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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탐구

천재 과학자 였던 여배우

by 영숙이 2021.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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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파이 쓸 때면 그녀를 기억하세요...'헤디 라마르' 탄생 101주년 - 여성신문

 

       
 
<천재 과학자 였던 여배우>   

                                                        출처 : 씨네 21 (2018-06-06)

 <밤쉘>의 헤디 라마, 천재 과학자와 아름다운 배우 사이    
 
                                         평가절하된 여성 과학자
 
 
 
 

 와이파이와 블루투스의 기초가 되는 아이디어를 처음 고안한 과학자.

 이 정도 업적이라면 교과서에서 중요하게 다뤄질 법도 하지만 역사는 이 발명가에게 주목하지 않았다.

 대신 백설공주와 캣우먼에 영감을 준 미모의 할리우드 여배우로 그를 기억했다.

 

<밤쉘>은

 

 “나는 원래 외모가 아닌 두뇌에 관심이 많다”

 

 며 1990년 당시 <포브스> 기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헤디 라마의 육성 인터뷰를 토대로 그의 인생을 되짚는 다큐멘터리다.

 

 영화를 보고 나면 더 궁금해지는 그의 삶을 정리했다.

 

편견의 시작

 1914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헤디 라마는 어렸을 때부터 발레와 피아노, 다양한 언어를 배웠지만 학교 공부에 큰 뜻을 두지는 않았다.

 

 대신 영화와 영화배우에 관심을 보이며 관련 잡지를 모으고, 연기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사에 직접 찾아가 자신을 캐스팅해 달라고 설득하던 당찬 소녀였다.

 

 연기를 좀더 제대로 배우기 위해 독일 베를린으로 건너간 후 찍게 된 <엑스터시>(1933)는 그에게 유명세와 이혼의 불씨, 그리고 오랜 편견을 함께 안겨준 작품이 됐다.

 

 원래 합의가 되어 있지 않았던 노출 장면을 감독의 협박으로 찍게 되면서, 그는 영화에서 알몸으로 수영을 하고 춤을 춰야만 했다.

 

 또한 교묘한 편집으로 완성된 오르가슴 연기는 그에게 항상

 

 ‘영화 사상 최초로 알몸 오르가슴 연기를 한 배우’

 

 라는 자극적인 수식이 따라다니게 만들었다.

 

 <엑스터시>를 촬영한 해, 헤디 라마는 14살 연상의 군수업체 대표 프리츠 만틀과 결혼했는데, 그는 자신의 부인이 배우로 유명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엑스터시>의 필름과 포스터를 계속 사들여서 없애려 했고, 급기야 전화 통화 내용을 엿듣는 하인까지 고용한다.

 

 남편이 나치 동조자가 되고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결국 헤디 라마는 집을 뛰쳐나온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MGM과 계약하며 미국에서 제2의 삶을 시작한다.

 

 이곳에서 만난 영화 제작자 루이스 B. 메이어는 라마의 스타성을 감지했고, 헤트비히 에바 마리아 키슬러라는 본명 대신 헤디 라마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줬다.

 

 이후 그는 <알제>(1938), <화이트 카고>(1942), <삼손과 데릴라>(1949) 등 25편의 영화에서 클라크 게이블, 제임스 스튜어트 등과 호흡을 맞추며 MGM의 대표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amp;amp;lt;삼손과 데릴라&amp;amp;gt;
 첫 번째 결혼 생활로 헤디 라마가 유일하게 얻은 것은, 남편의 옆에서 듣게 된
 
‘원거리 조종 어뢰’
 
 에 관한 계획이었다.
 
 탄도가 맞지 않아 어뢰가 목표물에 도달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거리 조종 기술을 쓸 수 있는데, 무선전신기를 이용해 신호를 보내면 적들이 어뢰의 진로를 미리 파악할 수 있다는 한계에 부닥쳤다.
 
 프리츠 만틀은 원거리 조종에 관한 어떤 어뢰도 만들지 못했지만, 헤디 라마는 남편의 계획에서 영감을 얻어 나중에
 
 ‘주파수 도약’
 
 으로 알려진 아이디어를 고안해냈다.

휴대폰과 무선인터넷의 토대

 어뢰 공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던 1940년대, 헤디 라마는 미국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무선으로 어뢰를 조종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리게 된다.

 

 하나의 주파수로 신호를 전달하면 적이 그 주파수를 찾아내 교란할 위험이 있겠지만, 주파수를 여러 개로 분산시키면 적군이 이를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뢰의 명중률은 100%가 된다.

