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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홀로선 버드나무

< 홀로 선 버드나무 > 19. 화해

by 영숙이 2020.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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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해>

 

   보건소 차로 보건소 소장과 보건소 치료실 사람들. 곽 양하고 안양도 집에 간다면서 가버리고 보건지소에 윤선생님과 영숙이만 내려놓았다.

 

   진료실 난롯불이 꺼져서 윤선생님은 가족계획실로 건너와서 유리창 앞에서 어슬렁거렸다.

   영숙이는 난로 앞에 의자를 끌어당겨 놓고 구두와 핸드백을 콜드크림으로 닦기 시작했다.

 

     ㅡ 뭐라고 말을 한담.ㅡ

 

   말을 꺼내려하니 막상 할 말이 없다.

   묵묵히 구두를 닦으며 무슨 말을 꺼낼까 생각해 본다.

   늦가을 비가 멈춘 창밖이 차츰 흐릿하게 회색으로 변하여 가고,

   영숙이는 난로 불에 빨갛게 익은 얼굴을 하고 창 앞에 서있는 윤선생님의 완강한 뒷모습을 바라다본다.

   창 밖에는 늦가을 바람 속에 버드나무의 긴 가지가 부드러운 머리카락처럼 흩날리고 있다.

   

       " 사실은ㅡ, 그 말 때문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속상해서 그랬어요. ㅡ "

   

   작은 공간 속으로 영숙이의 말소리가 마치 타인의 소리처럼 울려 퍼진다.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천천히 윤선생님이 돌아섰다.

   빨간 볼이 뜨거워서 영숙이는 왼손으로 문지르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선생님의 시선을 붙잡았다.

   

   우울하게 가라앉은 회색빛 시선.

   회색 빛 얼굴.

   조금씩 밝아졌지만 여전히 가라앉은 그 얼굴은 따스해지지 않는다.

   영숙이의 얼굴에 고정되는 윤선생님의 시선을 감당하기 어려워 영숙이는 고개를 숙여 핸드백을 열심히 닦았다.

   마치 핸드백 닦는 일이 지상의 최대 과제인양.

 

       " 알아!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그런 것이라는 것을! "

       " 저를 너무 놀리시는 것 같았어요! "

 

   윤선생님은 다시 창 앞에서 어슬렁 거리기 시작하였다.

 

      " 여기는, 여기는 창살 없는 감옥이야! 창살만 없을 뿐이지 감옥이라고! "

      " 오락시설이 있나? 다방이 있나? 극장이 있나? 일이 바쁘기를 해? 병원에서 정신없이 지내다가 여기 오니까 정말 심심해서 못살겠다고. 이건 정말 감옥이라고. 감옥이 따로 있어? 여기가 바로 감옥이지! "

       " 긴긴 겨울밤. 시골 사람들 일 없으니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들고 가족계획 안되어서 애들만 줄줄이 낳지. "

       " 정말 여기는 감옥이야. "

     

   영숙이는 난로 앞에 앉아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선생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제나 바쁘게 하얀 가운을 입고, 

   24시간이 모자라서 25시간으로 쪼개 쓰며 가운 옷자락이 펄럭이도록  병원 안을 뛰어다니다가,

   갑자기 어느 날부터 조그만 사무실 안에 갇혀서 이야기할 친구나 아는 사람도 없이,

   바쁜 일도 없이 환자를 기다리고 있어야 하다니,

   창살 없는 감옥이라는 느낌이 들만도 하다. 

 

   창문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혼잣 말을 주고받던 윤선생님의 창백한 회색빛 얼굴이 난로 앞으로 다가와 불을 쬔다.

 

       " 사실, 김양이 없었으면 참 심심했을 거야! "

 

   영숙은 말을 하는 윤선생님의 얼굴을 웃으면서 올려다보았다.

   선생님도 영숙이를 자세히 내려다보고 있다.

   사무실 안에 난로의 온기가 점점 가득하여져 오고 영숙은 따스한 느낌 속에서 구두와 핸드백을 마저 손질하였다.

   

   소리 없는 어두움이 주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윤선생님의 어깨 위로,

   그리고 창밖의 느티나무에도.

   이제 윤선생님은 어둠 속에 어슴푸레한 윤곽만이 비친다.

   사무실 불을 켜니 갑작스러운 밝음 속에 윤선생님은 여전히 생경한 얼굴로, 곧 떠날 것 같은 얼굴로 앉아 서 있었다.

 

   그 생경한 얼굴로부터 도망치듯 영숙은 곧 일어서서 

   하얀 커튼을 내리고 문을 잠근 다음 선생님과 같이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현관문을 받쳐 놓은 돌을 치워서 문을 닫은 다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도 없는 캄캄한 밤.

   무심한 버드나무는 면사무소의 따뜻한 불빛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버드나무 아래를 지나가면서 바라 보니 불이 환하게 켜진  면사무소에는 한서기와 김서기가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숙직일까?

   아직도 할 일이 남아서일까?

   따뜻하고 환하게 보이는 면사무소가 왜 저렇게 멀게 보이는지.

   

   선생님을 올려다보니 윤선생님도 그쪽을 바라보고 계셨다.

 

   윤선생님과의 이런 일체감.

   이런 느낌이 옳은 것일까?

   옳고 그른 것을 가리기 이전에 인간의 정서는 생기고,

   정서가 정서로 끝났을 때는 변명이 필요 없지만 어떤 결과를 초래하였을 때는 스캔들이 되는 것이다. 

   

   어떤 미래가 영숙이의 앞 날에 펼쳐질지 모르지만,

   단지 현재의 이 일체감의 느낌 만으로도 영숙이는 만족하고 또 모든 일이 잘돼 나가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 선생님 내일 뵙겠습니다. "

      " 응 내일 만나. "

 

   면사무소 문을 기점으로 마을의 아래 위로 헤어지면서 인사를 나누고

   초겨울 날씨 답지 않게 부드러운 밤 속으로

   가슴 가득 꿈을 담고, 

   낮은 집들이 둘러싸고 있는 마을 한가운데로 집을 향하여 걸어갔다. 

<융플라우의 만년설 ~ 이곳의 눈이 영원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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