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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관련/경제관련

인감도장

by 영숙이 2020.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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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감도장>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하는데 갑자기 인감도장 생각이 났다.

 

 ‘인감 도장'
'인감도장? 어디 뒀더라? ’

 

출근 길이 바쁜데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자주 보관하는 곳을 대충 뒤졌지만 나오지 않았다.

 

 ‘찾아야만 오늘 하루 심란하지 않겠지! 아니면 하루종일 도장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할텐데…’

 

운전하면서 생각해보았다.  

 

‘ 인감도장을 '본인 외 발급 불가'로 해놓았으니까 상관없겠지! 잊어버렸으면 다시 만들어서 신고하면 되지 뭘! '

 

많은 생각들이 스쳐가고 그려면서도 혹시나 하는 의심도 들어간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편하지는 않다.

   

‘ 내가 인감 찍을 일이 몇 번이나 있으려고! ’

 

생각해보니 결혼 초에 비하면 정말 많은 것을 소유했다.

지금도 37년전 신혼 때를 생각하면 아릿하다.

 

‘ 네 남편 월급으로 계돈 붓고 있었는데 결혼하면 그 계돈 계속 부어주어야 한다. ’

 

어머님 말씀에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신혼시절이 아닌가?

두 번 붓고 나니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내 월급으로 생활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혼자 살다가 둘이 살게 되니까 생활비가 두 배가 드는 것이 아니라 시가 쪽과 친정 쪽으로 이리 저리해서 서너 배가 더 든다.

또 남편이 가져온 급여로는 계돈 넣기에도 모자랐다.

 

도저히 어머니가 달라는 계돈을 못 넣겠다고 어머니한테 말하니까  대신 시외숙모가 하는 1년 6개월짜리 시외숙모 계를 들라고 권유 하는 대로 마지막에 타기로 하고 시외숙모 계를 매달 붓기 시작하였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왜 그렇게 쓸데는 많고 월급은 작은지.

 

아무리 아껴도 모자라기 마련이고 계돈을 붓기 위해선 안 쓸 수밖에 없는데 먹는 걸 아끼는 것 외에는 아낄 방법이 없었다.

 

학교 점심식사는 학교 식당이 없어지는 바람에 선생님들이 다들 시켜 먹는 상황이었다.

주머니에 돈이 별로 없는 상황이라서 다른 선생님들은 다 짜장면 시켜 먹어도 짜장면 대신에 학교 매점에 가서 빵을 사 먹고는 하였다.

 

그렇게 마지막 달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계돈 타기 일주일 전에 시외숙모가 불렀다.

 

“ 계돈 500만원은 너희 시누이 대학 등록금 때문에 너희 시어머니가 써야 한다고 해서 그리로 부쳐야겠다. ”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이 하얘져서 집에 돌아와서 가슴만 쓸어내렸다.

 

‘내가 그 돈을 모으기 위해서 얼마나 아꼈는데 만져보지도 못하고 …’

 

그 이후에도 그런 일은 계속되었다.

 

보너스 탈 때에는 장사 밑천이라고 가져갔고 재형저축 탈 때에는 집에 일하는 아이 월급 준다고 가져갔다.

 

어머니는 눈 수술한다고 오른쪽 한번, 왼쪽 한번 가져가고 다음에는 어느쪽 눈 수술했는지 가져간 것을 잊어버리고 또 오른쪽 눈 수술한다고 달라고 하였다.

 
틀니도 몇번 해 넣으셨다.

 

시동생 사고 쳐서 대출해다 주고 시누이 시집간다고 가져갔다.

 

누구누구 결혼식이라고 축하금에, 누구누구 장례식이라고 부조금에, 조상 묘 돌본다고 가져가고, 묘지 쓸 땅 산다고 가져가고 묘지 미리 만들어야 장수한다고 가져가고 돈 좀 생길 즈음에는 항상 가져가서 몇 년 그렇게 하고 나니 표시도 안 나면서 돈은 하나도 남아나지 않았다.