 

 할리우드 파티에 종종 참석했던 헤디 라마는 영화음악을 만들기도 하는 작곡가 조지 앤타일과 친구가 되는데, 그는 헤디 라마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할 수 있게 도와주는 파트너가 됐다.

 

 조지 앤타일은 두루마리를 이용해 작동하는 자동 피아노를 만든 바가 있었는데, 같은 방식으로 무선주파수간에 빠른 도약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이 아이디어를 1940년 국립발명가협회로 보냈고, 이는 2,292,387이라는 이름과 397,412,006이라는 시리즈 번호로 1941년 미 연방 특허청에 출원되어 1942년 정식 특허로 등록됐다.

 

 당시 재혼을 하면서

 

 ‘헤디 키슬러-마키’

 

 라는 이름으로 특허가 올라가고, 전쟁 중

 

 ‘비밀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의 적용 여부는 비밀리에 시험됐기 때문에 라마의 발명은 화제가 되지 못했다.

 

 미 군대는 이 장치를 어뢰에 장착하기에는 통신 장치가 너무 크다고 판단해 활용하지 않았지만, 1957년 펜실베이니아 전자공학 시스템국의 기술자들은 이를 응용해 보안 시스템에 활용했다.

 

 또한 이는 주파수 도약이 미사일 기술의 기본 개념이 되던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 당시에 다시 응용됐다.

 

 또한 헤디 라마의 도청 금지 아이디어를 이용한 전화기로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이 통화를 했는데, 이는 세계 최초의 디지털 전화접속이었다.

 

 이로부터 데이터 전송과 움직이는 무선전기 연결망, 더 나아가 인공위성, 휴대폰, 무선인터넷이 탄생할 수 있었다.

스캔들, 그리고 뒤늦은 발견

 할리우드는 그가 과학자로서 성장하기보다는 여배우의 아름다운 이미지로 남기를 원했다.

 

 이 때문에 헤디 라마의 과학적 성과는 1965년 출간된 그의 의도가 반영되지 않은 전기 <엑스터시와 나>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연예계는 여섯번의 결혼과 여섯번의 이혼을 한 그를 점차 자극적인 가십의 주인공으로 소비했다.

 

 물건을 상습적으로 훔치는 도벽이 있다든지 5만달러 상당의 보석을 도난당했다던 그의 집에서 보석이 발견된다든지 하는 구설이 오르내렸다.

 

 또한 그는 영화와 광고를 직접 만드느라 약 3천만달러의 거액을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헤디 라마의 업적은 뒤늦게 세간에 알려지게 됐다.

 그의 발명을 뒤늦게 알아본 사람들이 이에 대한 글을 온라인에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힘입어 1997년 헤디 라마와 조지 앤타일은 전자프런티어재단의 개척자상과 벌비 그나스 성공정신상을 수상했다.

 

 헤디 라마가 세상을 떠난 2001년으로부터 4년 후, 독일은 그의 생일인 11월 9일을 공식적으로

 

 ‘발명가의 날’

 

 로 선포하기도 했다.

 

 에디슨처럼 잘 알려진 발명가들뿐만 아니라 헤디 라마처럼 역사가 제대로 평가해주지 못했던 이들을 함께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밤쉘> 헤디 라마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

 
 

 “어떤 젊은 여성도 매혹적으로 보일 수 있다. 가만히 서서 바보처럼 보이기만 하면 된다.”(헤디 라마)

 헤디 라마는 아름다웠고, 대중은 그녀가 아름다운 바보이길 바랐다.

 

 하지만 헤디 라마는 바보처럼 보이길 원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백설공주의 모델이자 캣우먼 탄생에 영감을 준

 

 “세계 최고의 미인”

 

 헤디 라마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배우인 동시에 위대한 발명가였다.

 

 어린 시절부터 뮤직박스를 분해하고 조립하길 즐겼으며 발명이 취미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 함대의 어뢰가 계속해서 목표물에 닿기도 전에 폭파당하자,

 

 ‘무선으로 조종되는 어뢰가 있으면 좋을 텐데’

 

 라는 생각을 발전시켜

 

 ‘주파수 도약’

 

 이라는 보안 무선 통신 개념을 발명한다.

 

 이는 지금의 와이파이, 블루투스, GPS, 첨단군사기술에 사용되는 핵심 기술이다.

 

 하지만 헤디 라마는 발명가로 대접받지 못했다.

 

 MGM의 설립자 루이 B. 메이어 역시 그녀를 스튜디오의 소유물쯤으로 여겼다.

