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성 보건지소의 오후, 〈바그너에의 환상〉을 쓰다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을, 먼저 써보았다.>
콩꽃이 피어 있던 아침이 지나고,
청산 보건지소의 오후는 다시 고요 속으로 가라앉았다.
영숙은 책상 앞에 붙어 앉아 있다가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볕은 여전히 창가에 머물러 있었고,
시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얼굴로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책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심심해서였다.
아니, 어쩌면
마음 한쪽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숙은 종이를 꺼내
제목부터 적어 내려갔다.
〈바그너에의 환상〉
바그너의 사랑을 떠올리며 쓴 이야기였다.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았고,
설령 쓴다 해도
보낼 곳 하나 없는 글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녀는 그저
소설 연습이라고 생각하며
펜을 움직였다.
굳이 ‘바그너’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실제 음악가 바그너가
남다른 사랑을 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그 이름이 주는 울림이
왠지 모르게
이 글에 어울린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바그너의 사랑〉, 그 대강의 이야기
이야기 속의 바그너는
음악처럼 사랑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랑을 소유하려 하지 않았고,
함께하지 못하더라도
상대의 삶을 침범하지 않았다.
바그너는 한 여인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끝내 현실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감정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했기 때문에
더 깊은 음악을 만들고,
사랑했기 때문에
혼자 남는 법을 배운다.
그의 사랑은 붙잡는 사랑이 아니라,
기억으로 남는 사랑이었다.
<사랑을 쓰기 시작하다.>
글을 다 쓰고 나서도
영숙은 한동안 펜을 내려놓지 못했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 읽힐 일도 없고,
현실의 삶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는 것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다.
아직 사랑을 하지 않았지만,
사랑을 상상하고
사랑을 써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영숙은
어제와는 다른 자리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청성의 오후는 여전히 조용했지만,
그 침묵 속에서
영숙은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자기 안쪽에서 불러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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