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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관련/경제관련

워렌 버핏의 여인들.

by 영숙이 2021.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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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런 버핏의 여인들>

                                        출처 : 인터넷 조선일보(2008.9/25)

 가치투자의 정도를 걸으며 세계 최대의 부(620억달러·2008년 미 경제지 포브스 선정 1위)를 일군 워런 버핏(Buffet·78)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이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 여인들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29일 미국에서 발매되는 전기(傳記)

 

 ‘스노볼(snowball): 워런 버핏과 인생경영’

 

 을 통해

 

 “공허한 삶을 채워주고 돌봐준 것은 여성들이었다”

 

 며 감정적으로 유약하고 대인관계에 서툴렀던 자신을 오늘날

 

 ‘투자의 귀재’

 

 로 키워준 여성들을 소개했다고 시사주간지 타임이 23일 보도했다.

 

 

 

버핏은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첫 아내 수전을 꼽았다.

 

 1952년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22살 청년 버핏과 결혼한 수전은

 버핏이 빌린 돈으로 섬유회사 버크셔 해서웨이를 사들여 투자자로 기반을 잡을 때까지 세 아이를 키우며 대인기피 성향이 있던 버핏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아준 든든한 원군이었다.

 

 수전은 버핏이 돈을 웬만큼 벌면 가정에 충실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투자에 대한 버핏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고, 실망한 수전은 1977년 샌프란시스코의 친구 집으로 떠나버렸다.

 

 25년간 자신을 응원해준 아내가 떠나자 버핏은 한동안 멍한 채로 집안을 돌아다니며 식사와 옷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수전이 별거 27년 만인 2004년 암으로 숨지자 버핏은 극심한 슬픔 탓에 장례식장에도 가지 못할 정도였다.

 

 2년 후 버핏은 애스트리드 멩크스( Menks)란 식당 여주인과 재혼했다.

 수전이 떠난 뒤 버핏을 헌신적으로 돌봐온 멩크스는 사실 수전 본인이 적적해할 남편을 위해 보낸 사람이었다.

 

 집 밖에서 만난 여성들은 은둔형 투자자였던 버핏을 더 넓은 세상으로 이끌었다.

 

 버핏의 유일한 낙은 브리지(카드 게임의 일종).

 브리지 세계 챔피언 출신인 섀런 오스버그(Osberg)는 버핏을 설득해 컴퓨터를 사용하게 만들었다.

 버핏의 절친한 친구 빌 게이츠(Gates) 전 마이크로소프트 회장도 못한 일이다.

 

 버핏은 또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투자회사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주들에게 매년 편지 형식으로 보내온 연례 보고서로 유명하다.

 이 편지 쓰는 걸 도와준 이는 미 경제지 포천지 편집장을 지낸 캐럴 루미스

(Loomis)다.

 

 버핏은 소심한 성격 탓에 인간관계의 폭이 넓지 못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보다는 (여성 컨트리 가수) 돌리 파튼과 얘기하는 게 편하다”

 

 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를 상류사회의 장으로 안내한 것은 워싱턴포스트 발행인이던 고(故) 캐서린 그레이엄(Graham)이었다.

 그 대가로 버핏은 워싱턴포스트의 주요 투자자가 됐고, 그레이엄에겐

 

 ‘경영 가정교사’

 

 가 돼줬다

 

 

워렌 버핏은 여자에게 미국의 미래를 건다

 

 세계 최고의 투자가 워렌 버핏이 어제 처음 트위터를 개설하고 두번 째로 올린 글은

 “여자가 미국이 번영할 수 있는 열쇠"

 

 라는 자신이 쓴 에세이를 읽으라는 내용입니다.

 버핏이 추천한 자신의 에세이는 경제잡지 포춘에 실렸습니다.

 

 자신의 경험과 시각으로 미국인구 반인 여성의 잠재력을 인정하고 키울 때 미국의 번영이 보장된다고 주장한 에세이입니다.

 

 Berkshire Hathaway (BRKA, Fortune 500) 회장이면서 CEO인 버핏은 워싱턴 포스트의 전 발행인으로 자신의 애인이기도 했던 캐서린 그래함 전 워싱턴 포스트 발행인의 변신과 자신의 누나, 여동생과 자신을 비유하면서 쓴 글입니다.

 버핏은 최근

 

 ‘여자와 일’

 

 에 대한 말들이 홍수처럼 밀리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지적되지 않는다면서,

 

 ‘여자가 미국의 미래’

 

 는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낙관주의자는 아니지만 미국이 번영할 수 있는 이유는 여자가 있기 때문으로 본다고 확신합니다.

 

 미국이 1776년 건국된 이후 지금의 위치에 오른 비밀소스는 정치나 경제, 사회 시스템에서 인간의 잠재력이 제대로 발휘됐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발휘된 잠재력은 반쪽이었고 다른 반쪽인 여자는 늘 옆에 비켜 서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독립선언서를 만든 39명도 모두 남자였다고 상기시킵니다.

 

 독립선언서가 작성되고 133년 뒤인 1920년 여자에 대한 차별을 없앤다는 뜻으로 수정헌법 19조에 근거해 여자에게 투표권을 줬지만, 그 후 샌드라 데이 오코너 미국 최초의 여자 연방대법관이 탄생하기 전까지 61년 동안 연방 대법관 33명은 모두 남자였다고도 지적합니다.

