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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탐구

유럽에서는 교과서 나올 정도로 유명한데 정작 우리가 잘 몰랐던 한국인

by 영숙이 2021.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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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는 교과서 나올 정도로 유명한데 정작 우리가 잘 몰랐던 한국인>

                                                                                            출처 : 에포크타임스(2021년 10월 21일)

   

 우리나라에서는 잘 모르는데, 먼 나라 노르웨이에서는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한국인이 있다.

 노르웨이를 비롯한 독일 등 여러 유럽 국가에서도 미스터 리(Mr. Lee)로 통하는 한국인 이철호다.

 

 어린 소년이던 이철호는 한국 전쟁 때 포탄 파편을 맞고 다리를 크게 다쳤다. 당시 한국 의료 기술로는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한국에 파견을 왔다가 소년 이철호를 안타깝게 여긴 노르웨이 의사가 치료를 위해 노르웨이행을 권했다.

 이철호는 그렇게 17살이던 1954년, 난민 자격으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르웨이 땅을 밟았다.


 도착한 노르웨이에서는 다리 수술만 43번을 받았고 간신히 죽음의 문턱을 넘었다.

 하지만 낯선 타국에서 무일푼에 말도 전혀 통하지 않는 동양인일 뿐이었다.

 

 이철호는 일단 하루 3시간씩 자며 노르웨이어를 공부했다.

 

 화장실 청소부, 구두닦이 같은 궂은 일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다.

 노르웨이 슈퍼마켓에는 구운 지 오래되고 유통기한이 지나 딱딱한 빵을 새 모이용으로 싸게 팔았다.

 이철호는 새 모이용 빵을 사서 물에 불려 씹어먹으며 버텼다.

 그러다 영양실조로 쓰러진 적도 있었다.

 하도 굶다 보니까, 새로운 꿈이 생겼다.

 요리사였다.

 

 ‘요리사가 되면 음식 찌꺼기라도 먹을 수 있으니, 배고프게 굶는 일은 없겠지’

 

 라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이철호는 노르웨이 요리전문학교에 등록했다.

 학교에서는 한 호텔에 요리 견습생으로 이철호를 보냈다.

 

 처음에는 설거지부터 시작했다.

 남들이 접시 20개를 닦을 때 이철호는 50개를 닦았다.

 설거지를 열심히 하자 감자 깎기 담당으로 바뀌었다.

 남들이 감자를 그냥 껍질만 깎으면 이철호는 다음날 호텔 레스토랑 메뉴를 확인한 뒤 메뉴에 맞춰 모양을 예쁘게 내며 깎았다.

 호텔 주방장은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도 열심히 하는 이철호의 모습을 눈여겨봤고, 감자 깎기를 그만두게 하고 정식으로 요리를 배우게 했다.

 이후 요리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최우수 학생으로 학교를 졸업, 정식 요리사가 된 이철호는 노르웨이에서 셰프로서 성공가도를 걸었다.

 


 1970년대 중반, 셰프 자격으로 한국에 출장을 갔던 이철호는 우연히 한국 라면을 맛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너무 맛있다.

 요리사로서 노르웨이에 꼭 소개하고 싶다.

 노르웨이에는 이런 음식이 없다”

 그때까지 노르웨이에는 인스턴트 라면이 없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라면이란 음식 자체를 몰랐다.

 라면을 노르웨이에 처음 알리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이철호는 노르웨이 사람들이 평소 가장 즐겨먹는 소스를 가지고 한국의 유명 라면회사 연구소를 직접 찾아갔다.

 노르웨이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는 라면 개발을 위해서였다.

 그간 요리사로 일한 경험을 되돌아보니, 노르웨이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소스와 제일 좋아하는 맛에 맞추도록 노력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매운맛을 빼고 기름진 맛을 더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소고기 맛을 좋아했다.

 그렇게 소고기 맛 인스턴트 라면을 만들었다.

 


 홍보에도 최선을 다했다.

 신문과 방송 광고에 직접 출연하며 자기 이름, 미스터 리(Mr. Lee)를 걸었다.

