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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세대 탐구 생활

하얀 로맨스

by 영숙이 2019.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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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금 생각하면 20여년 전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도 여행에 대한 향수는 여전할 뿐 아니라 역마살이라는 것은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이즈음에는 모두를 이끌고 돌아 다닌다.

 

  오토캠핑인 셈.

 

  요즈음 젊은이들은 어떻게 여행을 할까?

 

  그들에게 또순이가 했던 여행 이야기를 들려 줌으로써 그들이 건전하고 바람직한 여행을 하는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리고 오랜만에 옛 생각에 빠지는 기쁨을 누리기 위하여 이글을 쓴다.

 

 

  얼마전 겨울 방학이었다.

 

  원래 신문을 보면 어지간히 꼼꼼히 들여다 본다.

  좋은 책을 정성들여 정독을 하지 못하는 요즈음엔 신문이라도 열심히 읽어 볼 요량으로 읽기 때문이다.

 

  하루는 무심코 비지니스 면을 보니 아는 얼굴이 신문에 나와 있어서 이름을 보니 역시 아는 이름이다.

 

  조금 늙어 보이는 얼굴이지만 좀더 단정해 보인다는 것을 빼고는 그대로였다.

 

  남편에게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떠들었다.

 

    " 내가 학교 다닐 때 사귀던 애가 신문에 나왔어요! 처음에 이름을 보고 혹시나 싶어서 사진을 보니까 내가 사귀던 남자 친구 맞아요! "

 

  그렇게 떠벌이는데도 어디 신문 좀 보자 어떻게 생겼나 라는 대꾸도 없다. 시큰둥하게

   

    " 이젠 맛이 다 가서 중고 시장에 내다 팔아도 안 사갈껄? 난 걱정 안해! 그 대신 어디 갈 땐 아이들 꼭 데리구 다니라구! 너희들도 엄마 옆에 꼭 붙어 있구! "

    " 칫! "

 

 

  간호 학교 다닐 때 그 아이는 충남 대학 학보사 기자 였었다.

  또순이는 또순이네 학교 학보사 기자였고 우연히 써클에서 야유회를 갔다가 속리산 절 마당에서 철철 넘치는 우물물을 바가지로 떠먹고 있던 그 아이에게 의도적으로 물었었다.

 

     " 충남대학 학보사 기자여요? 전 간호학교 기자인데요! "

     " 이 써클에 타학교 학생들도 있었어요? "

     " 우리 학교 여학생들만 일부 있어요! 아까 소개하는데 보니까 그 학교 기자라고 소개하던데요? "

   

  우리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 되었고,

  우연을 가장한 그 애의 의도로 우리 집 골목에서 몇번 마주치면서 본격적인 데이트(?)를 시작 했었다.

 

 

  그러나 또순이는 아직 1학년이고 그애도 2학년.

  앞으로의 많은 가능성을 아직은 꿈꾸는 나이였기에 한 번씩 만나면서도 그렇게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각기 나름대로 형성하는 둘레가 달랐고 그저 한번씩 만나서 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지는 정도였다.

  본격적으로 조금 가까워진 것은 그 애가 같이 여행을 가자고 제안하면서였다.

  또순이는 또순이의 여자 친구를 그애는 그애의 남자 친구를 한명 데리고 가기로 하고 그애가 모든 여행 계획을 세우고 여행 경비는 공정하게 각출해서 그애가 관리하기로 하였다.

 

 

  비내리는 호남선 열차.

 

  대중 가요에 나오는 그 호남선 열차를 타고 여수로 향하였다. 

 

  지금도 그런 기차가 있을까?

 

  아직도 그 시간에 출발하고 있으며 여전히 완행 열차일까?

 

  그때는 너무나 기차가 붐벼서 서 있는데도 옆에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서 겨우 자리를 확보할 지경이었고 왠 먹을 걸 파는 사람과 통로를 통과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은지 그때마다 서 있던 자리에서 까치발을 서야만 사람들이 겨우 지나 다닐 수 있을 정도 였다.

 

  사람들이 지나 갈 때마다 그 애는 다른 사람들을 밀어서 길을 내주려고 조금이라도 또순이를 편하게 해주려 애썼다.

 

  어찌됐던 참 놀랐었다.

 

  이 밤중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에들 가는가!