 

‘ 이렇게 살다 간 가난을 면치 못하겠구나! ’

 

그 후부터 내가 타는 월급은 무조건 학교에서 선생님들끼리 하는 계돈에 집어 넣고, 찾을 수 없는 교사 공제회에 가입해서 불입하고, 10년 이상 짜리 적금으로 부었다.

 

그리고 남편이 가져오는 월급은 월급 타는 날에 무조건 시내 백화점에 가서 한 달치 생활필수품을 몽땅 사들였다.

 

난 점점 시댁 식구들로부터 돈만 아는 나쁜 년이 되어갔다.

 

백일도 안된 아이를 안고 시댁에 가라고 해서 아이 안고 혼자 갔던 날 큰집에 제사 지내러 가야 한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는데 난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 제사는 뭐하러 지낸대요? 안갈래요. ’

 

노발대발한 시어머니는

 

‘ 아니 니 친정 동생 아이 백일까지 챙겨서 애 담요까지 사 가지고 갔으면서 조상 제사에 안 간다고? ‘

 

안 그래도 미운털이 박힌 터에 애까지 낳았겠다. 그야말로 힘을 다해 시가의 온 가족이 괴롭히기 시작했다.

 

큰 집으로 제사 지내러 안가겠다고 한 날, 시댁에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가타부타 말도 없이 남편이 멱살을 잡고 때리기 시작하였다.

 

“ 네가 우리 엄마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니가 뭔데? 우리 엄마가 울면서 전화했더라. 나쁜년 너 같은건 맞아야 해. 맞아야 정신 차리지. "

 

각오했었다.

 

‘ 몇 대 때리고 말겠지! ’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모진 매질. 

사람 살리라고 하는데도 주인집 아주머니는 방문 밖에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시부모가 전화했었다고 한다.

 

‘ 시끄럽더라도 가만히 있으라고 … ’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고 긴 시간이었다.

방문 밖에 있던 주인집 아주머니가 방문을 열면서

 

‘ 아니 왜 그래요? ’

 

그때서야 매질이 끝났다.

 

그때부터 이혼을 생각했지만 애 데리고 시댁에 혼자 오라한다고 친정에 전화했더니   

 

' 뭐 어떻게 하겠어? 별일 있으려구. '   

 

하셨던 친정 엄마.

 

' 헤어지면 복수 못하지! ’

 

주일 날 낮에 학교에서 함께 일직을 했었던 선배 선생님 왈

 

‘ 이혼하고 혼자 뭐 할래? 애는? 우리 언니가 밥통에서 밥 푸는데 시어머니가 앞에서 잔소리하면서 밥주걱 달라는 걸 밀었다가 이혼 당했잖아. 시댁에 애들 둘다 떼어 놓고 친정에서 할일 없이 이리기웃 저리기웃 하면서 돌아다니고 시댁에는 새며느리가 들어와서 잘만 살고 있다구. ’   

 

이혼한다고 하니까

 

'친정 식구들이 딸 월급 타는 거 아까워서 이혼시키려 한다'

 

고 하였고

몇 년 동안 영숙이 월급으로 부었던 재형저축이 만기가 되어서 타는걸 확인하고는

 

'느들이 돈 모은 거 가지고 아파트 얻어 주려 했다.'

 

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였다.

 

좀 조용해지니까 시부모와 시부모 옆집에 살던 시이모 부부가 우리를 중매했던 울산 외숙모 집으로 와서 대기하고 있다가 남편까지 합세해서 퇴근하자마자 영숙이를 외숙모 집에 오라고 불러서 밤새 퍼부었다.( 7명이 돌아가면서 영숙이를 무릎 꿇려 앉혀 놓고 퍼부었다.)   

 

'우리 아들이 너 때문에 얼마나 울고 다녔을지 안봐도 다 안다. 잘못했다고 여기 저기 다니면서 빌게 해? 독한 년 울지도 않네.'.

 

그후에도 자주 대구인 시댁에 다녔는데 어느 날 아버님이 들으라는듯,

 

' 전자제품 대리점 차려 준다더니 다 거짓말이네. ' 

 

그리고 그해 가을 시어머니가 연락도 안 하고 갑자기 찾아왔길래

 

‘웬일이세요? ‘

 

했다고

김장 가지고 아들 집에 왔더니 그런 소리 한다고 하면서 지옥을 만들었다.