 

 한국 여행 경품도 걸었다.

 라면 표지에는 한글을 적었다.

 한국을 알리면 라면도 자연스럽게 알려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라면을 모르던 노르웨이 사람들이 라면을 먹게 하는 데 걸린 시간은 3년.

 ‘미스터 리’

 

 라면은 그 뒤로 무려 20년이 넘도록 노르웨이 라면 시장 점유율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1년에 3,000만개가 팔린다.

 액수로 환산하면 연간 1,500만 달러다.

 

 오늘날 노르웨이 어느 슈퍼마켓 라면 코너를 가도 가장 좋은 위치에

 

 ‘미스터 리’

 

 라면이 배치돼 있다.

 노르웨이 모든 학교에는

 

 ‘미스터 리’

 

 컵라면 자판기가 설치돼 있다.

 심지어 노르웨이에서는 라면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미스터리’다.

 노르웨이에서는 라면의 원조가 일본이 아닌 한국으로 알려져 있어 일본 라면이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 공로가 인정돼 이철호는 노르웨이 이민자 최초로 노르웨이 국왕으로부터

 

 ‘자랑스러운 노르웨이인 훈장’

 

 을 받았다.

 

 노르웨이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철호의 이야기가 실렸다.

 

 노르웨이 인명백과사전에도 등록됐다.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던 때 노르웨이 측은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을 소개할 때 이철호의 조국 대통령이라고 설명할 정도였다.

 ‘노르웨이의 라면왕’

 

 이철호는 2018년, 향년 8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철호는 생전

 

 “노르웨이 시민권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난 한국 사람이다”

 

 라고 말했다.

 “한국 교민이 적은 노르웨이에서 한국말을 잊지 않기 위해 벽에 한국 단어들을 붙여놓고 평생 외워왔습니다”

 

 

◐ 북부 유럽 여행을 갔을 때 송네 피오르 배를 탔더니 미스터 리 라면을 팔았다.

 

 융플라우에 갔을 때 산 정상에서 먹는 농심 사발면을 먹고 인증샷을 찍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서 카페에서 라면을 팔면서 내내 아쉬워 했었다.

 

 인증 사진을 확대해서 카페에 붙여 놓던지 아님 라면이라도 사오던지 ㅠㅠㅠ

 

 노르웨이에서는 라면을 사서 양손에 들고 인증샷을 여러번 찍었다.

 라면은 먹지 않고 집에 가지고 와서 정수기 위에 2년 동안 올려 놓았다가 먼지가 쌓여서 싱크대 안으로 치웠다.

 

 지금 찾아서 사진을 찍어 티스토리에 올린다.

 

 코로나 때문에 카페를 닫았다가 그대로 폐업을 하느라고 미리 사놓은 컵라면과 사발면을 팔지 못한채 유통기한이 지나서 집에 가져와 싱크대에 높다랗게 쌓아 놓았었다.

 언젠가는 먹겠지 ~ .

 

 먹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지만 혼자서 그 많은 라면을 다 먹을 수는 없었다.

 건강에 좋지 않기도 하지만 영숙이는 라면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컵라면을 팔 때에는 자꾸 보니까 먹고 싶어져서 자주 먹으면 건강에 안 좋을까봐 일주일에 한번만 먹는 걸로 정해 놓고 있었다.

 

 집에 있으면서 기초신진대사량이 적어지는 탓에 체중 증가가 염려 되어서 하루 세끼를 다 안먹는다. 

 하루에 한끼나 두끼만 먹는데 그것도 되도록이면 적은 양을 먹으려고 애쓰는데(그래도 체중은 줄지 않으니 ㅠㅠㅠ 더 늘지 않음에 감사 ~ ) 라면으로 끼니를 삼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코로나가 시작된지 벌써 2년이다.

 19년도 여름에 노르웨이 갔다 왔으니 이 라면도 벌써 2년이 넘은 라면이다.

 

 오늘 안먹는 거 버리기로 작정을 하고 있는 라면 전부를 꺼내어서 껍질은 껍질대로 알맹이는 알맹이대로 분리 수거를 해서 버렸다.

