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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44년 전 대학 1학년 때.
이곳 울산 현대 중공업으로 산업시찰을 왔었다.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다.
버스를 타고 배 만드는 공장 안을 돌아 다녔었다.
작은 동산만한 배를 만드는게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커다란 배 위에서 용접하는 사람이 개미처럼 작아 보였다. 여러대의 골리앗 크레인도 대단해 보였다.
현대 자동차 갔을 때 자동차를 빵 찍어 내듯이 조립하여 완성하는 것을 보는 것도 놀라웠다.
시뻘건 쇳물을 녹여서 커다란 철판을 만들어 내는 포항 제철도 정말 신기 했었다.
그후 울산여상에 근무하면서 현대가 외국에서 1년에 벌어 들이는 돈이 전체 국민 일인당 45000원 이상의 돈을 벌어 들인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 현대 이야기는 우리한테는 신화였다.
이후 노동 쟁의 ~ 골리앗크레인 위로 올라간 노동자들. 학교에서 현대 다니는 학생들이 자기 아빠가 월급을 얼마 받는지 자랑하는 소리를 수시로 들었었다.
결혼 후
친정 막내 은이가 친정에서 가출을 했었다.
왜 가출을 했을까?
연락도 안되고 ㅡ
또순이는 밤마다 작은 방에 가서 은이가 집에 돌아 오길 간절히 기도하였었다.
예배는 안드렸지만 믿음은 있었나보다.
밤마다 쥐어짜듯 기도 하던 언제인가 친정에 가니까 은이가 청주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청주까지 민이랑 찾으러 갔었다.
민이가 들어 갔다 나왔는데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몇달 후인가?
아무튼 친정으로 돌아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울산으로 내려 오라고,
피아노 교습소를 차려 준다고,
데리고 있겠다고 하였다.
또순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다.
정말 어림도 없는 소리.
토요일만 되면 얼굴에다 하얗게 화장을 하고 대전 집에 올라 간다고 하였었다.
은이가 집에서 하는 피아노 교습에 아이들이 제법 있었고 음악과 진학을 위해서 영남 대학 교수한테 피아노 입시 교습도 받으러 다니고 있었다.
밤낮으로 22평의 좁은 아파트에 베에토벤 피아노 곡이 울렸었다.
입시는 영남대학 입시곡을 영남대 교수한테 교습을 받고 결과는 효성여대 시험을 쳐서 떨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리석다.
어짜피 실기로 떨어지고 붙고가 결정되는데 떨어질까 무서워서 대학을 바꾸어 응시 했으니 그건 떨어지려고 시험을 친 것이다.
집에서 피아노 교습한다고 시끄럽다고 옆집에서들 난리를 쳐서 결국 교습소를 차리기로 했다. 그런데 피아노 교습소도 자격증이 있어야 하는데 은이가 교사 자격증이 없어서 부산에 있는 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어느 날 자다가 보니까 옆에 누워 있는 남편이 발로 은이 발을 툭툭치면서 장난을 치는 걸 잠결로 보았다.
충격을 받고 주말인 토요일 날 남편하고 대판 싸우고 아무 것도 안가지고 입고 있는 옷채로 큰 애를 데리고 비가 부슬부슬 오는 데 버스 정류장에서 방어진 가는 버스를 타고 종점인 꽃바위에서 내렸다.
주머니에 보니까 딱 옥동 가는 버스비만 주머니에 있었다 .
비가 부슬 부슬 오는 길을 방어진 끝에 있는 꽃바위부터 방어진 가는 중간 쯤에 있는 난목까지 걸어갔다.
당시 꽃바위는 막 앞파트를 개발하고 있어서 아파트 들이 올라가고 있었지만 대부분이 벌판이었다.
벌판을 다 지나 오니까 중공업의 골리앗 포크레인이 여러대 서 있는 중공업 회사 안이 들여다 보였다.
그걸 바라 보면서 말했다.
네가 저축을 하면 저 회사도 살수 있다고 ...
이제 와 뒤돌아 생각해보면 6살짜리 아이한테 그것처럼 거짓말 같은 거짓말도 없었지만 어쨌거나 또순이도 저축하면 현대 중공업이란 회사도 살수 있을거라 생각했었다.
ㅎㅎㅎ 중공업 주식 한주만 사도 '사주'가 되니까 말이 되긴 하넹.