 

 사람들은 늘 적당한 여자후보가 없다고 말했다고 전하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연방하원의원으로 선출됐던 1942년 당시 아버지의 동료의원 434명 가운데 여자동료는 8명이었고 연방 상원에서는 100명 의원 가운데 메인주의 마가렛 체이스 스미스가 유일한 여성의원이었다고 기억하게 했습니다.

 

 이해관계에 얽히면 저항은 당연해서 비지니스와 정치, 당연히 종교에서도 여자를 막는 일이 이어졌는데, 최고자리를 바라보는 경쟁자가 2배가 되는 것을 어느 남자가 원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자신 가족의 스토리도 꺼냈습니다.

 

 자신은 시스터가 두 명(누나와 여동생) 있는데 부모와 선생님은 3명을 똑같이 사랑하고 똑같이 대우를 했지만, 서로의 운명은 달랐다고 말합니다.

 

 IQ는 비슷했지만 사회적 IQ는 누나나 여동생이 자신보다 높았다는 것을 믿으라면서, 성적은 비슷했지만 누나, 여동생과 자신은 세상에 나온 출발이 달랐다고 말합니다.

 

 여자들은 교육과 삶의 과정에서 결국

 

 ‘결혼 잘하는 것’

 

 에 초점을 맞춘 말들을 들었는데, 어머니 자궁에서 나올 때 boy였던 자신은

세상에 펼쳐진 기회와 정복에 대한 말을 들으면서 자랐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여성들에게는 사회에서 큰 활동을 하는데 장애가 있는데 자신의 경험을 전하겠다면서 캐서린 그래함 워싱턴 포스트 전 사주를 말합니다.

 (이 에세이에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케서린 그래함은 워렌 버핏과는 비니지스 파트너이기도 했지만 애인이기도 해서 워렌 버핏은 아내와 캐서린 그래함에게 똑같이 비싼 보석을 선물하기도 했음)

 

 케서린 그래함을 처음 만난 해는 1973년이었는데 그래함은 지적이었지만 자신의 어머니와 남편 등으로부터 남자가 우월하고 특히 비지니스에서는 더욱 우월하다는 세뇌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세뇌라는 단어를 쓰고싶지 않지만 사실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런 캐서린 그래함이 남편이 숨지고 워싱턴 포스트를 누가 이끌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을 때 이해관계가 있는 남자들은 그래함이 뒤로 물러서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래함 여사는 속으로 강함이 있어 워싱턴 포스트의 발행인과 CEO로 일하게 됐다고 썼습니다.

 (워싱턴 포스트의 원래 사주는 캐서린 그래함의 아버지였으나 아버지는 사위인 캐서린의 남편에게 신문사를 맡겼음)

 

 버핏 자신은 그래함에게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놓은, 사람이 일그러져 보이는 거울(funhouse mirror)를 치우라고 했고, 남녀차이나 차별에 대해 어느정도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느끼면서도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래함은 숨겨졌던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변해갔다고 했습니다.

 캐서린 그래함이 워싱턴 포스트 보스로 있던 18년 동안 워싱턴 포스트 주식값은 4,000% 이상 오른 것도 강조했습니다.

 

 워렌 버핏은 여자들은 일그러진 거울을 보면서 위축된 동안 남자가 우월한 것도 아니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커튼을 들춰보면 남자도 수퍼맨이 아니라면서 남자들의 아내에게 물어보면 알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자신과 같은 남자들에게 고한다면서, 남자가 왜 여자에게 놓인 장벽을 무너뜨리는데 참여해야 하냐고 반문한다면,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남자의 이득이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답했습니다.

 

 남자 직원이 잠재력을 더 끌어올릴 수 있는데 80%만 발휘하는 걸 원하는 메니저나 CEO는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발 더 나가자고 말합니다.

 반쪽인 여자의 잠재력도 끌어내면 미국의 상품과 서비스는 더 좋아질 게 당연하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이 지금까지 50%의 인간능력을 활용해 이만큼을 이뤘다면 앞으로는 미국의 재능 있는 모든 사람, 100%의 능력을 활용하면서 자신과 함께 미국의 미래를 낙관하자고 했습니다.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은 한 번도 자기 손으로 자서전을 쓴 일이 없다.

 버핏은 대신

 

 “당신이 나보다 이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거요”

 

 라며 보험업계 애널리스트 출신인 앨리스 슈뢰더에게 자서전 집필을 부탁했다.

 지난 9월 29일 출간한 자서전에서 슈뢰더는 버핏의 협조를 받아

 

 ‘투자의 신’

 

 이라고까지 불리는 이 거인의 삶을 구석구석 들여다본 후, 그의 삶과 사랑을

 

 ‘스노볼: 워런 버핏과 삶의 경영’

 

 이라는 제목의 960쪽짜리 책에 담았다.

 

<여자 앞에서 늘 불안한 버핏>

 

 버핏은 얼핏 완벽한 인간처럼 보인다.

 그는 우리 돈으로 무려 64조 원이 넘는 재산을 소유한 세계 최고의 재력가다.   그러면서도 허세나 허영은 찾아볼 수 없다.

 전 재산의 85%를

 

 ‘빌 앤 멜린다 재단’

 

 에 기부하기로 했고, 부시 대통령의 상속세 폐지 움직임에도 반대했다.

 그는 세속적으로 성공했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의 대열에 올랐다.

