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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홀로선 버드나무

< 홀로 선 버드나무 > 42. 대단원

by 영숙이 2020.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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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단원>

 

   마지막 음악.

   

   선생님은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침울한 얼굴로 진료실에서 마지막 사무 정리를 하고 계시는가 부다.

 

      ㅡ 선생님 마지막 음악 소리가 들리죠? 우리는 어차피 이별을 전제로 한 만남이 아니었나요? ㅡ 

      ㅡ 언젠인가는 헤어져야 할 사람들이기에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지금 이대로 헤어져 가야 해요. ㅡ

    

   마음의 한구석에 손가락에 찔린 아주 작은 가시랭이처럼 남아 있어서 문득 느끼면 아프고 없애려 하면 잘 없어지지 않고 애먹이는 가시.

    

   영숙이는 달뜬 모습으로 제자리를 맴도는 연못 위에 작은 물방개처럼 서류를 들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환상 속에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서류 더미를 있는 대로 끌어 내놓고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없애 버릴 것은 없애 버리고 그러다가 갑작스러운 충동에 못 이겨 서류를 든 체 진료실로 건너갔다.

   

   선생님은 어두운 얼굴로 책상 위 장부 위에서 고개도 들지 않았다.

   내일이면 떠나실 분이다.

   

   영숙이는

 

      " 저 오늘 떠나요. ㅡ

        선생님.

        다른 데로,

        먼 곳으로 떠나요. ㅡ

        선생님보다 먼저요. ㅡ"

 

    외치고 싶었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 않고 

 

        ㅡ 이 모습이 이제 마지막으로 뵙는 모습이구나 ㅡ

 

    생각하니 친밀감이 밀려 올라오는 것이었다.

    서류를 편 체로 선생님 어깨에 올려놓고 잡아 흔들었다.

 

       " 선생님 뭐하세요? "

 

   어깨 위로 넘겨다 보니 진료 장부에 진료실을 다녀간 환자들의 이름, 나이, 병명, 주소, 성별 등을 적고 계셨다.

   선생님은 어깨를 심하게 흔들렸는데도 불구하고 손을 멈추지도,

   쓰는 것을 멈추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다.

 

   영숙이는 책상 위로 보냈던 시선을 걷어 창 밖을 내다보았다..

 

   창 밖에는 부드러워진 봄바람에 느티나무의 긴 줄기들이 목욕을 하듯 신선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포근한 햇볕과 부드러운 바람으로 아마도 느티나무는 그동안 닫았던 문을 열고 조금씩 조금씩 새싹의 생기를 숨 쉬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꿈틀 거리는 생명의 눈이 환하게 부드러운 바람 결로 전해져 왔다.

 

   영숙이는 마음 속 깊이 슬퍼하고 있었다.

   봄을 기다리고 있는 느티나무가 차라리 부러운 눈으로 바라 보인다.

   텅 비인 상태,

   그것은 고독과는 또다른 의미에서 바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선생님의 어깨 위에 놓인 손바닥과 가슴으로 전달되는 창 밖의 풍경.

   

   영숙이의 마음속이야 어찌 됐던 지금 즐겁고 유쾌해 보이는 것처럼,

   선생님이나 느티나무의 내부야 어쨌든 영숙이의 눈에 비친 주관적인 해석을 한다면 그것은 쓸쓸함.

 

    봄이 오고 생명이 다시 숨 쉬고 싹터서 생기가 난다 할지라도 여전히

       

      ㅡ 홀로 ㅡ

   

   서 계실 것을 왜 모를까.

   그렇지만 이 한 가지 만은 분명히 안다.

   

      ㅡ 지금 이 상태 그대로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ㅡ

 

   지금,

   어쩌면 우리는,

   어떤 착각을,

   이 특수한 환경 때문에 이런 감정들이 싹트고 자라 왔는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지금 이 상태대로 헤어지는 것이야 말로 가장 오래, 가장 아름답게 서로의 가슴에 새기어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오래도록 생각이 날 것이다.

   어떻게 이 시간들을 잊을 수가 있을까?

   이 조용한 곳에서 아름답게 장식된 서로의 젊음과 청춘의 시간들을.

 

   영숙이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책상 앞에 앉아서, 또 서성이면서 사물들을 정리해 나갔다. 안양 언니는 책상을 끌어다 놓고 난로 앞에 앉아서 무심하게 스킬 자수를 하고 있었다. 

