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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세대 탐구 생활/또순이 어렸을 적에

또순이 어렸을 적에 64 - 고구마

by 영숙이 2019.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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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고구마 <글쓴이 : 김기남> 2001/11/02/11:23

       

        눈발이 희끗 희끗 흩날리는 저녁 무렵.

        퇴근하여 큰 동서와 모처럼 술자리를 가졌다.

        사는 집이 가까운지라 가끔 한잔 술을 나누곤 했는데,

        근래에는 서로 바빠 오랜 만에 만든 자리 였다.

       

        약속 장소로 가다 보니 길거리에서 훨훨 타는 장작 불로 먹음직스럽게 고구마를 굽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학비에 보태려는지 학생인 듯한 고구마를 굽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은 숯 검정이 묻은 채 불빛으로 벌겋게 보였다.

 

         조촐한 안주에 소주 잔을 주고 받으며 자연스레 어렸을 때의 고구마가 화제가 되었다.

         10년 연배로 60대를 바라 보는 동서 인지라 가슴에 묻어 둔 얘기가 많았다.

         그 시절 고구마는 주식이었고,

         굶주린 배를 달래는 수단이었으며

         군것질 대용이었다 한다.

         특히, 겨울 하교 길에 꽁꽁 언 고구마 맛을 잊지 못한다 했다.

 

         종일 점심도 거른 채 공부하고 

         몇 십리 떨어진 집까지 걸어 가노라면,

         주위에 먹을 것 하나 없는 황량한 겨울 들판 바람은 입성(옷)이 변변치 않은 뼛속까지 파고 들고,

         굶주린 창자는 사정 없이 등에 달라 붙는데,

         등교할 때 길 옆에 띄엄띄엄 숨겨 놓은 고구마를 하나, 둘......찾아 먹는 그 맛은 그야말로 꿀맛 이라던가.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까맣게 잊고 지냈던 학창 시절의 일이 생각 났다.

         중학교 때의 일이니까 20여년 전 일인가 보다.

         여느 날 같으면 방에 틀어 박혀 공부나 한답시고 뒹굴 거리고 있을 일요일이었다.

 

         그날 따라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읍내 5일 장에

         고구마를 팔아 돈을 마련 하시겠다는 어머니를 따라 나섰다.

         어머니는 윗방 윗목 통가리로 그득한 고구마를 큰 자루에 가득 채워

         아버지 부축을 받고서야 간신히 머리에 이고

         30리길 읍내를 향해 종종 걸음을 하셨다.

         말이 종종 걸음이지 고구마 무게에 눌려

         목은 어깨에 파묻히고,

         힘겹게 버틴 다리는 팔을 앞 뒤로 힘껏 흔들어야 발짝을 떼어 놓을 수 있었으니

         갈지자 걸음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도중에 한번 쯤 쉬려 해도

         마땅히 짐을 부축할 사람이 없어 내려 놓을 수도 없고,

         나이 어린 내 힘으로서는 한번 쯤 교대를 한다든지 쉬게 할 재간이 없었다.

         어머니는 내리 누루는 무게를 버텨 내느라

         족히 20리를 걸어 가면서

         내내 말씀 한마디 못하셨다.

 

         나로서는 매일 같이 걸어 다니는 등하교 길이라서

         새로울 것은 없었지만,

         처음 따라 나선 장 구경의 자그마한 설레임도 잊은 채

         걱정스러운 눈으로 가끔 어머니를 흘끔 거리며

         묵묵히 뒤 따를 뿐이었다. 

 

         가파른 고갯 길 정상에 오르자 

         좋은 물건을 먼저 사려고

         아침 일찍 부터 기다리고 있던 몇몇 장사꾼이

         짐이 무어냐고 앞다투어 물어 왔다.

         고구마라는 대답에 사겠다고 하는 장사꾼이 없었다.

         내처 조금을 더 가니 한 사람이 산다고 했다.

         얼마에 사겠느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1관에 130원씩 내고 가라고 했다.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완강히 버티는 어머니의 저항을

         장사꾼은 이내 노련한 솜씨로 기를 꺽어 놓았다.

            "읍내로 가봐야 산다는 사람도 없을 뿐더러 무겁게 10여리를 더 갔다가 되이고(다시 이고) 오느니 여기서  팔라 "

         는 얘기 였다.

 

         그러잖아도 더 이고 갈 기력도 없는 어머니는

             " 관 당 10원씩만 더 얹어 주고 근대(무게)나 달아 보라 "

         고 하셨다.

         고구마 무게는 14관이 나갔다.

         1관이 3.75 Kg이니 52.5 Kg 이나 되는 무게였다.

         사정도 해 보았지만 값은 더 받지 못하고

         1820원이 어머니 손에 쥐어졌다.

 

 

         받은 돈을 한 손에 꽉 움켜 쥐고

         읍내를 향해 한 동안을 더 가시던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집으로 돌아 가자고 했다.

         그 당시 우동 한 그릇 값이 500원 정도로 

         아무리 싼 점심을 사먹는다 해도

         고구마 판 값의 절반 이상을 써야 할 판이니,

         밥을 굶더라도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더 요긴한데 쓰려고 생각했음이리라.

 

 

         정오를 알리는 오종(午鐘) 부는 소리가 읍내서 들린지도 한참 지나고,            늦 가을 짧은 해에 두 모자의 그림자는 점점 동쪽으로 늘어 지는데 .....

          언감생심 애초부터 옷 한 가지 얻어 입을 것은 기대도 안 했지만,

          점심도 못 먹은 채 집까지 걸어 가는 자갈 뒤 덮인 신작로는 왜 그리 멀기만 한지 ......

          혹시 아는 사람이 이런 모습을 알지나 않을까 하는 어린 마음에

          내 고개는 자꾸만 숙여졌었다.

 

 

          술 자리가 파 하고 집으로 돌아 가는 길에

          집으로 돌아 가는 길에 따끈 따끈 한 군고구마 한봉지를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사다 주었다.

          맛이 있느니,

          너무 태웠느니 하면서,

          입 주위가 시커멒게 된 줄도 모르고 먹는 모습이

          오늘 따라 왠지 부럽게만 느껴지며,

          불현듯 어머니 생각이 간절해졌다.

 

         

          어머니께서 나를 장에 데려 갔을 때는 무언가 생각이 있어서 일텐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에게 점심은 커녕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한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군고구마 권해 드리며

          그날 그 애기를 나누고 싶다.

 

          1999년 초겨울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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