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베이비붐 세대 탐구 생활/또순이 어렸을 적에

여의도 한강성심병원 3.

by 영숙이 2020. 11. 20.
728x90
반응형

 

<여의도 한강성심병원>   

 우리 방에는 6명의 아이들이 함께 썼는데 정말 개성이 제각각인 아이들이었다.

 

 그중에 제일 모범생은 임태숙.

 

 태숙이는 얼굴도 도회적으로 생겨서 세련되고 예뻤지만 손도 빨라서 일도 잘하고 깔끔하고 말도 없는 여자여자한 아이.

 웃을 땐 눈만 웃는 아이였던 태숙이랑 친해지고 싶었지만 벌써 친한 아이들이 있어서 한번씩 이야기만 나누었지 친해지지는 못했다.

 

 뭐라고 떠드는 아이가 아니여서 잘 몰랐는데 태숙이는 얼마나 일을 잘하고 인정을 받았는지 간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영등포 한강성심병원에 픽업 되었다. 

 물론 또순이는 병원에 간호사로 갈 생각이 없어서 아예 처음부터 관심도 갖지 않았지만 임태숙은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아이였다.  .

 

 

 졸업하고 3년인가 후에 중앙일간지에 여의도 한강성심병원 의료진이 아프리카에 봉사활동 하러 갔다는 기사가 났다. 

 신문에 사진이 실렸는데 사진 속에 태숙이가 학교 다닐 때 그 머리 모양 그 얼굴 모양 그모습 그대로 사람들 사이에 서서 찍은 사진이 나와 있었다. 

 

 또순이는 선자랑 친했지만 선자는 가정 형편상 병원 실습을 엄마가 다니던 성당인 대전카톨릭 교구의 대전 성모병원에서 했다.

 서울에서 하려면 따로 비용을 내야 했는데 동생들이 3명에다가 선자 엄마 혼자 벌어서 학비를 대고 있었기 때문에 또순이가 그토록 간청했지만 서울에서 하지 못했다.

 그리고 선자는 졸업 후 자신이 실습을 했던 대전 성모병원에 취직해서 결혼 할 때까지 다녔다.

 

 다른 아이들은 보통 친한 아이들과 한방에 배정 받았는데 친한 친구가 없었던 아이들은 두루두루 섞여서 배정 받았고 우리 방은 그런 방 중에 하나였다. 

 

 이영숙 ~ 이 아이는 시골스러운 얼굴이었는데 이 아이에 대해서 기억나는 거는 참 불평이 참 많은 아이라는 것이다.

 솔직히 또순이는 여관 옥상에서 여관 집에서 해주는 밥이 맛있었다.

 특히 갈치 찌개는 얼마나 맛있었는지, 아이들 숫자 만큼만 만들어서 더 달랄 수도 없었지만 항상 싹싹 긁어먹었는데 영숙이는 언제나 반찬이 시원찮다고 불평을 했다.

 그렇다고 밥을 안먹는 것은 아니었다.

 밥도 잘먹으면서 먹고 나면 꼭 뭐라고 트집을 잡았다.

 

 또순이가 뭐라고 할 입장은 아니어서 그냥 가만히 듣고 있었는데 사실 가만히 듣고 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따뜻한 밥에 따뜻한 국에 생선 반찬도 주고 가끔 김도 주고 밥이 참 맛있는데."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반찬이 형편없다고 욕하는데 그런 말을 면전에다 대고 하면 또순이가 너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들은 영숙이의 말에 하나씩 동조하더니 드디어는 반찬이 너무 없다고 파업을 했다.

 여관 밥을 거절한 것이다.

 

 "우리는 반찬이 안좋은 식사에 밥값을 안낸다."

 

 밥을 해주던 아이는 우리보다 나이가 어린 중학교나 고등학교 1학년에 다녀야 하는 어린 여자아이였다.

 그냥 밥값내고 여관에서 해주는 밥먹는게 제일 싸게 칠텐데 ~ ~ ~

 

 한달동안 여관밥을 안먹고 친한 아이들끼리 밖에서 사먹기도 하고 모두들 어떻게 해결하는지 해결했었다.

 또순이는 작은 냄비를 사서 쌀을 씻어서 여관 보일러실 연탄위에다 올려놓고 밥을 하였다.

