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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riage life of JINNSSAM

영숙이의 결혼생활 4. ~ 혁신과 가난

by 영숙이 2021.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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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숙이의 결혼생활 4. ~ 가난과 혁신>   

 

 한번도 가난하게 살거라고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어려서부터 왠지 모르지만 부자로 살 거 같았다.

 부자로 사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성장했으며 아직 취직하지 않았을 때에도 부자로 살 것을 확신했었다.

 

 결혼 했다.

 

 물론 잘 살거라고 생각했다.

 혼자 버는 것도 아니고 둘이 버는데 못 살것도 없었다.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열심히 벌고 알뜰살뜰 모으면 잘 살거라고 생각한건 혼자만의 생각

 

 신혼 초에는 시댁에서 필요한건 다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한도 끝도 없이 그냥 밑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결혼 후 3년.

 

 이렇게 살다가는 가난을 면치 못할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 사람들이 가난하게 사는지 알 것 같았다.

 영숙이는 가난하게 살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결혼해서 3년이 지났는데 가난하게 산다면 바꾸어야 했다.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3년이나 30년 이후나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30년 이후에도 여전히 돈 걱정이나 하면서 사는 인생이라면 정말 인생 헛산게 된다.

 지금처럼 살아가는 것을 어디서인가 끊어 가야 했다.

 .

 

 남편은 기억할지 모르지만 그때 그런 말을 했었다.

 

 "우리가 잘살면 부모님 생활비 드리는거 별거 아닐거예요. 그렇지만 지금까지처럼 이렇게 계속 쭉 과도한 생활비 + 온갖 경조사비 + 특별행사비 까지 계속 드려야 한다면 우린 양쪽 다 못살게 되거고 그럼 생활비 드리는거 제대로 못드리게 될거예요."

 

 물론 남편은 이해를 못했다.

 그냥 알뜰살뜰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신혼 때 근처에 살던 여선생님이 결혼을 한지 1년쯤 됐었는데 선생님 시어머니는 홀시어머니셨는데 그때 했던 이야기가 정말 부러웠었다. 

 

 "제가 결혼하면서 월급타면 남편 월급과 제 월급을 모두 시어머니한테 드렸더니 1년이 지나고 우리 둘을 부르더니 너희 월급은 너희들이 관리해야 돈을 모으지. 이제 나를 주지 말고 너희들이 관리해라."

 

 그 말을 들었을 때 정말 부러웠었다.

 

 '그런 시어머니도 계시구나. 난 나중에 생활비를 받는 시어머니가 아니라 생활비를 보태는 시어머니가 되고 싶다.'

 

 큰 아이가 백일이 지났을 때 시댁인 대구에 가라고 해서 애기를 업고 혼자 시댁에 갔는데 어머니 말씀이

 

 "이번 방학 때에는 큰집 제사에 가도록 해라."

 "제사에는 뭐하러 간대요? 죽은 사람 제사 지내서 뭐한대요?"

 "뭐? 너 가계부 보니까 니 동생 조카 백일에 담요도 사갔던데 제사 지내러 안간다고?".

 

 그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울산으로 왔었다.

 가계부까지 다 뒤지다니. . . . . .

 영숙이는 너무 시시콜콜 적어서 그런 소리까지 듣는구나. 자책하면서 애기를 업고 집에 도착하였다.

 

 집에 도착하자마다 갑자기 남편이 욕을 시작하였다.

 

 "네*이 우리 엄마한테 그럴 수 있어? 뭐 제사 지내러 안간다고? 엄마가 울면서 전화했더라."

 

 그러더니 때렸다.

 처음에는 몇대 때리고 말 것처럼 때리더니 점점 심하게 때렸다.

 영숙이도 시어머니한테 달려 들었던 잘못이 있으니 몇대 때리면 맞고 말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고함을 질렀다.

 

 "아 ~ 아 ~ 악. 아줌마 살려줘요."

 

 방문이 발칵 열리고 안집 아주머니가 말했다.

 

 "왜 그래요? 그만해요."

 

 바로 밖으로 튀어 나가서 대전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엄마. 막 때려. 엉엉엉."

 

 부들 부들 떠는 손으로 다이얼을 돌리고 엄마한테 말했고 아버지가 받아서 말했다.

 

 "지금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떼고 내일 법무사에 가서 고소해라."

 "알았어요."