 

 그러나 자서전에서 슈뢰더가 주목한 것은 그의 냉철한 투자자로서 면모가 아니라 끊임없이 여성의 애정과 정서적 보살핌을 원했던 섬약한 인간의 모습이다.

 버핏은 여자 앞에서 늘 불안해했다.

 청년 버핏의 대화 주제는 정치 아니면 주식이었다.

 여자들은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을 지루하게 느꼈고,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허둥댔고,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여자 앞에서는 뒤로 물러났다.

 버핏은 심각할 정도로 사교성이 부족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네기 재단이 운영하는 스피치 학원에 다닌 적도 있다.

 슈뢰더는 자서전에서 버핏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여성은 첫 아내 수잔과 두 번째 아내 아스트리드, 워싱턴 포스트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 포춘 기자 캐롤 루미스, 브리지 게임 선수 샤론 오스버그 등 다섯 명이라고 썼다.

 첫 아내 수잔 톰슨을 만난 것은 1950년 여름, 그의 나이 스물이 되던 해다.

 

 노스웨스턴 대학에 다니던 동생 베티가 룸메이트 수잔을 버핏에게 소개했다.

 

 버핏은 같은 고향 출신의 이 갈색 머리 여대생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러나 수잔은 버핏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수잔이 대놓고 지루하다고 불평하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수잔이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로 좋은 여자’

 

 라고 판단한 버핏은 나름대로 치밀한 전략을 세웠다.

 수잔에게 직접 다가가는 대신 오마하의 지역 유지였던 수잔의 부모에게 접근하기로 한 것이다.

 

 버핏은 이 해 추수감사절 휴가에 수잔의 부모와 함께 풋볼경기를 본 후 밥을 먹었다.

 밥 먹는 자리에는 수잔도 있었지만, 그녀는 애인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 무렵 버핏이 만나던 여자가 아주 없던 것은 아니다.

 버핏은 수잔을 만나기 전부터 1949년도 미스 네브라스카 바니타 브라운이라는 여성과 교제하고 있었다.

 바니타는

 

 “핀업걸의 몸매에 이웃집 소녀의 얼굴”

 

 을 가진 매력적인 여자였지만 정서적인 기복이 심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정서 불안으로 여성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던 버핏은 정신적으로 성숙한 수잔에게 더 마음이 끌렸다.

 오마하 대학 학장이자 열혈 공화당원으로 지역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수잔의 아버지 윌리엄 톰슨은 인종과 종교가 다른 사람들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전형적인 오마하 사람이었다.

 

 수잔은 고교 시절부터 유대계 러시아인 2세인 밀튼 브라운과 교제했지만, 윌리엄은 이 가난한 이민 노동자의 아들을 싫어했다.

 

 수잔과 브라운의 사랑은 장애물 앞에서 더욱 강하게 타올랐다.

 이런 내막을 전혀 몰랐던 버핏은 수잔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수잔에게 버핏은 주식에 미친 공화당 유력 의원의 아들에 불과했다.

 수잔의 아버지 윌리엄이 반전의 물꼬를 텄다.

 윌리엄은 수잔을 오마하로 불러들였고, 노스웨스턴의 비싼 등록금을 감당하지 못했던 브라운은 아이오와 대학으로 떠났다.

 

 1951년 봄학기를 마치고 군 복무를 위해 오마하로 돌아간 버핏은 틈날 때마다 수잔을 찾아갔다.

 수잔은 버핏이 자신만만한 특권층의 아들이 아니라 실제로는 소심하고 불안한 소년의 내면을 가진 남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열었다.

 버핏은

 

 ‘주식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단점을 찾을 수 없었던’

 

 수잔과 1952년 4월 19일에 결혼했다.

 버핏이 21살, 수잔은 19살이었다.

 결혼 생활은 평탄했다.

 수잔은 버핏이 자신에게 엄마 역할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버핏의 원초적인 애정 결핍을 치유하는 데 헌신했다.

 

 수잔이 정서적 버팀목 구실을 해주면서 버핏은 일에 몰두했다.

 1953년 첫아이 앨리스가 태어났지만, 가정은 버핏과 그의 업무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버핏은 서른다섯이 되던 1966년에 이미 부자였다.

 

 수잔은 이 무렵부터 버핏이 800만 달러를 벌면 좀 더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버핏에게 주식은 회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성스러운 숙명이었다.

 1977년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안고 있던 수잔이 샌프란시스코로 거처를 옮긴 후, 두 사람은 사실상 별거 상태에 들어갔다.

 

 이 무렵 버핏은 워싱턴 포스트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버핏보다 13살 연상인 그레이엄은 시시콜콜한 사생활까지 버핏에게 털어놓을 정도로 버핏을 신뢰했다.

 두 사람이 공공장소에서 함께 있는 모습이 종종 사람들의 눈에 띄었고,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하는 가십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별거 아내에 “돌아와 달라” 울먹여>

 

 버핏과 그레이엄이 처음 만난 것은 1971년의 어느 모임에서였다.

 그러나 잠깐 동안 스쳤을 뿐, 버핏은 그레이엄에게 아무런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레이엄이 처음으로 버핏을 주목하게 된 계기는 버핏이 1973년 워싱턴 포스트 주식의 약 5%를 매입하면서다.

