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친구>
- 이문웅. 전 신협 이사장. 처용수필 제2호 1996. 겨울 -
우연히 어울린 자리였다. 술잔이 몇 순배 돌고 분위기가 제법 흥겹게 익어 갈 무렵이었다. 구석자리에 앉아있던 김군이 느닷없이
" 형님 주위에는 친구가 많던데... 진짜 친구는 몇 명입니까? "
하고 물어왔다. 적당히 얼버무리려 했다. 그러나 김군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해 딱히 그럴 까닭도 없을 것 같고 또한 그렇게 하느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라 여겨져서 관표지교의 벗 "L"을 서스럼 없이 얘기해 줬다. 내게 이런 소중한 친구가 있으니 마음은 항상 부자가 아닌가 싶다. 먹거리, 볼거리, 놀거리등 사소한 일에도 서로 챙기며 동행 하기를 원하는 사이고 보니 어쩌다 일을 당할 때는 눈물겨웁도록 헌신적으로 보살핀다.
그는 초등학교때부터 사귄 벗이다. 그가 1반 급장을, 나는 2반 급장을 줄곧 5년동안이나 도맡아 했으니 어쩌면 그와 나는 경쟁 관계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한번도 경쟁의식을 가져본 적이 없는 순수한 친구일 뿐이다.
그런데, 우스꽝스럽게도 그와 나는 장기만 두면 툭하고 싸움질을 했다. 처음 몇 수까지는 누구나 그러하듯 탐색전이다. 허허실실 이요, 실즉허라, 졸과 병이 움직여 허를 보이는가 하면 차를 움직여 성동격서 전법을 구사하기도 한다. 피아간 신경전이요. 심리전이다. 역시 참을성이 부족한 자가 먼저 설치기 마련, 수성에서 벗어나 폭가 적진 깊숙히 뛰어들어 좌충우돌한다. 소탐대실과 고육지계가 가로 8칸 세로 9칸의 네모판 위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서로가 팽팽한 맞수 대결이다. 어느 쪽이든 한 수만 삐그덕하고 실수하면 끝장이다. 틈만 보이면 파죽지세로 몰아칠 기세다. 매가 병아리를 채가듯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다. 긴장이 고조되고 무거운 침묵이 계속된다.
장고 끝에 악수랄까? 누군가 한수를 읽지 못해 상, 포의 양수겸장을 받고 말았다. 한 수만 물리자고 통사정을 한다. 물려 줄 리가 만무하다. 트집을 부린다. 완전히 생트집이다. 실수 자체가 이유다. 수가 아닌 실수니까 물려야 한다고 고집이다. 실수 그 자체가 실력차 때문이라고 반격하게 되면 이윽고 피아간 반상을 떠난 자존심 싸움이 되어 애꿎은 장기알만 수난을 겪게 된다. 지나고 보면 웃을 일이다.
그와 나는 장티푸스로 많은 시간을 병마에 시달린 적이 있는 기이한 인연이 있다. 공교롭게도 거의 동시에 앓아 누웠고 거의동시에 회복되었던 기억이 난다. 내게 병문안을 왔다 간 후 앓았으니 나로 인해 전염이 되었구나 싶어 지금도 그를 보면 계면쩍은 생각이 든다. 장티푸스는 전염성이 특히 강한 돌림병이기 대문에 현대의학에서도 격리 치료를 요하는 괴질이니 말이다. 병후 디룩디룩 살찐 얼굴을 거울에 비추면서 한 줌도 안 남은 머리카락을 잡고 서로가 많다고 우겨대던 대가 생각나면 저절로 배꼽이 째진다.
그가 대학시절 과 톱을 먹어서 삼성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고 했을 때 나는 마치 내 일인양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방학때가 되면 우리는 꼭 만났고 그때마다 그와 나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소크라테스를 이야기 했고 플라톤과 칸드를 이야기 했다. 특히 그가 메카르트의 "회의론"을 이야기 할 때는 사뭇 흥분된 듯 격앙된 어조였다. (사실은 신일철 교수의 흉내를 내었지만 ...)
우리는 「세빌리아의 이발사」나 「 돈조바니 」 같은 오페라를 흉내내어 돼지 멱따는 고함도 질렀고 「 햄릿」과 「리어왕」이되기도 했다. 「제우스」신을 원망했고 프메데우스에게 가없는 연민의 정을 쏟기도 했다. 「슈베르트」 를 사랑했고,「베토벤」의 열정을 한없이 부러워하며, 「그리그」 의 「솔베이지 송」에 취하기도 했다.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모든 이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천공을 향해 날아가는 저 새의 이름은 '아프락삭스'다"
데미안에 의해 구출된 싱클레어가 자아에 눈을 뜨고 내뱉은 말이다.
후두둑,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그날따라 유난히 을씨년스럽게 들리던 겨울 밤이었다. 그와 나는 데미안과 싱클레어를 통해 인간의 내면세계에 존재하는 초라한 또 하나의 인간을 발견하고 놀라와 했다. 끝없는 고독의 뒤안길에서 떨고 있는 이름없는 존재에 대한 무한한 두려움이랄까.
안타깝게도 "L"은 직장을 따라 서울에서 살고 있다. 그는 고향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고향의 흙을 만지며 고향산천의 바람을 실컷 마시고 싶다고 하던 친구 ...
고향을 사랑한느 마음은 아름다운 것이다.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은 순수한 것이다. 순수하다는 것은 착하고 선함을 의미하며, 순수한 마음씨는 항상 넉넉하고 따사로운 보금자리와 같다.
보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친구 ~ 그가 내 곁에 있는 한 나는 언제나 행복할 것이다.
1996. 10. 30.
◐ 요즘 아이들에게 진짜 친구가 있을까. 아니 나에게 진짜 친구가 있을까? 정말 속내를 털어 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가 있을까?
전에 화상을 입고 롯데마트 약국에 가서 약사가 화상에 붙이는 거즈를 붙이는데 약사가 얼마나 외로운 사람인지 저절로 알아졌다.
"전도를 해라."
내 안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면 즉시 순종해서 전도를 했어야 한다. 그 음성을 듣고 바라보니 쓸쓸한 얼굴로 약국 한귀퉁이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즉시 순종을 못하고 다음에 하리라 생각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결론은 몇번 만나러 갔지만 만나지지 않았고 왜 그러느냐고 물어서 '전도' 하려고 그런다고 했더니 '돈이 충분히 많아서' 필요한게 없는 사람이라고 다른 약사 한분은 목사 사모라고 말했다. 즉시 순종하지 못한 결과였다. 돈이 충분하면 충분히 행복한 걸까?
요즘 고등학교 동기였던 경익이가 생각난다. 영숙이를 전도했던 1학년 때 같은 반 아이다. 경익이 때문에 교회를 가게 됐고 멀고 먼 길을 지나 지금의 영숙이가 되게 하였다. 어떤 사람을 만나는냐에 따라,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정말 달라진다.
요즘 경익이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정말 궁금하다. 어떻게 연락할 수 있을까? 고등학교 때 경익이네 주소로 편지나 보내봐야겠다. 예수님을 만나게 해준 경익이에게 정말 감사한 마음이다. 진짜 친구 예수님을 소개해준 경익이.
진짜 친구 ~ 오직 예수님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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