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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세대 탐구 생활/또순이 어렸을 적에

영등포 한강 성심 병원

by 영숙이 2020.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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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한강 성심 병원>

 간호학교 입학 후 2학년  1학기를 마친 다음 서울 실습을 마친 A반이 내려 오고 우리 B반이 서울 영등포 한강 성심 병원에 실습을 갔다. 

 간호학교로 진학 한 이후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6개월 서울 청량리 국립 정신병원에서 2개월 실습하는 날을 정말 많이 기대했었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 서울에 가보고 싶다는 바램.

 

 영등포 한강 성심 병원에서 실습하기 위해 병원 앞에 있는 여관이 숙소로 잡혀 있었다.   큰방은 5~6명 작은 방은 3명 정도 배정받아 함께 생활하면서 day, evening, night 이렇게 3교대로 8시간씩 스케쥴에 따라 실습하였었다.   

 

 처음 영등포역에 도착 했을 때 그리고 여관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교수님이 배정하는 대로 숙소에 짐을 정리하고 우리 6명은 쮸쮸바를 사다가 방에 길게 누워서 쮸쮸바를 빨았다.

 다 함께 누워서 쮸쮸바를 빨고 있으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남다른 느낌이 들기도 하고 서울이라는 낯선 공간이라는 곳이 새삼스럽기도 하였다.

 

 방은 6명이 누우면 공간이 남지 않는 그런 방이었다.

 그날 밤은 우리 모두 같이 한방에서 잤지만 그날 뿐이었다.

 다음날 부터 모두들 스케쥴대로 움직였기 때문에 더 이상 다 같이 모여서 한방에서 누워 자거나 모여 놀거나 할 일은 없었다.

 

 day, evening은 매일  night 를 하면 다음 날 낮과 하루 밤을 쉴 수 있었다.

 일요일은 쉴수 있었고 저녁에 점호도 없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다니거나 집에도 다녀올 수 있었다.

 평일은 밤 10시가 점호여서 evening이 아닌 이상은 전부 방에 대기하고 있어야 하고 교수님의 점호를 받아야 했다.

 

 식사는 여관에서 제공하였다.

 실습하는 중에는 병원 식당에서 식사를 제공하였기 때문에 병원에서 먹었고 실습시간이 아닌 때에는 여관에서 공책에다 사인을 하고 먹었다.

  아직 경제적 개념이 잘 없어서 식비나 숙소비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는 잘몰랐지만 병원에서 실습을 하면서 인력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실습비도 받고 또 2학기 등록금을 실습비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것으로 숙소비와 식사비를 계산 하였던 것 같다.     

 

 아직 20살짜리 여자애가 알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하지만 병원 실습은 재미있었고, 시간이 나면 병원 주변을 돌아 다니기도 하고 여의도도 구경가고 갈 수 있는 모든 곳을 찾아 다니며 구경하였다.

 문학에 뜻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많은 경험을 하고 싶었고 많은 곳을 보고 많은 것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 내과 실습을 하였는데 어느 날 눈에 핏줄이 터져서 안과 선생님한테 진찰을 받았다.

 선생님은 배를 꾹꾹 눌러 보더니 변비 때문에 눈에 핏줄이 터진 것이라고 하였다.

 

 일요일 11시에는 병원 바로 옆에 있던 영등포 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갔다.

 교회는 대전 친정집 옆에 있는 대흥 교회만큼 큰 교회였고 목사님은 헌금을 내면 일일이 헌금 낸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쓰여진 기도 내용을 읽어 주었다.

 그렇게 헌금을 내는 사람과 또 헌금 낸 사람들의 이름이 불리는게 부러웠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교회에도 청년부가 있었을 텐데 청년부가 언제 예배를 드리는지 잘모르겠고 해서 청년부가 있는 교회를 찾아서 영등포 한강변을 헤매다가 어느 날 병원 옆에 있는 교회보다는 좀 작은 교회였는데 청년부 모임을 시간에 맞추어 찾아 갔다.

 처음 찾아 간 청년부 모임에서는 낯설어서 머뭇머뭇하였고 젊은 청년들과 아가씨들 얼굴과 자기 소개를 구경하다가 마쳤고 다시는 가지 않았다.

 그 작은 교회는 한강변에 있는 버드나무를 따라서 걷다가 들어 갔었던 교회였었다.

 

 숙소 여관 앞에는 작은 손수레에서 호떡을 구워 팔고 있었다.

 가끔 여관에서 밥을 먹고 밖으로 나와서 몇몇 아이들과 호떡을 사서 간식으로 먹고는 했는데 설탕이 많이 들어 있어서 요령껏 먹지 않으면 꿀이 흘러 나와서 옷을 버리기 십상이었다.

 정말 맛있는 호떡이었다.

 간식을 잘 사먹지 않았고 먹을거라고는 여관 옥상의 작은 방에서 주는 식사 뿐이어서 우리는 밥을 먹고 여관 앞에 나와서서 한번씩 호떡을 사서 먹고는 하였다.

 

 숙소에 있을 때에는 시를 썼다.

 아니 시를 쓰려고 노력했다고나 할까?