 버핏과 그레이엄은 친밀한 사이를 유지했지만 우정의 선을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레이엄은 버핏에게 워싱턴 상류사회의 안내자 구실을 했고, 버핏은 그레이엄에게 사업상 조언자 역할을 했다.

 수잔은 샌프란시스코로 떠나면서 아스트리드 멘크스라는 여성에게 버핏을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세 아이가 모두 성장한 후 자신의 삶을 찾아 샌프란시스코로 떠나기는 했지만, 버핏이 여성의 보살핌 없이는 제 삶을 지탱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멘크스는 1946년 독일에서 라트비아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여섯 살에 오마하로 이주한 여성으로, 1976년 무렵 수잔이 공연했던 오마하의 한 카페에서 요리사 겸 소믈리에로 일하고 있었다.

 

 차가워 보이는 외모와 달리 동정심이 많았던 멘크스가 수잔의 거듭된 부탁에 버핏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는 거의 폐인 상태였다.

 수잔을 대신해 버핏을 돌보던 멘크스는 구강암으로 수잔이 사망한 2년 후인 2006년, 버핏의 두 번째 아내가 됐다.

 버핏은 투자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저널리스트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로 저널리즘에 관심이 많았다.

 1969년 버핏이 투자자 존 루미스를 만났을 때 그를 부부 동반 식사에 초대한 것도 존의 아내 캐롤이 포춘 기자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캐롤은 이후 버핏이 매년 투자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는 일을 도와준다.

 버핏이 컴퓨터를 쓰게 만든 것도 샤론 오스버그라는 여성이다.

 브리지 마니아였던 버핏은 1993년 국제 브리지 게임 토너먼트에서 브리지 게임 선수였던 오스버그를 만났다.

 오스버그는 버핏에게 인터넷으로 브리지 게임을 해보라고 권유해 버핏이 결국 집에 컴퓨터를 설치하게 만들었다.

 버핏은 아내 수잔이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뒤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날마다 아내에게 전화를 해 돌아와달라고 울먹였다.

 그는 이 일을 두고

 

 “내 평생 가장 큰 실수였다”

 

 고 회고했다.

 

 ‘오마하의 현인’

 

 도 사랑 앞에서는 현명하지 못했던 셈이다.


"내가 미쳤지. 결혼은 왜 했냐" 생각될 때 버핏의 3가지 조언

                                                                                              출처 : 머니투데이

 “내가 미쳤지. 결혼은 왜 했냐.”

  가끔 하는 혼잣말이다.

  가령 이런 때다.

  손님을 집에 초청해 식사를 할 때가 종종 있다.

  남편은 직장 다니느라 요리다운 요리를 거의 해본 적이 없는 내가 불안하다.

 

  “저녁 메뉴 뭐로 할 거야?”

  “간단하게 고기 구울까 하는데.”

  “너 고기 구울 줄 알아? 저번에 간단하게 국수 삶는다고 하더니 실패했잖아.”

 

  나는 울컥한다.

 

  “매번 2~3인분만 삶다 한꺼번에 10인분을 삶으려니 물 양을 조절 못한 거지. 그래서 고기 굽는다잖아.”

  “그러지 말고 간단하게 카레를 하지 그래. 번거롭게 고기 구우면서 연기 내지 말고.”

 

  이쯤 되면 인내심은 바닥난다.

 

  “그럼 니가 하든가.”

 부부로 십수년을 살아도 끊임없이 울컥하고 열 받고 다툴 일이 생긴다는 게 놀랍다.

 그러다 최근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세계적인 주식 투자자 워런 버핏과 그의 동업자 찰리 멍거는 40년간 함께 일하면서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동업하는 것보다 부부로 사는 게 더 힘든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옛날 어른들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심지어 형제끼리라도 동업은 절대 하지 말라고 조언한 것을 보면 부부생활만큼이나 동업도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버핏과 멍거는 각각 29살, 35살 때인 1959년에 처음 만나 친분을 쌓다 1978년부터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멍거가 파트너로 참여해 일하고 있던 법률회사 멍거, 톨스 & 올슨을 떠나 버핏의 투자회사 버크셔 해서웨이에 부회장으로 합류했다.

 현재 89세인 버핏은 지난해 2월 투자전문채널 CNBC와 인터뷰에서 멍거에 대해

 

“우리가 서로 알고 지낸 거의 60년 동안 단 한번의 다툼도 없었다”

 

 고 말했다.

 버핏과 멍거의 과거 CNBC 인터뷰를 토대로 일평생 갈등 없이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이 뭔지 정리했다.

 

<첫째, 서로 존중해야 한다>=

 

 버핏은

 

 “내가 얘기를 듣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찰리는 내게 장기간에 걸쳐 많은 조언을 해줬다”

 

 고 밝혔다. 또

 

 “때로 어느 정도는 그 조언을 받아 들이는 것이 싫었을 수도 있지만 (그 조언으로 인해) 내 결정은 더 나은 것이 됐고 나는 찰리 때문에 더 나은 인생을 살아왔다”

 

 고 말했다.
 버핏은 지금도 멍거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언제나 무엇인가를 배운다”

 

 고 고백한다.

 멍거 역시 2016년 CNBC와 인터뷰에서 그와 버핏이

 

 “모든 사안에 대해 전적으로 의견이 일치한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 존중했다”

 

 고 말했다.