 

 그날 밤 울산병원 응급실에 갔다.

 

 너무 황당해서 부끄러움도 못느꼈다.

 

 의사한테 맞았다고 이야기 했다.

 의사는 멍들었다고 2주 진단을 떼줬다.

 

 다음 날 아파서 출근 못한다고 학교에 전화를 하고 9시가 되자 법무사 사무실로 찾아갔다.

 법무사 사무장이 고소하러 왔다고 하니까 영숙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나더니 다음 날 바로 고소하는 건 그러니까 좀 생각해보고 하는게 어떠냐고 권했다.  

 

 다음날 일직이어서 학교에 아이를 데리고 일직하러 갔었다. 

 같이 일직하는 샘은 영숙이보다 5살쯤 많은 선배샘이었다. 

 이러저러한 일이 있어서 이혼하려고 한다고 하니까 샘이 이런 말을 했다.

 

 "나한테 언니가 있는데 시댁에서 아들  둘 낳고 잘 살고 있었어. 하루는 밥솥 앞에서 밥을 푸는데 시어머니가 그 앞에 앉아서 잔소리 하니까 확 밀었는데 앞에 앉아 있던 시어머니가 그만 벌렁 넘어졌어."   

 "시어머니가 같이 못산다고 아들하고 이혼시켜서 그집 나와서 친정와서 사는데, 할일 없어서 매일 여기저기 기웃기웃하면서 지내. 그집은 새며느리 들어와서 잘만 살고 있어. 이혼하면 안돼."

 

 영숙이는 이혼을 결심하고 있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해주니까 좀 그랬다.

 

 '이혼이 능사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

 

 다음날 엄마가 대전에서 왔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도 와서 옆에 사는 시외숙모네 집에 계셨다.

 

 포항에 군 부대장을 하고 있는 남동생도 오고 바로 옆에 있는 부대 부대장이셨던 육촌오빠도 찦차를 몰고 오셨다.

 

 옆집 아주머니가 말해 주었다.

 

 "그날 시끄러워질 거니까 모른 척 하라고 시어른이 전화했어요."

 

 육촌 오빠는 찦차를 몰고 와서 철희를 태운 다음 군부대로 가서 말했다고 한다. 

 

 "한번만 더 때리면 정보부로 데리고 갈겁니다."

 

 남동생도 만나서

 

 "왜 때립니까? 한번만 더 때리면 내가 찾아와서 고대로 갚아주고 때리겠습니다."   

 

 동생은 영숙이한테 말했다.

 

 "왜 맞아? 한대라도 맞으면 안돼. 같이 싸우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어. 절대로 맞지마."

 

 고소장 접수한다고 하고 이런 저런 일이 있고 친청 엄마가 왔을 때는 철희는 엄마 앞에서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었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때리겠습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때리란다고 때린 것도 싫었지만 또 잘못했다고 비는 것은 더 싫었다.

 

 친정엄마가 안집 아주머니한테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 

 

 "친정엄마가 딸 버는거 챙기려고 이혼 시키려 한다고 시어른들이 와서 말하시네요. 조금 있으면 딸 재형 저축 들은거 탄다면서요." 

 

 참 어이가 없었다.

 

 만약 정말 딸 돈버는거 챙기려고 했다면 결혼을 안시켰을 것이다.

 

 지금 영숙이가 맞아서 온 것인데 그런 소리를 하다니 정말 어기가 찼다.

 

 이혼 할거라는 영숙이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서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너 복수하려면 이혼하면 복수 못한다. 살면서 복수해야지. 엄마가 아버지하고 이혼하고 싶을 때마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혼 안했어."

 

 순수한 사랑은 그렇게 해서 강너머 어디로인가로 바람처럼 흘러가 버렸다.

 

 시댁에서는 영숙이의 마음을 달래려고 이런말 저런말 해주었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랴.

 

 "철희가 너무 착해서 당할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했을거야. 둘째 시동생이 까부니까 죽도록 때리도록 놔뒀어."

 

 그래도 시댁에 한달에 한번씩 데려갔다.

 갈때마다 설사를 했다.

 표정은 지옥행 열차를 타는 것 같은 표정이었을 것이다.

 한번은 철희가 말했다.

 

 "넌 표정이 그게 뭐니?"