 밥이 구수하게 익어가고 있는데 여관 주인이 발견하고는 여기다가 밥을 한다고 난리를 쳤다.

 

 "여기에다 누가 밥을 하는거야? 어떤 학생이야? "

 

 난리를 쳐서 또순이는 놀라서 냄비를 방으로 들고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냄비 밥이 맛있었다. 

 얼마 후 서로 이야기가 잘되어서 다시 여관에서 해주는 밥을 먹기 시작하였다.

 한번 데모를 한탓인지 확실히 반찬이 좋아지기는 하였다. 일주일에 한번씩 나오던 생선이 최소 이틀에 한번은 나왔으니까 ~

 그래도 영숙이는 불평을 했지만 덕분에 우리도 다 같이 덕을 봤으니 처음처럼 그렇게 듣는게 힘들지는 않았다.

 

 '쟤는 원래 저렇게 불평을 하는 아이구나.'

 

 그애가 새끼발톱에 무좀이 있는 아이였는데 한방에서 여러 명이 살다보니까 하루는 또순이가 그애의 스타킹을 신었었나 부다.

 새끼발톱에 무좀이 걸려 그 이후 44년간 새끼발톱에 무좀이 걸려 있는 상태로 살고 있다. 

 

 제일 기억에 남는 아이는 홍숙경.

 

 우리 방에서 아니 우리 B반에서 말하자면 노는 아이였다.

 

 까졌다거나 질이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시골 고등학교에서 모범생으로 있다가 간호학교에 진학한 아이들이라서 조신했고 교수님의 말씀을 잘 따르는 아이들인데다 숙소밖에 잘 안나가는 집순이들이었다.

 숙경이는 집 밖으로 잘 나다니는 아이였다.

 

 처음에는 또순이는 숙경이랑 성미화랑 같이 영등포 역 근처에 있는 다방에 놀러 나갔었다.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음악 다방에 가서 이층에 있는 자리에 앉으면 남자애들이 힐끗거리고 숙경이는 그걸 즐기는 것이었다. 

 나가자고해서 두어번 따라 나가다가 또순이는 사먹는 거랑 음료수 값이랑 비용도 비용이려니와 숙경이의 태도가 마음에 안들어서 거절을 하고 나가지 않았다.

 성미화는 계속 숙경이랑 놀러 나갔었다.

 

 그러다보니 숙경이는 씀씀이가 헤펐고 또 항상 돈이 모자라서 같은 방에 아이들이나 친구들한테 돈을 빌리기 일쑤였다.

 더우기 숙경이한테 배정된 물건 놔두는 자리는 늘 물건이 쌓여 있어서 물건들이 정신없이 흩어져 있었고 또 그것들을 한번도 정리하는 일이 없어서 물건들이 방안에 마구 돌아 다녔다.

 물론 한번이라도 방을 청소하는 일도 없었다.

 

 맨날 청소하는 아이들만 청소를 해서 청소 당번을 만들어서 돌아가면서 청소를 하기로 하고 청소표를 만들어서 방문에 붙여 놓았다.

 우리는 자신이 청소하는 날을 확인하고 그날은 방을 쓸고 닦고 하였지만 숙경이는 절대로 정말 한번도 방청소를 안하였다.

 결국 우리는 숙경이에게 방청소 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청소표 붙인게 창피해서 떼어내고 결국 낮에 근무가 없어서 방에 있는 아이들이 하게 되었다.

 

 우리들의 숙경이에 대한 이미지는 좋지 않았다.

 거기에 숙경이는 x-ray실 기사들과 데이트를 하였다.  

 x-ray실에 맨날 놀러가서 장난치더니 병원 밖에서 만난다고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수도 있는 것을 그때의 우리는 아직 간호사도 아니었지만 자존심 상하게 2년제 출신의 x-ray 기사들과 사귄다고 욕을 하였었던 생각이 난다.

 

 숙경이는 방에는 관심 없고 맨날 집밖으로 나돌면서 액서사리나 쓸데없는 물건들을 사다 나르면서 남자나 만나고 다니는 방청소는 1도 안하면서 자기 얼굴과 몸은 깔끔하게 치장해서 귀여운 얼굴로 상큼하게 웃고 다니는 아이였었다.