 


 <상호 존중은 모든 좋은 관계의 초석이다.>

 

 세상에 나와 똑같은 생각과 취향을 가진 사람은 없다. 상호 존중은 나와 다른 상대방의 생각과 취향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이는 어떤 일에 대해 의견이 갈릴 때 상대방이 그런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데서 출발한다.

 

 

<둘째,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워야 한다>=

 

 

 버핏과 멍거는 만난 지 5분만에 저녁 식사를 하러 가서 서로 농담을 하며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고 한다.

 버핏은 두 사람의 첫 만남에 대해

 

 “우리는 서로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다”

 

 고 말했다.
 서로 존중한다고 해도 서로가 너무 달라 도무지 함께 있는 것이 즐겁지가 않고 의기투합이 되지 않는다면 결혼생활이든, 동업관계든 오래 유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많은 것을 공유하며 즐거울 수 있고 많은 부분에서 의견이 일치할 때 화목한 관계를 이어가기가 더 용이하다.
 버핏도 자신과 멍거에 대해

 

 “우리는 성격이 강한 사람들이고 몇몇 사안에 대해선 의견이 달랐다”

 

 고 하면서도

 

 “대부분의 일에 대해선 의견이 같았고 우리는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왔다”

 

 고 말했다.

 

 

<셋째, 해선 안 되는 일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을 공유해야 한다>=

 

 

 버핏은

 

 “찰리가 말하길 똑똑한 사람을 망하게 하는 세 가지가 있는데 술(Liquor)과 여자(Ladies), 부채(Leverage)라고 한다”

 

  며

 

“부채란 돈을 빌려 주식을 사는 것을 말한다”

 

 고 전했다.

 버핏은 술과 여자는 영어 알파벳 L로 시작하기 때문에 ‘3L’을 만들려 덧붙인 것이고 두 사람이 동업할 때 기본 원칙으로 삼은 것은 레버리지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고 소개했다.

 부부간에도 서로 지켜야 할 기본 원칙들에 대한 공유가 있어야 한다.

 누군가 이 원칙을 깨면 다른 사람은 크게 상처 받을 것이고 이 상처로 인해 관계마저 깨질 수 있다.

 

 결혼이든, 동업이든 시작하기 전에 서로 지켜줬으면 하는 기본 원칙들을 정해 놓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버핏은 60년간 멍거와 단 한 번도 다투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전혀 다툴 일이 없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설사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라도 인내했기 때문에 다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혼한 친구들과 얘기하다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인격 수양이란 점에 대해 크게 공감한 적이 있다.

 행복을 꿈꾸며 결혼하지만 결혼생활을 유지하게 하는 힘은 많은 인내라는 뜻이다.

 명절만 지나면 이혼하는 부부가 늘어난다고 한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남은 남이다.

 남의 마음이 내 마음 같지는 않고 남이 내 마음을 일일이 헤아려주지도 않는다.

 서운하고 울컥하고 꼴 보기 싫은 일이 생기더라도 잠시 잠깐이면 지나간다고 생각하자.

 

 지금 내뱉고 싶은 말 한 마디만 참으면 명절 연휴가 조금은 더 평온하게 지나갈 것이고 인내는 쓰지만 열매는 달다고 훗날 버핏과 멍거 같은 아름다운 관계가 선물처럼 남을 것이다.

 

 

  <대박 인생 50년 워런 버핏 그의 돈, 성공 그리고 세 여자.>    

                                                                                           출처: 인터넷 중앙일보

 "(소설가) 발자크는 엄청난 재산 뒤에는 언제나 범죄가 있기 마련이라고 말했죠. (내 투자회사)버크셔 해서웨이는 그렇지 않아요"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은 저자인 앨리스 슈뢰더에게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처음에는 애널리스트로 만났다가 우정을 나누는 사이였는데, 자기 자서전을 써달라면서 밝힌

 

 ‘돈의 철학’

 

 이 그랬다.

 덧붙인 말도 매력적이다.

 

 “나와 다른 사람의 말이 다를 때는 나쁜 쪽을 선택해주세요. 아첨이 덜한 쪽으로….”

 

 『스노볼』은 그 결과 탄생했는데, 포브스지 선정 세계 최고 부자의 삶과 함께 세계 최대의 스노볼(돈 눈덩이)을 굴린 성공투자의 노하우까지 들어볼 계기다.

 이 책은 한 억만장자의 그렇고 그런 스토리가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호경기에서 9·11사태, 금융위기에 이르는 미국 자본주의의 디테일을 훑어볼 역사 드라마다.

 

 2000쪽 가까운 무게가 좀 마음에 걸리지만, 좋은 전기의 요건을 갖춘 것만은 분명하다.

 

 대공항기 실업자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11살에 주식투자를 시작하고 신문배달로 돈을 배워간 소년기도 흥미롭지만, 눈길을 끄는 것은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어온 1부 2처제의 삶이다.
 세상이 알 듯 그는 공식적인 아내(수지)와 별도로

 

 ‘함께 사는 여자’(애스트리드)

 

 가 있다.

 여기에 애인(캐서린 그레이엄)도 따로 있다.

 이 책이 밝힌 세 여자 이야기는 이렇다.

 버핏은 25년을 살아온 아내와 별거하면서 끝내 그녀를 놓지 않았다.
 별거를 놓고 버핏은

 

 “95%가 내 잘못”(1권 878쪽)

 

 이라고 인정한다.