 

 어금니를 꽉 깨무는 표정이,,

 지옥으로 들어가는 표정이,,   

 시댁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을 갈 때마다,,

 보였을 것이다.

 

 한번은 시아버지가 이런 말을 했다.

 

 "아니, 전자대리점을 차려 준다더니 순 거짓말이었네."

 

 영숙이한테 무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치를 떨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건 영숙이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이고,,

 병이었고,,

 고통이었음을 예수님을 믿고 알게 되었다.

 

 영숙이의 재형저축을 타서 주택에 있던 두칸짜리 방에서 22평 아파트를 전세로 얻어서 이사를 하였다.

 

 철희는 기분이 나쁘면 술을 마시고 영숙이에게 욕을 하였다.

 

 그러면서 욕하는 빈도와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는 것이었다.  

 

 어느 날 아침에도 주방 가스렌지 앞에 서 있는 영숙이 뒤에다 대고 뭔가 마음에 안든다고 욕을 하였다.

 

 

 아침 반찬으로 고등어를 굽고 있었을 것이다.

 

 "야이 씨**아."   

 

 생선을 굽다가 돌아서서 곧 바로 욕으로 대꾸하였다.

 

 "뭐 이 개씨**아."

 

 철희가 욕하는 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욕으로 대답하였다.

 

 소리 지르는데는 일가견이 있는 직업이 아닌가.

 

 놀라서 철희가 대꾸를 했다..

 

 "아니 니가 나한테 욕을 해?"

 "야, 나는 욕할줄 몰라서 안하는 줄 알아? 나도 욕할줄 알아. 앞으로 너 욕하면 나도 너 욕한만큼 욕할테니까 그렇게 알아."

 

 이후로 다시는 욕을 하지 않았다.

 원래 욕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평생 욕을 쓰는 것을 들어 본적이 없다.

 

 민간요법을 좋아해서 영숙이는 이런 저런 술을 담가 놓았었다.

 

 기분이 나쁘면 철희는 담아놓은 술을 꺼내서 따라 마시면서 떠들었다.

 

 그날도 과일을 깎고 있는데 옆에서 담금주를 꺼내더니 잔에 따라놓고 마시기 시작했다.

 

 기분 나쁘면 술마시고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소리가 듣기싫어서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랄 때 아버지의 술주정을 들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술마시는 남자랑은 절대 결혼 안하다고 결심했었다.

 결혼해서도 술주정을 들어야한다는게 넘 싫었다. 

 

 어느 날 영숙이는 과일을 깎던 칼을 과일 옆에 팍 꽂아놓고 말했다.

 

 

 "나도 술마셔야겠네. 못마실 거 뭐있어."

 

 과일주를 컵에 따라서 들이켰다.

 당연히 취하고 빙글 빙글 돌고 어지럽고 토했다.

 빙빙 돌고 어지러운데 떠들었다.

 

 "아, 세상에 사랑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게 넘 슬프다. 아, 세상에 한사람한테서도 사랑을 못 받는게 너무나 슬프다. 아, 슬프네." 

 

 그날 화장실에 가서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토했다.

 

 그 다음부터 철희는 집에서 술을 잘 안마셨고 밖에서나 혹 집에서 마신다 해도 술주정은 하지 않고 얌전히 옹알이 하다가 잠이 들었다.

 

 경제적인 것도 혁신을 했다. 

 

 영숙이가 타는 월급은 모조리 계돈을 붓고 재형저축을 들고 장기저축을 다 들어서 거의 집에 가져오는 게 없게 만들었다.

 

 철희가 타오는 월급은 타오는 날 백화점에 가서 눈 앞에서 한달 동안 쓸 분유와 집에 필요한 생필품등을 월급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 다 샀다.

 

 그때 즈음 제자인 향이가 스승에 날에 찾아와서 한 말이 있다.

 

 "선생님. 사부님한테 왜 그러셔요? 잘해주셔요."

 

 물론 향이한테는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객관적인 눈으로 볼 때에도 영숙이의 증오와 앙다물었던 모습이 보였었나부다.

 

 정말 철희가 들고 날 때 한번도 웃는 낯빛을 보여 준적이 없었던 것 같다.

 

 물론 30대의 젊은이니까 부부생활은 했다.

 

 사랑과 부부생활은 별개였다.

 

 사랑없어도 할 수 있는 거였고, 부부생활을 한다고 미움이나 증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폭력으로 굴복 시키려고 하는 것은 동물한테나 하는 짓이다.

