의젓한 숙녀인데 숙녀답게 행동을 해야겠지요.

  그런데 선생님 한 계단씩 올라갈 때마다 어쩐지 불안한 마음과 지난 시간들에 대한 후회들이 제 곁을 떠나지가 않는군요.

 

  그리고 제가 짊어져야 할 짐이 너무 많이 쌓인 것 같아요.

  자꾸자꾸 올라 가도 계속 그 자리에 빙빙 돌뿐 제가 가야 할 질이 아직도 까마득한 것 같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얻은 것이 있다지만 얻는 것만큼 한 것이 없어서 후회가 막심합니다.

 

  지금부터라도 1학년 때 하지 못했던 것들을 열심히 해서 다른 아이들보다 몇 발자국 더 앞섰으면 앞섰지 뒷걸음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뒷걸음만 친다면 어 자신이 원망스럽고 부끄러워질 거예요.

 

  그리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늘 하신 말씀은 저의 앞길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학급을 맡으실 기회가 또 있으시면 계속해서 그런 좋은 말씀들을 아이들에게 많이 들려주세요.

  그러면 그 아이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쩌다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에 토라지고 못마땅한 점도 많았지만 그것이 저를 위해서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반항심이란 것이 자기 자신을 깊은 수렁에 빠뜨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팅이라는 것도 두 번 해보았지만 가슴만 설레게 할 뿐 시간낭비만 하는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도 그리고 그것이 제가 꼭 시장거리에 나도는 싸구려 물건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앞으로는 제가 제 값을 깎아내리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

  1년 동안 가르쳐 주신 그리고 지도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갑자기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오늘 밤 달이 무척 밝군요.

  그럼 편안히 주무세요.

  추신 : 답장 쓰실 시간이 계시면 좀 써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1987. 2. 16. 제자 남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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