 어쨌거나 수지는 여자의 내조 없이는 일상이 엉망이 되는 남편을 위해 젊은 여자를 보내주는데 그게 애스트리드였고, 동거관계로 발전한다.

 요란한 스캔들의 대상이자, 수지와의 별거를 재촉했던 그레이엄은 거물, 즉 워싱턴 포스트 발행인이다.
 그레이엄을 두고 이 책은

 

 “말 잘하는 협잡꾼을 만나면 홀랑 넘어갈 여자”

 

 이자

 

 “속물근성 때문에 특히 거물에게 잘 넘어간다”(1권 724쪽)

 

 고 적어놓고 있다.

 이런 독설을 대범하게 넘긴 버핏이 대단해 보인다.

 하지만 이 책에서 눈여겨 볼 것은 뭐니뭐니해도

 

 ‘돈의 철학’

 

 이 아닐까? 그는 어떤 노하우로 50년

 

 ‘연속 대박’

 

 과 함께 정상에 올랐을까?

 답은 의외로 심플하다.

 ‘기본에 충실하라’

 

 가 그것이다.

 

 ‘빚을 내 투자하지 말라’

 ‘인내심을 갖고 꼼꼼히 분석하고 챙겨라’

 

 등의 제목이 거의 전부다.

 실제로 버핏은 그걸 실행했다.

 소문과 술수 등 암초가 도사린 비즈니스 세계에서 휘둘리지 않는 독립적 사고, 거의 모든 정보를 섭렵하는 집중력 등이

 

 ‘투자의 현인’

 

 이 가진 내공의 실체다. 2006년 빌 게이츠 재단에 360억 달러를 기부한 큰손다운데, 억만장자의 뒤에는 발자크의 추측처럼 범죄가 아닌, 존중할 만한 상식이 있었다.

 

 

[왜 지금 버핏인가]

 

아내 수전은 버핏의 가치를 제대로 높인 '운명의 투자' 였다

                                                                                               출처 : 아시아 경제

워런 버핏은 앨리스 슈뢰더가 쓴 전기

 '스노볼'

 

 에서

 

 "공허한 인생을 채워주고 돌봐준 것은 여성들이었다"

 

 고 고백한다.

 

 주식만 아는 외골수였고 집에서도 연차보고서에 파묻혀 사는 일벌레여서 다른 일에는 젬병에 가까웠던 버핏에게 그 빈자리를 채워준 것이 여성들이었다.

 

 세대와 배경을 막론하고 버핏과 우정을 나눈 여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였을까.   직ㆍ간접적으로 버핏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 여성들의 면면을 들여다봤다.
 

◆내조의 여왕 수전 버핏= 

 

 "수지는 나를 새로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녀의 사랑은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버핏에게 수전 버핏(수지ㆍ1932~2004)은 아내이자 어머니였다.

 

 버핏이 이발소에 가기 무섭다고 하자 이발까지 손수 해줬다.

 전구 하나 갈아 끼우지 못하는 버핏은 수전에게 돌봐줘야 하는 또 한 명의 '아이'였던 셈이다.

 

 두 사람은 1950년 여름에 처음 만났다.

 

 버핏의 여동생 로버타(버티)가 룸메이트였던 수전을 소개해준 것이다.

 버핏의 구애 끝에 두 사람은 1952년 4월 부부가 됐다.

 그러나 일벌레였던 버핏은 밤에도 무디스 매뉴얼에 파묻혀 지냈다.

 수전의 친구들은

 

 '버핏이 결혼을 수전이 아니라 버크셔 해서웨이랑 했다'

 

 고 할 정도였다.

 당연히 집안일은 물론이고 세 아이의 육아까지 온전히 수전의 몫이었다.
 수전은 버핏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썼다.

 수전은 집안일에 무관심한 버핏에게 수시로

 

 "누구나 아버지는 될 수 있지만 당신은 아빠도 돼야 한다"

 

 고 말했다.

 버핏이 돈에 집착하고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는 점은 친구들 사이에서 농담 소재로 흔히 쓰일 정도였다.

 

 "워런, 자네 아이들이 누군지 알고는 있지?"

 수전은 종교와 문화, 인종을 막론하고 인간관계를 맺었는데 자기 집을 찾는 사람을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였다.

 그중에는 전과자, 사기꾼, 마약중독자, 사창가 포주도 있었다.

 

 버핏의 어머니 레일라가 사회 맨 꼭대기층에 진입하려고 미국애국여성회와 위그노회에 가입한 것과는 딴판이었다.

 엘리트주의를 싫어했던 버핏에게 수전의 이런 모습은 매력적으로 비쳤다.

 수전은 다양한 친구들로 구성된 인맥 속으로 버핏을 데리고 들어갔다.

 젊은 시절 말투가 어눌하고 숫기가 없었던 버핏은

 

 "수지와 함께 있을 때 사람들은 내가 가진 가치 이상으로 나를 인정했다"

 

 고 말한다.

 수전의 인생을 달라지게 한 건 버핏의 관심이 아닌

 

 '노래'

 

 였다.

 1974년 7월 가수로 데뷔한 수전은 이후 오마하 집을 떠났다.

 하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버핏의 아내로 그 옆자리에 함께 나왔다.

 수전은 생전 버핏 재단의 이사장이었고 버크셔 해서웨이의 이사이기도 했다.
 2003년 구강암 3기 진단을 받았을 때 수전은 담담하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나는 정말 멋진 인생을 살았어요. 아이들도 이젠 다 컸고 손자들까지 봤잖아요. 나는 내 인생을 사랑해요. 이제 내가 할 일도 다 했고 정말 더는 여한이 없어요."