 

 그런 것으로 굴복 시키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건 공포심으로 굴복시켜서 동물처럼 힘으로 억누르려는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그 시절 너무 힘들어서 영화필름처럼 되감기 해서 다시 돌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시로 했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내 인생이 왜 이런거지?. 왜케 힘이 드는 거지?"

 

 점 치고 사주 관상 봐 주는 곳을 찾았다.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고 행동이었지만 의지할데가 없으니 그런 곳이라도 찾았었던 것 같다.

 

 시댁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하니까 어느 사주관상을 봐주는 사람이 말했다.

 

 "시댁 사람들이 사랑이 없네. 새댁이 한테 그렇게 모질게 하다니. 사랑이 있었음 그렇게 안했을텐데."

 

 그때 깨달았다.

 

 사랑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뭣도 모르는 새댁이에게,,

 사교성이라고는 1도 없는 새댁이에게,,

 사랑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정말 모질게 대한 것이라는 것을.

 

 시댁에 생활비를 보내지 않고 돈 잘쓰는 선생님을 따라서 미장원에 다니면서 머리에도 돈을 쓰고 얼굴 맛사지에도 돈을 썼다.

 맛있는 것도 사먹고,,

 비싼 것도 사고,,

 

 결국은 여자를 힘들게 하면 손해보는 것은 남자다.

 

 그걸 안다면 여자를 절대로 건딜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3 ~ 4 개월 지냈던 어느 날 토욜날 늦게까지 철희가 집에 오지 않았다.

 

 늦게 집에 와서는 대구에서 전화가 와서 다녀 왔다고 말했다.

 

 "정말 김치하고 밥만 상에 올렸더라. 생활비를 안보내서 돈이 없다고 하더라."

 

 영숙이는 싸늘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한번은 시어머니가 집으로 찾아왔다.

 

 "생활비 보내라. 너도 아들 키우고 있지. 아들 키워서 생활비 받으려고 키우는거 아니니? 그러니까 생활비 보내라."

 

 생활비 보내라고 집까지 찾아와서 말할 거면서 왜 사람을 때리라고 했는지.   

 

 속으로 분노하면서 떨었지만 입밖으로는 말하지 못했다.

 

 결국 그때부터 다시 생활비를 보냈지만 고운마음,

 착한마음,

 사랑마음은 실종된 마음으로 보냈었다.

 

 그때 살고 있던 아파트 앞에는 노오란 은행나무가 크게 자라서 가을이면 노오란 은행잎이 거 실창문 가득 찼었다.

 

 가을 내내 거실에 앉아서 창문 가득 체워지는 노오란 은행나무를 우두커니 바라 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노오랗고 밝게 빛이 나는지.

 영숙이의 마음과는 정반대였다. 

 

 철희는 영숙이가 미워하는 만큼 살이 안 찌고 밖에서 술을 더 마시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때에라도 항상  그자리,,

 그모습으로 철희가 있어 줘서 감사하다.

 

 부모 말을 잘 듣는 남자가 아내 말도 잘 듣는다.

 

 노오란 은행나무가 거실 창문 가득하던 아파트를 떠나서 임대 아파트로 옮겼고 경제적인 것을 쥐었던 영숙이는 몫돈을 조금씩 조금씩 모아나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시댁에서 돈을 가져 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시댁의 생활비외에 시동생 결혼식 비용. 시누이 결혼식 비용. 시댁 집에서 일하는 아이의 월급이 재형저축과 모아 놓은 돈에서 시댁으로 건너갔다.

 

 시동생이 서울에서 사고를 냈을 때에는 남편 재형저축에서 대출해다가 주었다.

 

 그때 시아버지가 말했다.

 

 "지금까지 모아놓은 돈 다 썼다."

 

 그렇게 여유가 있었으면서 계속 가져갔었다.

 

 경제권을 쥔 영숙이도 87년도 부터 주식을 시작했다.

 

 주식.

 

 주식으로는 돈을 벌지 못했다.

 

 88년도에 주식을 시작했는데 활황기에 증권주를 3만원대에 사서 98년도 IMF때 2000원대에 팔았다.

 

 주식은 팔지 못해서 실패했지만,

 대신 경제와 제테크에 눈을 떴다.

 

 주택공사에서 할부로 파는 땅을 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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