지옥이 다른 게 아니고 바로 그것이 지옥이었다.

 

그 후에도, 결국 평생동안 다달이 생활비는 건너갔다.

전셋집에 찾아 와서 하던 말

 

‘너도 아들 키우지만 키워서 나중에 생활비 달라고 안 하겠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혼은 환상이 아니고 현실이었고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집으로 시집을 간 것이다.

 

싸움의 연속 …...

부부싸움.

 

시동생 결혼하는데 돈 내놓으라고 한다.

돈이 없었다.

 

돈이 없다고 하니까 월급 타서 다 뭐했냐고

시아버지가 일요일 날 아침에 전화해서 난리를 쳤다.

 

주택공사에서 파는 땅을 할부로 샀기 때문에 돈이 없다고 하니까,

 

'왜 부모 몰래 말도 안 하고 땅을 샀느냐'

 

고 난리다.

 

인생 쉬운 게 없었다.

산 땅에다 집을 짓겠다고 하니까 이번엔 시동생이 지으라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원수'

 

될 거라고 하였다.

 

예수 믿고 나서야 생활비 드리는게 마음에서 정리가 되었다.

 

'모르는 사람을 위해 교회 헌금도 하는데 시부모 위해서 생활비 드리는게 당연한 것을.'

 

여기까지 어떻게 왔을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절대로 올 수 없었던 길이었음을 새삼 확인한다.

 

예수 믿기 전에는 

 

"태백산맥"

 

을 읽고 시댁식구들을 이해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있었던 전라도는 우리 나라 최초로 자가용 비행기를 가지고 있었던 지주들과 그 지주들의 땅을 부쳐먹는 소작인들이 있었는데 가을에 추수하면 봄부터 빌려 먹었던 쌀을 내 놓으려면 추수한게 모자랐다. 

소작인들은 살아 남으려고 추수의 일부를 감추었고 그렇게 거짓말을 해서 살아 남았으며 힘든 농삿일은 욕으로 풀었다. 

 

순간 임기웅변이랄 수 있는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어떻게 저렇게 잘할 수 있을까 신기해했던 일이 이해되었다. 

세상에 욕이란 욕을, 어떻게 저렇게 찰진 욕을 만들어서 할까 신기해했었던 것도 이해되었다.

이해했다고 미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시댁식구들을 이해 했음에도 여전히 미워했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내 마음에서 증오와 미움을 치료하였고 사랑하기까지는 아니어도 미워하지는 않았고 그래서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아버님이 돌아 가시고 어머님은 치매로 요양원에 계시는데 매주 주일마다 뵈러 가다가 코로나 때문에 못가게 된 이후로 요양원 병실에서 병실 안 화장실도 못 찾아 가시고 화장실 간다고 나오시면 병실로 돌아가지 못해 병원 복도에서 주무신다고 한다.

그분들은 그분들이 살아오신 방법대로 며느리를 다루신 것이고,

영숙이는 여러가지 일을 겪은 후 하나님을 찾아 하나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런 영숙이에게 제일 먼저 예수님께서 시키신 일이 시댁 식구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고 주님의 은혜로 순종하여 지금의 평강과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몇일 전 시부모님의 앨범에 있는 사진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결혼해서 어찌됐던 시댁 식구들과 사이가 안좋아서, 시부모님 모시고, 한번도 장거리 여행을, 1박 2일 여행조차 가본적이 없다는 생각이 났다.

물론 딸이 있는 대전에서, 울산으로 내려 오셔서, 5년 계시는 동안,

주말이면,

울산, 부산, 경주 근처의 모든 좋다는 장소와 식당과 맛집은 다 다녀보았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 시부모님에게 잘해 드려. 돌아가시면 후회한다. "

친구한테 그 말 들을 때는 정말 이해가 안됐는데,

앨범 사진을 보노라니,

한번 쯤은 모시고,

해외라도 다녀왔으면 좋았을텐데,

좀 더 잘해 드릴 수 있었는데,

후회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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