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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세대 탐구 생활/편지글

편지글 19

by 영숙이 2020.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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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여름 >

 

  한여름.

 

  온몸으로 포악한 볕살을 견디며 서 있던 나무들이, 이제는 마치 실눈 뜨고 볕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유 있고 부드러워 보입니다.

  대립하던 만물과 햇살이 어느 사이 화해의 손을 잡았을까요.

 

  보내주신 글이며 책들, 너무나 감사히 받았습니다.

  무엇에선가 받은 감명을 그렇게 금방 글로 써 내릴 수 있다니 정말 부럽습니다.

  보내주신 시 뿐 아니라 동서 커피 문학상에 응모하신 거며, 처용 수필에 내실 글을 써 놓으셨다는 것 등, 어쨌든 부담 없이 자꾸만 쓰는 버릇을 들여야 하는 건데 저는 잘 안되네요.

  쓴다는 자체가 우선 부담으로 다가오니... 쓸려고 하면 우선 두려워져요.

  저 자신이 정말 글쟁주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까 봐서요.

  참 우습죠?

  해보지도 않고 지레 겁주터 내고 앉았으니 이런 못난이가 또 있을까요.

 

  지난 여름방학 끝무렵,

  새롬아빠로부터 휴가를 받았던 적이 있었답니다.

  날수로는 하루,

  시간으론 열두시간,

  분으로 따지면 칠백 이십 분.

  오랜만에 느긋한 시간을 보냈답니다.

 

  전 그 열두 시간을 꼬박 삼성생명 근처 지하도에서 보냈습니다.

  지하도 분식집에서 점심 요기하며,

  오가는 사람들이며,

  거기서 점심 먹는 사람들의 표정,

  옷차림,

  또 음식을 먹는 모습 등등,

  아무도 나를 알아보는 이 없는 곳에서 혼자 앉아 내키는 대로 먹고 구경하고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지없이 홀가분하고 자유스럽더군요.

  아빠가 애들을 보고 있으니 애들 걱정할 것 없겠다, 그러니 더 바랄 것이 없더군요.

 

  어느 잡지에 이런 시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대와 애들이 함께 여행을 떠나

  빈 집에 나 혼자 남게 된 날

  오그라들었던 사지가 길게 길게 늘어나고

  아닌 봄 바짝 마른나무 빈 몸에서 꽃이 만발합니다.

 

  왠지 쓸쓸하고 외로운

  오랜만에 존재의 바닥 깊이에서 피어나는 꽃

  사랑과 행복의 이름으로 짓눌려 피지 못했던

  나 혼자만의 고적한 꽃들이

                                  (양정자 '혼자 피는 꽃' 전문)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근처 문경서적으로 갔습니다.

  대전에서 제일 큰 서점이라고 애들 피아노 선 생니 그러더군요.

  오랜만에 보는 큰 서점이었습니다.

  진해에서는 경북 서림이 제일 컸었는데, 문경은 그 배 이상은 될 것 같더군요. 

  서울 큰 서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제겐 더 이상 바랄 게 없었습니다.

  신도안 코딱지 같은 서점에 비한다면 하늘과 땅까지는 아니라도 63 빌딩과 땅 정도는 될 테니까요.

 

  한 마디로 정말 좋더군요.

  시간에 쫓기지 않으면서 내가 보고 싶은 책을 실컷 볼 수 있다는 것이.

  비록 훑어보는 정도에 불과할지라도.

 

  머릿속이 반짝 불을 켜면서 기름 듬뿍 친 기계처럼 원활하게 가동을 시작하고,

  가뭄으로 말랐던 가슴속의 샘물이 갑자기 퐁퐁 솟아오르는 듯했습니다.

  바슐라르가 이렇게 말했다지요?

 

"새로운 책들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적선을 베풀어 주는가!

  매일 하늘에서 싱싱한 이미지들에 대해 말하는 책들이 한 바구니 가득 나에게 떨어졌으면 좋겠다.