 

 오히려 버핏이 어미 잃은 새처럼 어쩔 줄 몰라했다.

 버핏은 수전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울었다.

 아내의 부재를 상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버핏에게 돈 말고 더 중요한 가치가 있음을 몸소 보여준 수전은 사후에도 버핏에게 깨달음을 줬다.

 수전은 약 30억달러에 달하던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식 대부분을 자신의 재단에 맡기고 일부는 세 자녀의 이름으로 된 재단에 남겼다.

 수전의 장례식 때 U2의 보노는 추모곡으로

 

 '때론 당신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어(Sometimes You Can't Make It on Your Own)'

 

 를 불렀다.

 

 수전은 버핏에게

 '혼자' 보다는 '함께' 가 '독식' 보다는 '나눔'이 더 가치있음을 전파한 사람이었다.

 

<◆버핏을 상류 사회로 이끈 캐서린 그레이엄>=

 

 "워런? 과외 시작할까요?"

 

 버핏과 캐서린 그레이엄 전 워싱턴포스트(WP) 회장(1917~2001)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관계였다.

 그레이엄은 버핏이 워싱턴 상류사회에 진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사람이었다.

 반면 버핏은 그레이엄에게 회계 등을 가르쳐주는 과외 선생님이었다.

 두 사람은 1970년대 초반 처음 만났다.

 

 1963년 남편과 사별한 그레이엄은 얼떨결에 WP 발행인으로 신문사 경영을 떠안게 됐다.

 1973년부터 1991년까지 WP 회장을 역임한 그녀는 남성들이 주름잡던 언론계에서 권력에 굴하지 않았던 여성언론인이었다.

 그의 재임기간 중 터트린

 

 '워터게이트 특종'

 

 은 지역지였던 WP를 일약 세계가 주목하는 신문사로 위상을 끌어올렸다.

 그레이엄은 온갖 정치적 외압에도 불구하고 보도를 밀어붙였고 기자들이 기사로 인해 부당한 압력이나 신변의 위협을 받지 않도록 보호했다.

 외압에 굴하지 않고 편집 방향을 지켜낸 그는 훗날

 

 "국민의 알 권리와 국익보호 사이에서 신문이 선택할 길은 국민이었다"

 

 고 회고했다.
 그레이엄에게 버핏의 첫인상은 그동안 만났던 인사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만났던 월스트리트 사람이나 기업계 인사들과는 전혀 달랐다. 옥수수만 먹고 자란 중서부 지역 사람 같았다."

 "하지만 처음 만난 뒤로 지금까지 나를 강렬하게 끌어당긴 덕성이 그에게 있었다."

 "두뇌와 유머였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나는 그 사람을 좋아했다."

 

 두사람은 처음에 주주와 최고경영자로 만났지만 그 이상의 우정을 나눴다. 후에 버핏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레이엄은

 

 "워런이 그러던데…"

 

 는 말을 달고 다녔다.
 그레이엄은 버핏에게 상류층 인사와 교류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했다.

 그레이엄의 인맥은 전 방위였다.

 전직 미국 대통령부터 외국의 지도자, 행정부의 고위직 인사, 민주당과 공화당의 거물급 의원 등 면면이 화려했다.

 버핏 역시 자신의 모임에 그레이엄을 초청하기도 했다.

 친분이 깊어지면서 버핏은 WP의 이사회에 참석할 때면 아예 그레이엄의 집에 머물렀다.

 이 즈음 쉰아홉 살의 그레이엄이 마흔 여섯의 버핏에게 자기 집 열쇠를 건네주는 장면이 자선행사에서 포착됐다.

 

 1977년 초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가십기사가 나왔다.

 그레이엄의 반응은

 

 "눈썹이 벌떡 일어선다"

 

 였다.

 그뿐이었다.

 가십기사는 두 사람의 우정에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버핏이 WP에 이사로 이름을 올린 것도 그녀와의 우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버핏과 세대를 넘어 우정을 나눈 그레이엄은 2001년 작고했다.

 버핏은 1974년 이사를 맡은 후 중간 8년 공백을 빼고는 줄곧 WP 이사를 맡아오다 2011년 이사직에서 물러났다.

 

<◆아내 수전의 빈자리를 채워준 애스트리드>= 

 

 아내 수전과 애스트리드 맹크스, 버핏 사이는 삼각관계였다.

 수전은 버핏의

 

 '공식적인 아내'

 

 였고 애스트리드는 오마하 집에서 버핏과 함께 살며 수전 대신 버핏의 일상이 잘 굴러가도록 도왔다.
 버핏은 자신과 두 여인의 관계에 대해

 

 "수지는 나를 제대로 된 사람이 되도록 만들었고 애스트리드는 나를 제대로 된 사람으로 유지시켜 준다"

 

 며

 

 "두 사람 다 베풀고 주고 싶은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나는 이런 베풂을 무조건 받는 사람"

 

 이라고 말한 바 있다.
 버핏은 수전이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이후 1978년부터 애스트리드와 함께 살았다.

 

 수전이 떠난 후 일상이 엉킨 버핏을 보다 못한 수전이 당시 애스트리드에게 수도 없이 전화를 걸어와 버핏을 돌봐달라고 애원했기 때문이다.