 

 부당함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스튜디오를 나가 1946년 직접 영화를 제작한다.

 

 헤디 라마의 딸은 그런 어머니에 대해

 

 “페미니스트로서 시대를 앞서갔다”

 

 고 평한다.

 

 제작한 영화의 성적은 좋지 못했지만 이후 출연한 세실 B. 데밀의 <삼손과 데릴라>(1949)는 헤디 라마 최고의 흥행작이 된다.

 

 그러는 동안에도 결혼과 이혼을 반복한다.

 

 총 6번의 결혼생활은 해피엔딩으로 끝난 적이 없다.

 

 말년엔 은둔자로 살았다.

 

 <밤쉘>은 헤디 라마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 질문하는 다큐멘터리다.

 

 나이가 들어 성형에 집착하면서도 성형외과 의사들에게 최대한 흉터가 작게 생기는 수술 아이디어를 제공해 성형의 기술마저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일화는 상징적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질문하는 여성이었다.

 

 배우 수잔 서랜던이 제작했고, 다이앤 크루거가 헤디 라마의 목소리 재연으로 참여했다. 

 
 

 위기의 DC 유니버스를 구원한

 ‘원더 우먼’

 갤 가돗이 배우이자 과학자인 헤디 라마를 다룬 TV 미니시리즈에 출연한다고 지난 2일(현지시각) <데드라인>이 보도했다.

 2019 TV 비평가협회 언론 투어에서 미국 케이블 채널 쇼타임의 자야 위노그라드 대표는

 “헤디 라마의 일생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그는 오늘날 여성과 사회에 도전하는 많은 쟁점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헤디 라마라는 깊고 복잡한 인물을 묘사할 탁월한 능력을 갤 가돗에게서 발견했다”

 고 전하며 갤 가돗의 출연을 공식화했다.

야론 베르사노(좌), 갤 가돗(우) (사진 갤 가돗 인스타그램).
 

 이번 TV 시리즈는 갤 가돗의 남편이자 사업가인 야론 베르사노가 투자 및 제작자로 나섰고, 드라마 <디 어페어>의 각본을 쓴 사라 트림과 <더 핸드메이드 테일>, <파고>를 제작한 워렌 리틀필드, <더 라스트 타이쿤>의 각본가인 케이트 로빈스가 참여한다.

 
 

 갤 가돗이 연기하는 헤디 라마는 1940년대 할리우드를 주름잡은 최고의 배우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으로 불리며 주디 갈란드, 라나 터너, 스펜서 트레이시, 클라크 게이블 등과 함께 여러 편의 작품을 함께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반면, 배우로서의 명성에 비해 천재 과학자로서의 삶은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여성 배우가 개발한 기술에 대해 신뢰를 보내지 않았던 당시의 사회적 편견이 큰 이유로 작용했다.

 

 무선 주파수 도약이라는 개념을 개발해 현대 통신 기술의 근간인 와이파이, 블루투스 등의 기술적 토대를 마련한 공로는 최근에야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헤디 라마르>

                                      출처 : 나무위키

 개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여배우이자 발명가. 30여년 동안 배우로 활약하며 3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액되기도 하였다. 대중에게는 섹스 심벌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발명가로서 기술발전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생애

헤드비히는 1914년 세계 1차대전이 시작된 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은행가였던 아버지 에밀 키슬러와 부다페스트 출신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거트루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부유한 유대인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발레나 피아노를 배우는 등 전형적인 당대 부유층 영애답게 성장하였으나, 이 때부터 틈만 나면 시계를 분해한 후 다시 조립하는 등 과학과 공학에 대한 소질을 보이기 시작한다.

영화인으로서의 헤디

백설공주의 실제 모델, 쇼 비즈니스가 만든 가장 화려한 스타, 영화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스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헤디 라마르의 활동 기간 그에게 붙여진 수식어들

헤디 라마르는 1933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화 엑스타시에 출연하게 된다. 당시의 보수적인 풍조를 비웃기라도 하듯 펼친 최초의 오르가즘 연기와 전라로 숲 속을 달리는 장면은 영화계에 큰 쇼크를 주었다. 헤디 라마르는 이 작품에서 단순히 순종적이고 얼굴만 예쁜 배우에 머무르지 않고 관능적인 섹슈얼리즘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였으나, 이 영화는 남편이었던 만들에 의해서 가위질을 당하게 된다.