  이 서원은 자연스럽다.

  이 기적은 쉬운 것이다.

  왜냐하면 저곳 하늘에서는 천국이 거대한 도서관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아침이면,

  내 책상 위에 쌓인 책들 앞에서 독서의 신에게 나는 게걸 들린 독자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의 일용할 굶주림을 주십시오'. "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있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가슴 떨리게 행복한 일인지요.

  허리가 뻐근해 오고 다리가 아프고,

  눈앞이 침침하고 아플 때까지 이런저런 책들을 보다가 지치고 허기져서 서점을 나왔답니다.

 

  다시 간단히 저녁 요기를 하고, 지하도를 한 바퀴 돌아보았지요.

  꽤나 큰 지하도이더군요.

  상점도 많고, 앉아서 쉬라고 휴게 시설도 곳곳에 있더군요.

  하지만 역시 지하라 그런지 공기가 좋지 않아 눈이 따가웠습니다.

  잠시 앉아 쉬다가 대훈 서점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여러 가지 책을,

  책 속의 또 다른 세상을,

  가는 시간을 아쉬워하며,

  허겁지겁 게걸스레 머릿속으로 가슴속으로 집어넣었습니다.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생각했습니다.

  그래, 무조건 이것저것 따지 말고 해 보는 거다.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읽고 닥치는 대로 써보는 거다.

  꼭 문학 서적만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책을 손 닿는 대로,

  시간이 되는대로,

  시간을 아껴가며 읽고,

  무슨 글이든,

  써보지도 않고 능력 운운하며 지레 겁먹지 말고,

  일단은 써보는 거다.

  내 무능력을 확인하게 될지라도.

  그러한 생각들이 제 불 켜진 머릿속에서 분명하게 떠올랐습니다.

  그것이 그날 열두 시간의 외출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날의 그 생각과 결심을 저는 지금까지 제대로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게으름 탓인지,

  예,

  아마 그 탓이 가장 큰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이 좀 우습기도 합니다.

  뭐 대단한 글이라도 쓸 사람처럼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 바람은 그저 일상생활하듯이 자연스럽게,

  말하자면 세수를 하거나 양치질을 하는 것처럼 아무 부담 없이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님께서 그렇게 무엇에선가 받은 감동을 금방(저로선 '금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몇 편의 시로 써내신 것이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한 것입니다.

 

  보내주신 여섯 편의 시들은 아마도 짧은 시간에 써내신 것이라 완전히 퇴고가 이루어지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들이 전체적으로 좀 거칠기도 하고 생각이랄까 느낌? 감상? 같은 것이 글 속에 무르녹지 못한 느낌도 듭니다.

  즉 시적 형상화가 덜 이루어졌다고나 할까요.

  또 일상적인 언어를 이상적인 표현법 그대로 사용하여 무언가 새롭고 참신한 느낌이 없이 진부하고 상투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시를 쓰는 데에 있어서 고심한 흔적이 덜 하다는 말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아마 아직 덜 다듬으신 탓인 것 같습니다만,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나타내기 위해 가장 알맞은 어휘,

  적절한 표현법을 선택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해 보입니다. 

 

  글쓰기,

  특히 시 쓰기는 언어의 예술이 아닙니까?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 등,

  나타내고자 하는 바에 가장 정확하고,

  가장 아름다운 언어를 찾으려는 노력은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과함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단어는 사실 몇 단어가 되지 않습니다.

  쓰지 않아 묻혀가고,

  잊혀 가고 있는 주옥같은 모국어들을 찾아 빛을 보게 하고,

  나아가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 내는 사명이 시인을 비롯한 모든 글 쓰는 이들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형님께서 그러시는군요. "됐네, 이 사람아. 다 아는 소리 관두고 다음 얘기나 하지.")