 

  나이는 19살.

 

  또 옆에 남학생이 있고 하니까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가는 입석 기차 여행길은 피곤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 애는 빈 좌석이 나는가에 신경을 곤두 세우고 드디어는 빈 좌석에 앉혀 주었으며 자신은 서 있으면서도 늦게 앉힌 것에 안쓰러워 했다.

 

  새벽녘에 여수에 도착하여 여수 오동도와 충무에 있는 공원을 들렸다.

 

  지금까지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그때 새벽에 여수에 내려서 아침을 먹으러 가는데 시장 골목의 식당이었다.

  아침을 시키고 기다리는 시간에 굴 먹느냐고 묻고는 오늘 아침에 들어온 싱싱한 굴이 있다는 주인 아주머니의 말에 시켰더니 대소쿠리에 수북히 담아 오는 것이었다.

 

  또순이와 또순이 친구는 열심히 굴을 먹었다.

 

  사실은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것이지만 초장에 찍어서 이렇게 먹는 것이라고 배우는 순간에 너무나 열심히 먹어서 남자 애들이 놀라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싱그럽고 향긋할 수가 없었다.

 

  입안에서 녹는 그 맛이란,. 지금도 그 맛은 잊지 못한다.

 

  그 후로는 또순이가 좋아하는 음식 중에 한가지가 생굴 먹는 것이다.

 

  지난 번엔 충남 대학 학보사 애들끼리 왔다면서 여자 애들이 아무도 못먹는다고 안먹는 바람에 굴이 남아 돌았었는데 오늘은 모자란다면서 신기해 했던 기억은 아직까지 선명하다. 

 

 

 

  충무에서 부산으로 가는 밤배.

 

  지금은 육로가 있지만 그때에는 배를 타고 가는 것이 유일하게 가는 길이었다.

 

  생각보다도 배 밑창에 있는 3등 객실은 너무 붐볐다.

 

  뻬곡이 들어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모르는 남자 승객 둘까지 포함해서 6명이 카드를 쳤다.

 

  카드 역시 이번 여행처럼 난생 처음 쳐 보는 것이었고 재미도 없었지만 옆에서  대신 해주는 대로 따라 하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재미도 없고 잠도 오고 하여서 또순이와 또순이 친구는 아주머니 승객들 사이에서 앉은 채로 어렴풋이 잠이 들었었다.

 

  갑자기 시끄러워 지길래 일어나 보니 여전히 카드를 치고 있었던 남자 승객들 사이에 싸움이 붙어서 남자 하나가 병을 깨어 들고 누군가를 위협하고 있었고 또순이 남자 친구는 상황이 긴박하게 되니까 막 깨어난 또순이 앞을 가로 막고 보호하는 몸짓을 했다.

 

  밑으로 쳐진 안경을 검지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면서.

 

  그러다가 그 승객의 병을 누군가가 빼앗았고 술에 취해 있었던 그 사람이 잠이 들고 나자 깨어났던 사람들이 다들 각자 자리를 잡고 다시 잠들기 시작하였다.

 

  어찌되었던 잠이 깬 또순이는 밖에 선창으로 나가 보자고 하는 그 애를 따라 나갔더니 하얀 포말을 뒷꽁무니에 단채 배는 열심히 어두운 바다를 가로 지르고 있었다.

 

  조금 있으려니 아두운 바다 한가운데 다리가 보였다.

 

  남해대교.

 

  그 다리가 남해대교라고 했다.

 

  캄캄한 바다 한가운데 섬처럼 떠 있었다.

 

  그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였는데 저쪽 팀이 내내 티격태격 한다는 거였고 

또순이 친구는 또순이와 이야기를 할 기회만 있으면 자신의 파트너 욕을 하였고 그 쪽도 마찬가지 였었나 보다.

 

  그렇지만 우리는 싸우거나 말거나 일단 우리에게 짐이 안되니 그냥 그렇구나 할 정도로 구경만 할 뿐이었다.

 

  그 애가 말했었다.

   

    " 내 친구가 같이 와줘서 내가 두분의 여성에게 신경 안 쓰고 한분의 여성에게만 신경 써도 되니 얼마나 다행이어요! "

 

 

   다도해라 이름 붙인 남해 바다와

   뱃전에 하얗게 부서지던 파도들.