거기를 지나가야 지름길이어서 회사안을 들여다보며 내려가 회사 안을 지나서 도로가 나올 때까지 걸어 갔었다.
회사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비가 부슬부슬 오는 길을 6살짜리 아이 손을 잡고 하염없이 걸었다
드디어 도로가 나오자 버스 타고 가자고 보챘다.
"너무 춥다. 버스 타고 가면 안 되나? 따뜻한 목욕탕에서 목욕하고 싶다."
" 조금만 더가면 버스 탈 수 있어."
"아 저기 버스 지나간다. 버스타고 싶다."
"버스 타고 가면 안되나? 버스 타고 가자."
아이는 지나 가는 버스를 향하여 그 작은 손을 뻗었었다.
얼마나 간절히 버스를 타고 싶어 하는지.
그날 난목까지 걸어 왔고 가게 앞에서 호떡을 보면서 침을 삼키다가 버스를 탈 수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 왔었다.
남편은 아무 말도 안했다.
또순이도 아무 말도 안했다.
은이도 아무 말도 안했다.
집에는 냉기가 돌았다.
그후 남편은 혼자서는 절대로 안가던 또순이네 친정을 혼자 간다고 해서 왜 혼자 가냐고 물었더니 대답을 못하고 머뭇 거렸었다.
그때 남편은 결국 혼자 친정에 안가고 또순이랑 같이 갔었는데 은이가 말했다. 남편이 겁이 많다고 ~ 그런 일에 겁을 안낸다면 짐승이지 ~
그일을 기화로 은이가 또순이 집을 나간다고 하면서 앞으로 다닐 학교 앞으로 이사 간다고 하였다.
피아노도 판다고 피아노 살 피아노 가게 주인을 불러 들였다.
나가려면 나가라고 하고 대신 절대로 우리 집에는 두번 다시 발걸음 할 생각 말라고 했다.
대책없이 가출할 나이는 아니어서인지 주저 앉았다.
또순이는 학교에서 친하게 지냈던 동료교사한테 말해서 은이에게 원자력 다니는 나이차이 8살 나는 남자를 소개 해줬다.
학벌도 좋고 인물도 빠지지 않고 시댁도 충청도고 둘째고 성격도 참을성 있어 보이는 직장도 좋은 남자였다.
어떻게 그 남자하고 결혼 시켜 볼까 해서 우리는 두사람을 태워다 주고 태워 오고 했었다.
또순이가 소개해 준 남자는 자가용이 없이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데이트를 했지만 은이를 마음에 들어 해서 대학도 공부 시켜 준다고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알게된 친구한테서 그 친구의 오빠를 소개 받고 데이트를 하는데 자가용에 태워서 온갖 데를 드라이브 하고 외모가 잘 생기고 키도 훤칠하다는 이유로 그 교회 다니는 남자를 선택했다.
남자가 하는 세탁소에 가서 동거를 하더니 은이는 그 남자와 결혼 시켜 달라고 졸랐다.
"직업이 있니?"
"없다."
"남자 집에 재산이 있니?"
"없다."
"뭐하는 남자니?"
"세탁소를 하는데 그런 세상적인 기준으로 재지 말아라. 세상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네가 그렇게 결혼하고 싶어 하니까 결혼 시켜 주는데 나중에 왜 안말렸느냐고 원망하지 말아라."
은이는 왜 그렇게 ~
누구든 말 못할 잘못도 저지르고 말 못할 고민도 있다.
세상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렇다고 다 나쁜 길로 빠지지는 않는다.
남자를 만나자고 했다.
남자는 허우대만 멀끔하지 딱 봐도 아니었다.
남자가 나왔는데 손톱 밑에 때가 까맸다.
머리만 잘 감아도 손톱 밑은 깨끗해 지는데 목욕까지는 아니어도 머리도 안감고 처형을 만나러 나온게다.
샤워도 자주 안해서 훤출한 외모이지만 꾀죄죄를 감출수 없었고 말을 하는데 자신감이란게 1도 없었다. .
은이는 연애하느라, 자가용에 실려 다니는게 좋아서, 눈이 가려져서, 그런게 안보이는 가 보았다.
'이 남자는 게으르구나.'
'이 남자는 여자를 고생시킬 남자구나.'
암만 보아도 또순이 눈에는 잘 생겨 보이지 않았었는데 은이 눈에는 잘 생겨 보였었는지 수시로 은이와 결혼한 자기 남편이 잘 생겼다고 말하는게 진짜 이상했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결혼을 시켰다.