 

  '숫용추에서'는 우리의 기억 저 너머, 집단 무의식의 근원을 더듬어 올라가 아득한 원시의 땅을 상상해 보게 하고, 자연의 원시적인 힘과 생명, 신비를 생각해 보게 합니다.

  그런데 시의 앞부분에서는 숫용추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찾아야 할 것들이 있고, 숫용추가 아직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음을 써 나가다가, 뒷부분에 가서 갑자기 남북통일 운운하는 것이 앞부분과 주제도 어긋나고, 표현도 상투적으로 보입니다. 

  차라리 숫용추가 가진 생명의 힘과 신비 쪽으로 초점을 맞추면서, 숫용추에 대한 사랑, 나아가 잃어가고 있는 자연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관념으로 빠지지 않게 유의하면서 노래하는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숫용추 계곡에서'는 특히 뒷부분의 표현이 진부한 것 같습니다.

  똑같은 주제이더라도 표현에 따라 참신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또 3연의 '환상을 만드는데'에서 그저 '환상'이라고 추상적으로 쓰지 말고, 환상의 구체적 내용을 글을 읽는 사람이 환상적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신비'라든가 '환상'이라든가 하는 추상적인 단어만의 나열은 어쩐지 독자에게 "신비하다고 느껴!" "환상적이라고 생각해!"하고 윽박지르는 느낌입니다. 

 

  '사십 대의 낭만'은 어느 정도 인생의 고비를 지나 체념, 달관을 체득하고, 현실에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고 그 속에서 낭만과 꿈을 찾는 사십 대의 모습, 백제 와당에 새겨진 백제인의 미소 같은 사십 대의 넉넉함을 그리고자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표현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얘기를 하다가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 손짓, 발짓해 가며 그거 있잖아, 요렇게 해서 조렇게 말이야. 하는 식의 답답함이 느껴집니다.

  여섯 번째의 연의 바닷가, 강가, 계곡 등은 시인이 나태내고자 하는 아름답고 고요하고 맑고 넉넉함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인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그런 이미지를 독자가 시구절 속에서 바로 느낄 수 있게요.

 

  '진신사리'는 아마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영감을 얻으신 시인 것 같은데, 그 '진신사리'의 정확한 뜻을 몰라 답답합니다.

  저는 그것을 세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사리와 동일한 의미다.

  둘째, 사리 중에서도 특별히 부처님의 사리를 지칭하는 말이다.

  셋째, 진신, 그러니까 부처님의 몸 자체, 혹은 이름난 고승의 몸 자체를 말함이다.

  저는 아무래도 두 번째가 맞을 것 같습니다만, 만일 제 생각이 맞다면 시의 '주지 스님 진신사리'란 말은 적절하지가 않을 것입니다.

  정확한 뜻을 알아보겠습니다.

 

  이상으로 시를 읽은 제 감상을 몇 가지 써 보았습니다만, 써 놓고 읽어보니 흠만 잡은 것 같습니다. 

  원래 남의 좋은 점보다는 나쁜 점을 찾기가 쉬운 법이거든요.

  또 남의 나쁜 점을 들추어낼 때가 가장 신나지 않습니까.(인간성 다 보이네.)    하지만 제 어쭙잖은 감상이 형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편지 쓸 기회를 마련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솔직히, 쓰기 전엔 부담이 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기회가 아니면 저 혼자 알아서 글을 써 보기가 쉽지 않거든요.

 

  보내주신 책은 이제야 1권을 끝냈는데요, 우리 문화재에 대한 지식을 어렵지 않게 일러 주면서, 별생각 없이 서양적인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는 저 자신을 비롯한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해 생각해 보게 했습니다.

  또 작가가 지닌 우리 국토, 우리 것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미의식에 심한 질투심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형님의 분투를 빌면서, 언제나 싱싱한 이미지, 싱싱한 표현으로 살아서 펄떡펄떡 뛰는 싱싱한 시를 건져 올리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좋은 추석 보내십시오.

                                                          1996. 9. 24. 노마 엄마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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