   

   배가 떠날 땐 말갛게 비치는 바닷물이었는데

   지금은 까만 어둠 속에서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으며,

 

   그리고 싫지 않았던 느낌들.

   무언가를 끊임없이 이야기 하였던 그 애.

 

 

   이튿날 새벽.

 

  새벽의 부두는 갯내음과 간밤의 어수선한 피곤을 묻힌 채 아직도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진짜배기 토종 충청도 아이들이었던 우리들은 짠 갯내음을 신기해 하며 부두를 벗어나 용두산 공원에 올라갔다.

 

  용두산 공원에는 시비가 있었고 시인을 꿈꾸는 또순이는 인상 깊게 그 시비를 읽었었다.

 

   그때 성경 학교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가 들렸다.

   주일 아침이었기에,

   이틀 동안 잠을 제대로 못잔 탓에 날카로워진 감각 끝으로 말간 햇볕 아래 공원에 울려 퍼지던 그 종소리는 너무나 맑고 긴 여운을 남겨 주었다. 

 

  그 일요일.

  교회 초등부 반사였던 또순이는 교회에 가지 못한 대신 종소리를 들으며 또순이에게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 기도와  소망의 기도를 했었다.

 

  이런 느낌을 가지고 ...

  이런 여행을 할 수 있는 감사......

 

 

  부산 태종대

 

  태종대에 가서 표를 끊으려고 기다리는 동안,  그 애가 커피 자판기에 가서 키피를 뽑아 왔다.

 

  지금이야 자판기가 흔하지만 그 당시에는 자판기가 흔하지도 않았고 또한 지금처럼 커피를 일상 음료처럼 또는 매일 마시는 일상사 처럼 흔하게 대하던 때가 아니었기에, 거기에다가 자판기의 커피맛이 지금처럼 좋지도 않았었다. 어쨌던 그렇게 커피가 네모난 커다란 통에서 동전을 넣으니 나오는게 너무 신기 했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시험 공부할 때 잠 안오는 비상 수단으로 어쩌다 한번 씩 블랙커피를 마셔 보기는 했지만 그때 까지만 해도, 그 후로도 오랫동안 커피를 즐기는 수준은 되지 못했었다.

 

  그렇지만 태종대에서의 커피 맛과 향은 지금도 기억이 나는 듯 싶다.

 

  누군가에게 좋은 향기와 같은 사람이 된다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 아닐까?

 

 

  태종대에서 고개 숙이고 그 애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걷다가 돌 파도가 치는 바닷가에서 올라오는 돌계단 돌틈 사이로 돈 이천원을 주웠다.

  돈을 주워서 손에 들고 바라 보다가 그애에게 주었다.

 

     " 주운 돈은 공금이고 공금 관리자잖아요! "

 

 

  그로부터 10년 후.

 

  지금의 남편과 결혼해서 시댁 일로 신혼 초에 크게 싸웠고 화해 차 둘이 간 곳이 이곳 태종대 였었다.

  아직 감정은 차가워져 있었던 상태였지만 어쩔 수 없이 여러 가지 면에서 현실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돌 파도 울리는 바닷가에서 돌을 주워 바닷 속으로 던지다가 돌아서서 올라 오는 돌계단 돌틈 사이로 접히고 꼬깃꼬깃 구겨진 돈을 주웠다.

  바로 그애와 같이 올라오던 그 돌계단 돌틈 사이에서 

  오천원.

  그때 그 돈을 남편한테 주면서 학창 시절 그애와 왔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주웠던 돈도.

  그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인연이란 무엇인가를 생각 했었드랬다.

 

 

  부산역에서 초저녁에 특급 열차를  탔다.

 

  서울로 가는 경부선 열차여서 기차가 일찍 끊어지고 또 귀가는 피곤하기 때문에 완행 열차 대신 특급을 탄 것.

 

   대전으로 올라 오는 기차 안에서 그 애는 잠깐 찬바람 좀 쐬자고 해서 둘이 기차 출입구 쪽으로 갔다.

   창문 앞에 서서 바깥 풍경을 보는데 찬 공기가 상큼하게 얼굴에 와 닿았고 그애가 자연스럽게 팔을 어깨 위에 둘렀다.

   싫지 않았다.