엄마는 막내라서 마지막으로 하는 혼수이니 좀더 괜찮은 혼수와 결혼식을 했으면 하면서 섭섭해 했지만 또순이는 단호하게 엄마가 혼수 해주는거 아니면 관여하지 말라고 딱 잘랐다.
은이가 임신을 했을 때 유산하면 임신이 잘 안된다고 했더니 일년 안에 큰애를 낳았다.
세탁소에 불이 나서 또순이가 맡긴 겨울 옷도 다 타고 은이는 학교에 다니느라 시댁에 들어갔다.
1년이 다 안 돼서 아기를 안고 놀러온 은이는 또순이한테 말했다.
"왜 결혼한다고 했을때 안말렸어?"
"너 나 원망하지 말라고 했지?"
자가용은 할부를 1회 넣고 산 거라서 할부를 제대로 넣지 않으니까 자동차 회사에서 끌고 갔다고 한다.
시댁에서 살림 살아가며 학교에 다니느라 은이는 힘들어 했고 그 와중에 애까지 키우느라 힘들어 했고 제부한테는 수입이 없으니까 더 힘들어 했었다.
주변에서 도와 주느라 제부한테 회사를 소개해줘도 게을러서 매번 시간을 놓치고 잘리는 일이 여러번이었다.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회사로 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벌써 25년전 이야기.
결론은 또순이는 무엇인가 잘해본다고 깝쭉 댔었지만 또순이가 한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 한사람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럴까?
하나님을 몰랐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저녁을 먹고 일산 해수욕장을 끝에서 끝까지 걸어 갔다 왔다.
18년도 겨울에는 방어진에 오면 바닷가 끝에서 끝까지 달렸다.
내가 달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맞서서 그냥 차가운 바람을 뺨에 맞으면서 달렸고 그러다 보면 무언지 모를 뿌듯한 작은 성취감이 차오르고는 했었다.
달리고 난 다음에는 유치부 내가 맡은 반 단톡에 그 이야기를 올리고는 했었다.
'바닷가를 달렸습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바닷가를 달렸습니다.
차가운 바람 때문에 눈에 눈물이 굴러 떨어지지만 찬바람을 가르며 바닷가를 뜁니다.
그냥 바닷가를 달립니다.
끝까지 왕복을 하고서 태평양하고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태평양을 향하여 기도를 합니다.
다음 세대가 태평양을 품에 안고 5대양 6대주로 나아가길 축복합니다.
주님 다음세대를 축복해주셔요.
다음 세대를 축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유치부를 그만두면서 단톡을 나와 버려서 그곳에 올렸던 글들이 없어졌고 다음 글만 갠톡에 남아 있다.
"이번 주에는 남편이 시댁 친척 결혼식에 가서 집순이로 방콕하고 있습니다. 바닷가를 달리는게 나혼자라고 생각했는데 그일조차도 남편이 옆에 있을 때, 함께일 때 가능했었네요. 함께 함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바닷가 모래밭을 끝에서 끝까지 천천히 걷는데 한시간 걸린다.
머리를 파카 모자로 꽁꽁 싸매고 걸으니 천천히 걸어도 살짝 땀이 베어 나오기 시작하고 기분 좋은 피곤함이 몰려 온다.
블로그를 계속 올리느라고 블로그 내용에 얽매여서 머리속이 깨끗해지지 않고 기도가 안나온다.
블로그의 부작용.
그래도 블로그의 내용을 마져 생각해본다.
지금까지 방어진의 40년을 지켜 보았는데 앞으로의 방어진 40년은 어떻게 될
까?
이곳이 어떻게 변할까?
상상을 해본다.
의료 로봇을 만들려 한다는 것을 기사로 읽은 적이 있다.
최근에는 다시 배의 수주를 받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제조업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넘어 온 것처럼 중국으로 넘어 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제조업이 언제인가는 중국으로 넘어 간다면 이곳이 유럽처럼 그림이나 음악같은 문화의 중심지가 되려나?
아름다운 울기등대와 소나무 숲과 방어진의 풍경이니 가능하다.
부자들을 위한 개인 요트를 만들고 있으려나?.
그렇게 되면 유럽처럼 개인 보트와 요트가 가득한 선착장이 생기려나?
알 수 없지만 다음 세대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만 이곳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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