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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life of Jinnssam>
1. 정선생 후일담.
Jinnssam은 정선생이 당한 거를 생각하면 가슴 한쪽에 날카로운 아픔이 서늘하게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지고는 하였다.
Jinnssam일은 아니었지만 객지 생활을 했었고, 같은 시기에 발령받은 초임 발령자로서 다른 사람들은 가십처럼, 재미있는 동화책이나 소설 줄거리들을 이야기하듯이 말했지만 영숙이는 가만히 듣고 있는 것만 해도 힘이 들었다.
들을 때도 무심코 듣는 것처럼 표정 관리를 해야 했고 누구 한 사람한테 그런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다.
객지 생활은 여전히 외로운 생활이었고 말할 상대나 상의할 상대가 없다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그래."
"객지 생활은 힘든 거야."
"객지 생활이 힘든 거지."
정선생은 몸이 추스러진 다음 온산에 있는 고등학교에 잠깐 근무하다가 사우디로 돈 벌러 갔다 돌아온 대학시절 첫사랑한테 시집갔다고 한다.
서울사는 최 선생이 서울로 시집간 정선생을 만나서 근황을 이야기해주고는 하였다.
"딸 하나 낳고 잘 살고 있다."
최 선생이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영숙이는 정선생 가슴에 일생동안 불고 있을 겨울바람을 ~
누르고 ~
눌러도 ~
면도날처럼 불어올 ~
얼음처럼 날카로울 찬바람을 보는 것 같았다.
이혼녀라고 소문난 최 선생도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 이후 이후락 재단이었던 울산, 울주 지역에 있던 모든 사립학교가 공립학교로 넘어가면서 교사들도 함께 공립학교 교사가 되었다.
"청첩장 ~"
"김영경 선생 딸을 결혼시킨다는 청첩장."
"청첩장~"
"강호 선생의 딸을 결혼시킨다는 청첩장."
눈부시게 발전한 인터넷 덕분에 모두 연락이 되어 울산지역 교사들에 대한 경조사는 다 알게 된다.
두 선생의 딸들이 결혼한다는 청첩장 소식에 영숙이는 마냥 해맑게 웃을 수만은 없었다.
분명히 딸들이 결혼할 만한 과년한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결혼시킬 터 ~
만약 딸들이 정선생처럼 그런 일을 겪었다면 김영경 선생이나 강호 선생은 어떻게 했을까?
체육선생이었던 190센티 가까이 되었던 박시호 선생은 옆에 앉아 있던 작고 귀엽고 이쁜 무용 선생님하고 결혼하였다.
결혼하면서 무용선생님은 선생님 하는게 싫어서 그만두고 아이 키우고 살림하고 박시호 선생은 이후락 재단인 울산 여상을 그만두고 제일고 재단으로 옮겨서 지금도 알콩 ~ 달콩 ~
잘 지내고 계시리라 ~
영숙이는 얼마나 둔감했는지 둘이 결혼 발표할 때까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때에는 지역마다 반상회를 엄청 강조하던 시절이라 공무원이었던 교사가 반상회 지도를 해야해서 같은 동네에 살면서 반상회에 참석 안했다고 박 선생을 얼마나 뭐라했는지.
영숙이가 박 선생한테 머라고 잔소리를 할 때 짝지였던 두분.
"책상 밑으로 손잡고 있었어요."
눈치 제로 코치 제로 영숙이는 중매로 ~ ~ ~
ㅋㅋㅋ
독신을 면했다.
이후락 재단
나무위키에서 가져옴
이후락 :1924년 2월 경상남도 울산군 웅촌면 석천리에서 태어났다.
1943년 울산 공립 농업학교 졸업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이듬해 3월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 장면 내각이 만들어준 정보기관인 총리실 산하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연구실장으로 임명되었다.
국가재건 최고회의 공보실장 ~ 대통령 비서실장
이후락 정보부장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 질문
"이 부장 선생, 남반부에서는 왜 미 제국주의 군대를 붙잡아두고 돌려보내지 않고 있소?"
이후락은
"수상 각하, 한반도에서 물러난 미군을 다시 불러들인 게 누구요. 수상 아닙니까? 6.25 전쟁이 없었다면 왜 물러갔던 미군이 다시 들어왔겠소?"
라고 대답했고 김일성은 하하하 하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렸다고.
이후 7.4 남북 공동 성명을 이끌어냈다.
이후락은 중앙 정보부장 해임 이후 중남미 바하마로 날아가서 거기서 한동안 숨어있었다고 한다.
심장질환 때문에 요양하며, 겸사겸사 미국 유학 중이던 아들을 통해
"나는 정권의 비밀 다 알고 있으니 날 건드리지 말아라, 그러면 나도 입 다물겠다."
는 식으로 정치적 보복을 피하려 박정희 대통령과 모종의 협상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숙청당한 후 박정희를 맹비난했던 김형욱과는 달리 박정희에 대해 적대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박정희도 이후락에 대해서는 김형욱, 윤필용, 강창성 등과 달리 숙청하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
제10대 국회의원
1985년 정치활동 규제에서 풀렸지만 정계를 완전히 은퇴하고 경기도 광주시에서 도자기를 만들면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그 후 2009년 10월 31일에 사망했다.
향년 86세 (만 85세).
그렇지만 박정희 밑에서 일하던 동료와 선후배 대부분은 끝이 좋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천수를 누린 셈.
김재규는 10.26으로 인하여 이듬해 처형되었고, 차지철은 김재규가 발사한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김형욱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며 박종규는 간암으로 인해 제5공화국 정권이 끝나기도 전인 1985년에 죽었다.
자식들이 국내외에 막대한 양의 부동산을 상속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가치가 폭등한 21세기 기준으로 보면 막대한 수준으로 추정되고 있다.
알려진 부동산 외에도 박정희의 거액 스위스 차명계좌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향인 울산에는 이후락이 설립한 학교가 많다.
현재 신정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꾼 우석고등학교는 이후락의 호를 딴 학교였고, 학성고등학교는 이후락의 본관인 울산의 옛 별호를 딴 학교다.
울산여자상업고등학교. 학성중학교. 학성여중. 언양여상도 이후락이 설립한 학교로 알려져 있다.
1972년 이른바 "10월 유신"도 이후락의 작품이다.
출처: https://sjjtc1.tistory.com/501 [베이비 붐 세대 - 또순이: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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