 애스트리드는 수전이 노래를 불렀던 프렌치 카페에서 일했었다.

 수전은 이곳에서 애스트리드와 이야기를 나누며 친분을 쌓았다.

 

 수전의 부탁에 못 이겨 음식을 만들어 주는 등 뒷바라지를 하던 애스트리드는 숫자를 다루는 일 이외엔 모든 것이 서툰 버핏이 가엾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애스트리드에게 안방을 내준 수전은 그녀와 으르렁대기는커녕 가족처럼 지냈다.

 애스트리드는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수지를 만나기도 했다.

 

 다만 두 사람 사이에는 암묵적인 조약이 형성돼 있었는데 애스트리드가 버핏의 아내라는 공식적인 역할을 주장하고 나서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버핏의 지인과 자녀들은 세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고 이해했다.

 

 버핏의 절친인 빌 게이츠는 1993년 비행기를 오마하로 몰고 가서 두 사람에게 약혼 반지를 선물하는 깜짝 파티를 열기도 했다.

 버핏은 수전이 죽은 이후에야 애스트리드와 재혼했다.

 수전이 사망하고 2년 뒤인 2006년 본인의 생일인 8월30일에 버핏은 큰딸 수전 주니어의 집에서 애스트리드와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버핏이 닮고 싶다던 'B여사'>= 

 

 로즈 블럼킨(1893~1998)은 버핏이 최초로 선택한 여성 경영인이다.

 1983년 버핏은 버크셔 해셔웨이를 통해 블럼킨 여사의 네브래스카 퍼니처 마트를 인수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아흔 살.

 러시아 출신 이민자로 고난을 극복하고 북아메리카 최대 가구점을 이끌었던 블럼킨은 경영자적인 자질과 수완이 좋았던 인물이었다.

 억척 같던 경영방식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B여사'

 

 라고 불렀다.

 특히 그녀의 현장 장악력은 최고의 장점으로 뽑힌다.

 그녀는 아흔이 넘는 나이에도 노구를 이끌고 매일 매장에 나와 일했고 경쟁사의 주차장과 매장을 확인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91세 때 그녀는 한 기자에게

 

 "나는 먹고 자기 위해 집에 간다. 날이 밝아 매장에 나갈 수 있는 시간을 나는 학수고대한다"

 

 고 말했을 정도다.

 자신이 관심 있는 회사라면 그 회사 경영자나 직원을 직접 만나기 위해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간 버핏 역시 무엇이든 직접 발로 뛰어 확인하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면모를 가진 버핏이 로즈에게 호감을 가졌던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 그녀의 고객가치 중심 경영은 버핏을 매료시켰다.

 블럼킨은 평소

 

 "어느 기업이든 필요한 것은 좋은 경영자이다. 자신의 일에 마음을 온전히 바치는 사람 말이다"

 

 고 말하기도 했는데 버핏은

 

 "고객을 최우선으로 둔다는 식의 모든 것들은 내가 알기로 그녀가 원조"

 

 라고 치켜세웠다.
 100세가 된 블럼킨은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요약했다.

 

 "나는 75년 전 러시아에서 와서 회사를 차렸고 거짓말한 적이 없고 속인 적 없으며 거만하게 군 적도 없다."

 

 버핏 역시 손해를 볼지언정

 

 '정직'

 

 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긴다.
 그녀는 103세까지 현업에서 일했는데 버핏은

 

  "블럼킨을 닮고 싶다"

 

 는 말을 자주했다.

 경영자로서 블럼킨은 버핏의

 

  '롤모델'

 

  이였던 셈이다.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쳐 일군 그녀의 성공에 대해 버핏은

 

  "만일 2년 동안 어느 경영대학원에 다니는 것과 몇 달 동안 그녀 밑에서 실습하면서 사업경영을 배우는 것 가운데 하나를 택한다면

 

 "그녀가 처리하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배울 필요가 없다"

 

 고 말했다.

 

😁 모든 위대한 이들 옆에는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다.

 워렌 버핏 옆에는 3명의 여인들이 워렌 버핏이 잘 해낼 수 없었던 일들을 조력해 주었다.

 보통 돈이 많았던 사람들 중에는 말년이 좋지 않았다던지 행복하지 않았던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돈이 많다고 반드시 행복한 건 아니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시를 들고는 하였다.

 생각해보면 정신이 온전치 않은 경우는 돈이 많아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돈하고는 상관없이 정신적으로 아프기도 하고, 더 많은 경우에는 돈이 많아서 생기는 경우보다 돈이 없어서 생기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개인적인 상황에 따라 다른 것 같다.

 확실한 것 하나는 경제적 여유가 많은 사람들이 좋은 생각을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빌게이츠와 워렌버핏은 세계적인 부자이면서 좋은 일도 세계적으로 많이 했다는 것.

 그중 워렌버핏은 부자이면서 여자 복도 있고 사람 복(인복)도 있고 건강과 장수를 누리는 부러운 사람이다.

 90인데도 현직에서 아직도 활동하는 사람이다.

 

 록펠러는 미국 전역에 5000개의 교회를 세우고 90세까지 장수한 부자다. 록펠러를 따라 갈 사람이 없었는데 워렌버핏이 그를 이어 미국인으로 세계적인 부자이면서 자선단체에 기부를 많이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도록 이끌어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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