 시를 써서 문학사상에 보내고는 하였다.

 한번은 답이 왔다.

 아마 주소가 여관으로 되어 있어서 답을 보낸 것이 아닐까 싶다. 

 "귀하의 작품을 잘 읽었으며 계속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보내온 편지를 너무나 기뻐하면서 귀한 보물을 간직하듯 가지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후에도 계속 보냈지만 이후 한번도 답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샘터같은 작은 잡지에 시를 써서 보냈고 잡지에 실린 시를 보고 누군가가 편지를 보내왔다.

 전라도 어디의 누군가가 보낸 편지를 보고 답장을 보냈고 그렇게 펜팔은 6개월 이상 이어졌었다.

 

 3학년 봄에 펜팔하던 친구를 대전 동학사에서 만났었다.

 펜팔을 나누던 친구 이야기는 다음에 한번 더 써야겠다.

 안타까운 것은 그때 주고 받았던 편지도 울산 우수아파트 마당인 화단 앞에서 다 태운 것이다.

 이렇게 티스토리를 쓰게 될 줄 알았더면 계속 가지고 있었을 텐데 앞날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나.

 결국 모든 일은 장기계획을 가지고 한다면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지만 꾸준히만 계속 한다면 결국 상향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내과 실습이 끝나고 응급실 실습을 하였다.

  응급실 실습을 하는 어느 날 낮에 응급실 정문이 아닌 옆문으로 사람들이 일렬로 주욱 걸어 들어왔다.

 

 "출근 길 교통사고"

 

 그때만 해도 버스는 만원버스였다.

 출근길 버스 정류장은 버스를 타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람들이 가득하였고 안내양 아가씨는 한사람이라도 더 태우려고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꾹꾹 눌러 밀었고 출입문을 두팔로 잡고 버티면서 타고 가던 시절이었다.

 출근길 회사 버스가 다른 시내버스와 부딪히면서 몇몇 사람들이 넘어졌고 피부가 벗겨진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우울한 얼굴로 마치 그림자처럼 걸어 들어와서 이름을 대고 의사 앞에 앉아서 불편한 부분을 말하고 엑스레이를 찍으러 가던지 소독약을 바르고 나갔다.

 

 한번은 응급실에 유치원생이 실려왔다.

 지붕에서 떨어져서 머리를 다쳤다고 하였다. 엑스레이를 찍으러 가는데 머리뼈가  ㅠㅠㅠ  엄청 무서웠다.

 하루는 화상을 입는 부부가 응급실에 들어왔다.

 사람 탄 냄새가 그렇게 지독한 줄은 몰랐다.

 그때만 해도 가스랜지는 자동으로 꺼지고 켜지는게 아니어서 가스렌지가 켜진줄 모르고 불을 붙였는데 그게 폭발해서 두 부부가 전신 2도 화상을 입은 것이다.

 

 사실 그때 살림살이에 가스렌즈를 쓰는 집은 잘 사는 집이었다. 잘 살기 때문에 사용하던 가스렌즈 때문에 화상을 입었던 것이다. 

 부부가 따로 치료를 받는데 상대편 상황이 어떤지 몰라서 서로 안타깝게 부인은 남편을 남편은 부인의 상황을 간절하게 물어대서 우리들이 참 불쌍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화상 노린네가 코에 붙어서 심하게 냄새가 났다. 너무 힘겹고 견디기 어려워서 목욕탕에 가서 열심히 씻어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10일 이상을 그 냄새와 함께 지내야 했었다.

 

 44년 전 한강 성심병원 응급실에서 있었던 기억중 한가지는 30대의 젊은 남자가 응급실 앞에서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일이었다. 

 남자는 구리빛으로 탄 건장하고 정직해 보이는 키가 큰 농부였다. 경기도 시골에서 농사 지으면서 중학생인 아들을 서울에 유학 보낸 것이다.

 아들이 체육시간에 체육을 하다가 쓰러졌고 양호교사가 없는 학교에서는 가정선생님이 양호 업무를 맡고 있어서 아이를 데려 왔는데 너무 늦은 것이다. 응급처치만 잘했어도 아무 문제 없었을 것이다.

 넘어지면서 의식을 잃었을 때 가슴을 누르며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심호흡을 시켜서 산소 공급이 될 수 있도록만 하였다면 ~ 기본적인 응급처치만 알았어도 정말 안타까웠다.   

 그때 또순이는 서울에 있는 공수부대 하사로 복무하던 택이와 데이트를 하던 때였다.   일요일 날 경복궁이나 남산을 돌아 다니다 응급실 나이트를 하려면 너무 피곤하였고 너무 피곤해서 환자가 없는 틈에 간호사들이 쉬는 공간에 들어가서 좀 누워 잤다가 간호사한테 걸려서 결정적으로 실습 점수가 깎였다.

 간호사들이 또순이가 근무시간에 잤다고 이야기를 했고 간호사들이 매기는 점수 덕분에 올 A+이 아니고 응급 실에서 A- 성적을 받았는데 그 점수 때문에 2학기 성적 순위가 중하위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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