 

 순간 미스터리 라면도 분리수거해서 버렸을까?

 깜놀 ~

 다행이 있어서 사진 찍어 올린다.

 

 배고팠던 미스터 리 이철호씨, 성공에 대한 열망이 미스터 리 라면을 탄생시켰다고 본다.

 배고프다고 누구나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성공의 기회를 잡았고 최선을 다해서 성공 시킨 것이다.

 

 낯설고 추웠던 노르웨이에서 어떻게 버텨낼 수 있었을까.

 

 1년의 8개월이 눈으로 뒤덮히고 백야 아니면 흑야의 나라에서, 지금도 인구가 적은 나라.

 

 한 여름 도시에도 사람이 띄엄띄엄한데 1954년에는 어땠을까?

 (노르웨이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1월 1일 노르웨이의 인구는 532만 8212명이며, 이 중에 외국인은 58만 4233명에 달한다. 1665년 노르웨이의 인구는 44만 명이었고, 1822년에는 100만 명을 넘어섰으며, 1890년 200만 명, 1942년 300만 명, 1975년 400만 명을 넘어섰고, 2012년에는 500만 명을 넘어섰다. 노르웨이 통계청은, 2030년 내에 인구가 6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였다. ~ 나무 위키에서 ~ )

 여행 기간에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딱 한번 만났었고 왠만한 곳에서는 사람 만나기가 힘든 나라였다. 

 늘 바글바글대는 사람들 속에서 살다가 사람 만나기 힘든 나라에 가니까 일년의 절반인 흑야 동안에는 눈 때문에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옆집이라고는 100미터 거리에 있는게 예사인 나라에서 긴긴 밤을 무엇을 하면서 살까? 하는 생각을 했었드랬다.

 

 낮에도 회색인 흑야.

 

 그 속에서 경건한 신앙심을 지키면서 돌로 집을 건축하는데 2년이 걸리고 한번 지은 집은 몇백년을 유지하면서 사는 나라.

 

 하나님의 축복으로 노르웨이는 유전이 풍부하였고 그것을 미래를 위해 자손들의 교육을 위해 투자했다. 

(노르웨이는 세계서 가장 잘사는 나라 중 하나다.

 이들이 가진 유전 덕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석유가 나는 나라가 모두 부자가 되진 않았다.

 ‘자원의 저주’ ‘네덜란드 병’이란 말처럼 독이 되는 경우도 많다.

 노르웨이는 어떻게 그 함정을 피해 북유럽의 슈퍼리치가 됐을까.

 노르웨이에는 오일펀드가 있다.

 자산 1조달러 규모의 최대 국부펀드 중 하나다.

 우리로 치면 국민연금 정도다.

 석유가 바탕이란 점이 차이일 뿐.

 노르웨이가 부자가 된 것은 이 오일펀드의 지혜로운 운용에 있다.

 이들은 자연의 축복을 허투루 쓰지 않고 오롯이 미래 세대를 위해 투자했다.

 1998년 주식에 투자한 이후 연평균 수익률이 6%다. 국민 일인당 투자자산은 2억원이 넘는다.

 월스트리트저널의 북유럽특파원 출신인 저자가 노르웨이의 투자법을 분석했다.

 로또나 다름없는 석유를 발견한 후 막대한 수익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투자해 성공한 비결이다.

 10년 후 미래를 내다본 덕분에 시장상황에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시장을 이기려 하지 않고 비용을 최소화한 후 윤리적인 기업에 균형 있게 투자했다.

 윤리적인 기업만 골라낸 것도 눈에 띈다.

 노르웨이처럼 가긴 쉽지 않다.

 인간은 이성적이지만은 않아 일확천금을 노리기 마련이라서다.

 그럼에도 책은 노르웨이처럼 전략에 따라 투자해보라고 조언한다.

 큰돈을 벌면서도 시간을 즐기는 인생이 보일 거라고 했다. ~이데일리에서 ~

 

 노르웨이에서 성공하는 건 절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멋진 한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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