 

      " 얘기해야지. "

      " 언니, 저 오늘 다른 데로 가요. 학교로요. "

      " 내일 그쪽에 가서 인사해야 해요. "

      " 뭐? "

      " 국민학교 양호 교사로? "

      " 아니요. "

      " 중학교? "

      " 아니요!  울산 여상이라고 고등학교 교련 교사로요. "

      " 울산? 울산이 어디 있지? "

      " 우리나라 남쪽 끝에 있어요. 부산 옆에요. "

      " 누가 해주었는데? "

      " 제가 졸업한 대학 교수님이 거기에서 선생님 구한다고 알려 주셨어요. 어제 인사하고 왔어요. 내일부터 그쪽에 가서 근무해야 해요. "

      " 학교 잘 찾아갔구나. "

      " 전 어차피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가려고 했어요. 임용고시에 합격해서 발령 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

      " 선생님보다 먼저 떠나갈 거라고 노래 ~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 먼저 떠나가는구나. "

      " 곽 양도 없는데 못 보고 가겠네? "

      " 네. "

 

   대답하면서 달력을 올려다보니 3월 마지막 날자에 영숙이네 집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얼마 전 선생님이 영숙이 전화번호 적어 놓은 것을 지웠더니 윤선생님이 달력을 바라보시다가

 

      ㅡ 어 지워졌네 ㅡ

 

   하며 고집처럼 그 자리에서 다시 쓰셨고 그 자리에서 영숙이 지우는 것을 바라보시다가, 싱긋이 웃으면서 볼펜으로 더 크게 적고 몇 번 실랑이를 하다 결국은 큰 글씨로 적힌 것을 그냥 두었었다.

   

   볼펜을 들어 달력에 쓰여 있는 전화번호를 지우고 안양 언니를 바라보니 만회가 깃든 얼굴로 의자에 주저앉아 망연히 창 밖을 내어다 보고 있었다.

   가끔 만나게 되는 나사 빠진 모습으로 입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목소리로 안양 언니가 물었다.

 

      "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니? 나중에 혹시 가면 전화할게. "

 

    안양 언니 옆에 가서 전화번호를 불러 주고 언니 수첩을 들여다보니 그곳에 윤선생님 댁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영숙이는 수첩에다 전화번호를 옮겨 쓰고 다 챙긴 장부들을 책상 한쪽으로 쌓아 놓고 책상 서랍과 케비넷을 깨끗이 닦아 내었다.

   

   누군가 열어 보았을 때 어떤 흔적도 느낄 수 없도록. 

   장부들을 다시 한번 점검하는데 선생님이 이쪽으로 건너오셔서는 회색빛 얼굴로 중얼거리듯 언니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 서울 갔다 올게요. "

 

   그리고는 그대로 사무실 문을 지나가려고 하자 언니가 불러 세웠다.

   

       " 선생님 김양 오늘 그만 둔대요. "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돌아보시던 선생님은 돌아 서서 난로 곁에 오셨다.

 

      " 그래서 아까 함부로 그랬구나. 이제 헤어진다고. "

 

   혼잣 말처럼 중얼거리는 선생님에게 안양 언니가 이야기를 하였다.

 

      " 울산 여상으로 간대요. "

      " 울산? "

      " 울산에 성모 병원 있지요? "

      " 울산에 없고 포항에 성모 병원이 있지. "

      " 참 이 사진 가져가세요. 아주 잘 나왔어요. "

 

   그곳에는 면사무소를 배경으로 정원에 놓인 돌 위에 앉아 여유 있는 모습으로 선생님이 웃고 계셨다.

   선생님은 한참을 들여다보시더니 조용히 사진을 들어 호주머니에 넣고는 말하였다. 

 

      " 아무튼 서울 올라갔다가 내일 올 테니까, 내일 와서 보건소에 마지막 인사도 해야 하고. "

 

   선생님은 우울한 표정 인 체로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고 무거운 몸짓으로 돌아 서서는 나가셨다.

   안양 언니와 영숙이는 현관까지 따라 나가서 인사를 하였다.

 

       " 선생님 잘 다녀오세요. "

 

   선생님은 깊고 어두운 눈초리로 환하게 웃는 영숙이 얼굴을 말없이 쏘아보다가 영숙이가 눈부셔할 때쯤 돌아 서서 면사무소 정문을 향하여 걸어가셨다.

   

   내려앉은 어깨에서는 침묵과 우울의 냄새가 날아왔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짚어 넣은 두 팔은 허전하게 엿보였으며 정문을 돌아 섰을 때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과 철망 사이로 꾸부정한 옆모습이 실루엣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윤선생님은 끝내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지도,

   앞을 바라보지도 않고,

   발끝만 내려다 본체 바람이 휑하니 불어오는 모습으로 떠나갔다.

   

   영원히 영숙이의 가슴속으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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