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 보건지소, 첫 오후에 드러난 사람의 결
🖼️ “말은 사라지고, 자리는 남았다”
🧊 1. 얼음으로도 식지 않던 말
숨소리를 새근거리며
더위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수건으로 몇 번이고 닦아내던 그녀는
냉장고 문을 열어
얼음을 꺼냈다.
얼음을 얼굴에 대면서도
말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세상에…
날 이런 데로 보내다니.
버스도 없는 곳에
어떻게 근무를 하라는 거야.”
설마 내가 그만둘 줄 알았나 봐.
정말 속상해 죽겠어.
얼음은 빠르게 녹아
손가락 사이로 물이 흘렀지만,
그녀의 말은
좀처럼 식을 줄 몰랐다.
“말 한마디 없이,
하루아침에 이런 곳으로 발령을 내다니….”
그 말들은
사무실 안 공기를 긁고 지나가며
혼잣말처럼 흩어졌다.
🚶♀️ 2. 아장아장, 사라지는 분노의 방향
그녀는 혼자 면사무소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옆 사무실 지소장님에 대해서
간단히 묻고는,
집이 청주라
짐을 가지러 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누가 와서 묻거든
그렇게 이야기해 주세요.”
말을 마치자마자
역시나 아장아장,
성급하면서도 무거운 걸음으로
창 앞을 지나
면사무소 정문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자
사무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3. 말 없는 사람의 자리
창문 쪽 책상에 앉아 있던 나는
그 자리가
이전에 태자가 쓰던 자리라는 걸 알고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내 자리로 정했다.
안양은 센터 안쪽에 있는 책상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리로 삼았다.
그 선택에는
나이나 근무 경력 같은
뚜렷한 계산이 있었다기보다는,
그저 그렇게
흘러가 버린 결정처럼 보였다.
나는 따지지 않았다.
묻지도 않았고,
말을 붙이지도 않았다.
원래 센터 안쪽 책상은
간호사 자격증이 있는
모자보건요원의 자리였고,
마주한 책상은
보조 간호사 출신 보건요원의 자리였다.
안양과 곽양은
보조 간호사 출신의 보건요원이었다.
그 사실을
나는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였다.
🌸 4. 창문 앞에 남은 오후
오후 내내
나는 창문 앞에 서 있었다.
건물 옆을 따라 만들어진
작은 꽃밭이
햇볕에 잠겨 있었다.
꽃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내가 지금
이곳에 서 있다는 사실이
천천히 실감 났다.
청산.
보건지소.
월요일 오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이곳이
이제 내 자리라는 것을
나는 조용히 알아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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