   그 애도 그렇게 가만히 있었고 또순이도 가만히 있었고 밤기차는 휙휙휙 덜컹 거리며 모든 것을 싣고 달리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오래 있지는 않았지만 그때의 그 어깨와 그 느낌은 확실하게 오래 갔었다.

 

   알뜰 살뜰 씀씀이로 경비도 남았고.

 

   대전에 도착하였을 때 마치 먼 곳을 몇몇일 다녀 온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유난히도 대전의 불빛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친구들을 보내고 난 뒤에 둘이서 저녁을 먹었다.

 

  그동안 힘들었다고 맛있는 것을 사준다면서 고급 음식점에 데리고 갔다.

 

  그때까지는 자유로웠었는데 갑자기 둘이 앉아서 그 애가 지켜 보는 가운데 밥을 먹으려니 자꾸 숟가락질이 서툴러지고 힘이 들었으며 무엇을 먹는지 조차도 모를 지경이었다.

 

   지금까지는 좋은 느낌 그 자체로 편안하기만 했었는데.

 

  느긋하게 앉아 미소로 바라 보고 있는 그애 대신 난 긴장하여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 지도 모르면서 먹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밤 9시.

  음식값 때문에 또순이가 주웠던 돈도 내놨다면서 안 쓸려 했는데 모자라서 어쩔 수 없었다며 중얼거렸다.

 

  또순이네 집까지 바래다 주고 그애는 자기 집까지 걸어 갔다고 했다.

  부드러운 봄밤의 바람을 느끼면서.

  피곤하지만 기분이 너무 좋았다고.

  그애는 그날 밤 밤새워  " 열두개의 반지 " 란 소설 하나를 완성하였고 그 소설은 자기네 대학 신문 문예 공모에서 장원을 하였었다.

 

 

   그 후에도 한번씩 만났지만 더 이상 그때처럼 가깝게 사귀어지지는 않았다.

 

   또순이가 졸업할 때 까지 만났으니 비교적 오랜 세월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친구로서의 거리를 항상 유지 했었던 것 같다.

 

   

 

   또순이는 또순이대로 그애는 그애 대로 더 좋은 사람을 만나겠지 하면서 만나면서도 시야 한가닥을 밖으로 내놓았었고 드디어는 그애가 여자 친구를 데리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만나고는 그대로 그것이 끝이 되었다.

 

   기차에서 또순이한테 그랬듯 여자 친구의 어깨에 둘러져 있던 그애의 팔을 보는 순간 그 애를 불렀고,

  그 애가 나와 만나면서는 한 번도 맨적 없는 빨간색 넥타이 맨 것을 바라본 순간. 

 

  끝이었다.           

 

 

  이제 이토록 시간이 흘러 가고 보니 한 번도 손을 안 잡아 보았던 것이 그리고 뽀뽀 한번 안해본 것이 약간은 아쉽지만 그러기에 더 아련히 떠오르는 것이 아닐까?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고 쉽게 육체 관계를 맺고

  아쉬움이 남지 않는 요즈음 아이들의 교제에 비하면

  엄청나게 구닥다리이지만

  그러기에 지금 이 나이가 되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오히려 그 때를, 그 청춘의 낭만을 그리워하면서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제 시집을 내었으니 한 번 쯤은 그 애의 주소를 알아 내어서 시집을 보내 줄까도 싶다.

 

  지난 날에 대한 미련 때문이 아니라 이 넓은 천지에 좋은 인연이었던 것을 기념 하여서.

 

  대학 시절 자기네 학교 신문 문예 공모에서 소설로 장원을 하였던 그 애.

 

  달맞이 꽃을 좋아하고 기타를 치며 달맞이 꽃 노래를 불러 주던,

  대학 신문 기자로서 대학 신문에 문학적인 글을 발표하던 그애.

 

  지금은 신문에 나라에서 운영하는 공사 기업의 홍보실장으로, 그 후로는 그 공사 기업의 본부장으로써 부동산 관련 글이 실리고 그애의 사진이 나올 뿐만 아니라 어떠한 문예 잡지에서도 그애의 글을 본 적이 없다.

 

  낭만을 꿈꾸던 그가 지극히 현실적이 되어 문학과는 영 거리가 멀어진 모양이다.

 

   ~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시를 써서 드디어는 시집을 낸 또순이를 기념해서  ~ 1996년 8. 14일 새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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