이후 반유대주의와 나치를 옹호하는 만들로부터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헤디는 《알지에》로 명성을 얻었으며, 당시 헐리우드에선 헤디 라마르를 능가하는 미모의 여배우가 없다고 할 정도로 높은 주가를 자랑하게 된다. 라마르는 이국적이고 정서가 불안정한, '배신을 잘 할 것 같은' 매혹적인 여인 역할을 주로 맡았고 이는 헐리우드에서는 고혹적인 외국 미녀가 아닌 '가장 미국적인 여자'를 선택한다는 고정적인 클리셰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후 《I Take This Woman》와 《토티야 플랫》에선 연기파로서의 성장도 이룬다.

이 시기에 헤디 라마르는 파블로 피카소, 찰리 채플린, 클라크 게이블, 존 F 케네디 등의 거물급 인사들과 교류하며 1940년대의 영화계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한편으론 그 스스로가 감독이 되고 싶어하기도 했다.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남편으로부터 벗어나, 적극적으로 생애를 꾸린 인물다운 시도였다.

그러나 영화인으로서의 명성은 그가 발명가로서 이룬 업적과 성과를 감추고 드러내지 못하도록 종용했다. 1940년대의 헐리우드는 배우들에게 성 고정적인 이미지만를 강요했고, 오직 헤디의 관능적인 미모만을 부각시키며 그 이외의 것은 전혀 주목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헤디 라마르도 살아 생전 이런 사회적 시선에 불만을 토로했다.

 

발명인으로서의 헤디

세간에선 원래부터 시계를 분해 후 재조립하거나 화학을 탐구하는 등의 면모를 보였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이공계에 뛰어든 계기는 다소 엉뚱하다.

그녀의 첫 남편인 프리드리히 만들은 그녀보다 13살이나 많은 연상에 무기상으로 돈을 번 거부였다. 그는 헤디가 배우 생활을 하는 것을 매우 탐탁치 않게 여겨서, 필름을 불태우거나 외출을 금지하는 등 전형적인 독재적 방식으로 그녀를 괴롭혔다. 이에 더해 아예 헤디의 사회적 관심을 차단하려 무기상이나 과학자들과의 모임에 그녀를 참석하게 만들었는데, 때마침 공학에 관심이 많던 헤디는 그들 사이에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던 만들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파시즘 사상에 감화되어 이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헤디와 충돌했고, 그녀는 결국 하녀로 분장해 파리로 도주한 뒤 그와 이혼하게 된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이름을 "헤디 라마르"로 개명한 후 낮에는 배우의 길, 밤에는 발명가의 길이라는 이중생활을 시작한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헤디는 어린이를 포함한 피난민이 탑승한 영국 여객선이 독일 유보트의 어뢰를 맞고 침몰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후 연합군을 도울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헤디가 관심을 보인 것은 무선조종이 필요한 어뢰 개발 분야였고, 그는 이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무선조종에는 반드시 보안이 필요하다는 걸 인식하였다.

이에 그는 자신의 친구였던 작곡가 조지 앤틸(앤타일)과 함께 피아노의 공명 원리에서 착안하여 항공모함과 어뢰가 주파수를 바꿔가면서 통신을 주고받는 개념을 창안하였고, 이후 이것의 개발에도 성공하여 주파수 도약(일명 FHSS)이라는 명칭으로 1942년 미국에 특허를 신청하기에 이른다.

이후 헤디는 이 기술을 미국 해군에 기증했으나 군에서도 역시 효용성의 문제를 들어 반려하였다. 


                                             당시 헤디와 앤틸이 특허를 내기 위해 제출했던 신청서


                                    1945년 미국 군사전문지 《성조》에 실린 헤디 라마르의 발명 관련 보도

그렇게 이 기술은 묻혀갔으나, 이후 무선통신기술의 발전하면서 헤디가 이뤄낸 주파수 변조를 통한 송수신자간의 암호화 개념은 블루투스, CDMA, 와이파이에 통합되어 쓰이고 있다. 

이후 라마르는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과 헐리우드 명예의 전당에 동시에 이름이 올린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고 1997년 헤디와 앤틸은 FHSS의 사회 공헌력을 인정받아 미국전자개척재단으로부터 상을 수여받는다. 헤디 라마르는 시상 당시 "때가 왔군요"라는 짧은 소감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년엔 사용한 휴지를 버릴 수 있는 곽티슈 등 작은 발명을 지속적으로 연구하다가 2000년에 플로리다에서 생애를 마감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업적은 그녀의 사후인 2014년 발명가 명예의 전당(National Inventors Hall of Fame)에 헌액되었다.