 외모로만 보면 상큼 발랄한 부잣집 막내 딸이었다.

 

 숙경이는 졸업 후 졸업생 중에서 제일 먼저 새로 생기는 대학 부속병원에 수간호사로 들어갔고 결혼은 남자 보조간호사랑 했다는 후문이다.

 

 같은 방에 있던 성미화랑 서보원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잘 어울리지도 않았고 서로 근무시간이 다르데다 근무하는 부서가 달라서였다.   

 근무 안할 때에는 방에 있지 않았고 다른 방에 놀러가거나 친한 친구들이랑 어울리거나 집에 다녀오거나 해서 함께 어울릴 시간이 없었다.

 근무를 마치거나 근무를 하기 위해서 교차하는 시간에 잠깐씩 얼굴을 볼 뿐이었다.

 

 보원이는 졸업 후에 사우디에 있는 병원에 간호사로 갔다.

 사우디 남자들이 잘생겼지만 일부다처제라서 잘해보자고 해도 그럴 수 없었고 한국에 나와서 선을 보면 모두 하나같이 물어보는게

 

 '사우디 가서 돈 많이 벌었겠네요. 얼마나 벌었어요?'

 

 그게 너무 싫었다고 했다.

 졸업후에 우연히 보원이를 만났을 때 파리로 여행을 간다고 하였다. 파리로 여행가서 박물관도 보고 ......해외 여행을 꿈도 못꾸던 그 시절 1980년에 보원이는 세계 여행을 다녔다. 

 

 

 또순이는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3인 남동생만 빼고 동생들을 서울로 오라고 해서 서울구경을 시켜 주었다.

 중2 여동생, 초등학교 6학년 남동생, 초등학교 2학년이던 막내 여동생더러 기차를 타고 올라오라고 하였다.

 영등포 역으로 시간 맞춰 마중 나가서 동생들을 만나 여의도 국회의사당과 여의도 광장을 구경시키고 숙소인 여관에 데리고 와서 우리 방에 재우고 싶었지만 교수님이 점검한다 해서 여관 주인에게 말해서 방한칸을 돈을 주고 빌렸다.

 아주 작은 방이었는데 동생들 3명과 함께 방문을 꼭 잠그고 마음 편하게 따뜻하게 잤었던 기억이 난다.


 다음날은 주일.

 명동을 구경 하다가 11시 시간에 맞춰 명동에 있는 오래된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교회 맨 뒷자리에 4명이 나란히 앉아 머리가 하얀 나이드신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았었다.

 또순이는 오래된 교회의 그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교회에서 나는 나무 냄새가 좋았다.
 동생들은 제일 큰누나가 데리고 가니까 당연히 함께 가서 예배를 드렸다.
 모두들 대전 대흥동 집 주위에 있는 대흥 교회를 누가 다니라 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들 다니고 있었다.
 목사님의 축도가 끝나고 교회를 나와서 덕수궁, 경복궁, 남산, 박물관 등등을 구경하고 기차를 타고 대전 집으로 함께 왔었던 기억이 난다.

 
 참 뭐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여관도 시설이 형편없었고 화장실도 전체 한칸인가 두칸인가 있었던 시절이
었다.

 

 뭐가 없었어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참 많이도 걸어다니며, 유일한 이동수단이었던 버스를 타고 다니던 것을 전혀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았던 때였다.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종점까지 왔다 갔다 하기도 참 많이 했었다.

 

 '창밖에 보이는 낯선 풍경에도 그저 신이 났었던 20살 나이.'

 '청계천 서점 전체를 돌아다니며 김소월의 영역시집을 뒤지고 다니던 청춘'

 

 또래 아이들이 배우러 다니기보다는 산업현장인 가발공장에서 또 방적공장에서, 지하에서 미싱일을 하면서 동생들 교육비를 벌던 시절이다.

 서울.

 그 넓은 땅.

 그 많은 사람이 있는 곳. 

 

  아는 사람 한 사람 없는 서울을 20살의 또순이는여의도 한강성심병원을 통하여 그렇게 서울 땅을 밟았다. 

 

 

 

                                           .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