그녀의 남편들

  • 프리드리히 만들(1933~1937): 유태계 무기상이었지만 오스트리아인으로서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세뇌되어 그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특유의 독선적인 성격으로 헤디의 배우생활을 방해하였으나 대신 과학자로서의 삶에는 도움을 주었다. 이후 파시즘을 혐오하고 연합군을 지지했던 헤디는 그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자신을 감시하던 하녀에게 수면제를 먹여 잠들게 만든 후, 하녀로 변장하여 프랑스로 도주하였다. 만들은 그녀를 추적하지만, 헤디는 영국을 거쳐 미국에 정착하여 이혼에 성공하게 된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쏟아냈다.
  • 진 마키(1939~1941): 미국의 극작가 겸 제작가. 헤디가 미국으로 망명한 후 두 번째로 결혼한 남편. 특허를 낼 때도 그녀는 자신의 이름를 '헤디 키슬러 마키'로 등록했다. 그와 슬하에 제임스 라마르 마키라는 자녀를 두었다. 헤디는 이혼 소송에서 3년 간의 결혼 생활 중 실제로 같이 지낸 날짜는 불과 4일이었다고 진술했으며 판사는 이후 결혼할 시엔 장래 남편과 최소 3주 이상을 동거할 것이며 그 사실을 진 마키에게 통보할 것을 권고하였다.
  • 존 로더(1943~1947): 미국의 영화배우. 헤디와 사이에 안소니 로더와 데니스 로더라는 자녀를 두었으며, 제임스 마키 역시 양아들로 입적하여 제임스 라마르 로더로 이름을 바꾸었다. 안소니와 데니스는 그녀가 죽을 때까지 임종을 지켰으며 제임스는 유언장에 자신의 이름이 없다는 이유로 상속 분쟁을 일으켰다.
  • 어니스트 테드 슈타우퍼(1951~1952): 애칭 '테디' 슈타우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스위스의 악단 지휘자 겸 사업가로 나이트클럽과 식당을 운영했다.
  • 하워드 리(1953~1960): 텍사스의 석유재벌. 그녀와 가장 오래 결혼생활을 유지한 인물이다.
  • 루이스 J. 보이스(1963~1965): 미국의 변호사. 헤디보다 6살의 연하였으며 헤디의 이혼 소송을 담당하다가 그와 결혼하였다.

사건사고                    

헤디 라마르는 커리어가 사양길에 접어든 이후, 1965년에 상점에서 물건을 훔친 후 값을 치르지 않는 바람에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헤디는 이후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지만 이로 인해 크게 비난받았다. 앤디 워홀은 1년 후 이 사건을 소재로 《헤디》라는 이름의 영화를 만들고, 유명 여배우가 좀도둑질을 하면서 몰락하는 과정을 그리며 조롱하기까지 했다. 이 사건 직후 헤디 라마르는 영화계약이 무산되는 수모를 겪는다.

이후 헤디는 플로리다로 이주하여 은둔하나, 1991년 또 다시 절도 미수로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고소는 기각되었지만 과거의 사건과 더불어서 또 다시 이미지가 무너지는 고초를 겪었다.

96년 코렐의 커버디자인 콘테스트에서 그녀의 그림이 우승을했고 97년 커버표지로 사용된다 이후 그녀는 코렐에 소송을 제기하고 코렐사와의 비공개 합의를 했다.

2000년 그녀가 사망했을 당시 남긴 유산이 약 330만 달러였다. 이때 이미 의절한 양자의 유산 상속소송이 있었고 일부 승소하여 5만 달러의 재산을 상속했다.

여담

 
  • 구글은 2015년 헤디 라마르의 탄생 101주년을 맞이해 구글두들과 함께 헌정 형상을 발표하면서 NO HEDY LAMARR, NO GOOGLE(헤디 라마르가 없으면 구글도 없다)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코렐 드로우&amp;nbsp;패키지에 그려진 도안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 마치 미래에서 온 시간여행자같은 느낌이다.

 1914년에 태어 났으니까 그때 우리나라는 어떤 상태였는지 모두들 아는대로 이다.

 

 1933년에 영화를 찍고 1945년에 와이파이와 블루투스, GPS를 발명한 여성이다.

 

 매일 매일 그 발명을 이용하는 현대를 사는 사람도 잘 모르는 개념의 발명품을 발명하다니 정말 대단하다. 

 

 특히 아름다운 여성으로서 사회에서의 편견을 뛰어 넘어 해냈다는 것이 더 멋있다.

 

 만약 연숙이가 1914년에 이땅에서 태어났다면 어떠한 세월을 살아냈을까?

 생각만 해도 ㅠㅠㅠ◑ 

 

은혜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 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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