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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City life of Jinnssam

by 영숙이 2022.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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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life of Jinnssam>

1. 인사.

1979년

23살.

울산에서의 첫날.

아버지가 함께 동행하였다.

아버지는 아니 부모는 울타리다.

부모의 울타리 중에서 엄마의 울타리와 아버지의 울타리는 또 다르다.

지금 생각해보면 워낙 엄마가 아버지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아버지를 나쁘게 인식하였던 것 같다.

아버지의 술주정과 부부싸움을 지켜보았던 터라 나쁘게 인식되어서 그렇지 분명 엄마의 울타리와 아버지의 울타리가 엮여서 가정의 울타리가 되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헛간에서 아버지에게 맞았던 기억은 엄마가

"동생하고 맨날 붙어 싸운다."

고 이야기하니까 그 때문에 때렸었다.

그 후로 엄마는 우리가 아무리 싸워도 아버지한테는 절대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마 그때 엄마도 엄청 놀랐었나 부다.

우리에게는 그때문에 아버지는 엄청 무서운 분이셨다.

100미터 전방에만 보여도 90도 각도로 꾸벅 인사를 하였었다.

술주정을 한 것은 시청이나 군청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술로 풀었던 게 습관이 되어서 그러셨던 것 같다.

그렇게 술에 많이 의존적이었고 그렇게 술을 마시면 우리들한테 술주정을 하셨다.

결국 평생을 술로 사셨고 76세에 돌아가시게 된 것도 술 때문에 영양 부족으로 혈관이 약해져서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어쩌다 친정에 가서 보면 하루에 술을 큰 대도 병으로 한병씩 마셨었다.

아버지는 집안에 막내로 태어 나셨지만 집안에 기둥이 되어 위에 형님 두 분을 지극으로 모셨었다.

특히 작은 형님이 일찍 혼자 되셔서 그 가족을 먹고 살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셨는데 덕분에 작은 집 사촌 언니들이 우리 집에서 많이 살았었다.

그중에 작은 사촌 언니가 가장 많이 살았다.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거들어 주었는데 우리 집을 나갔다가도 오갈데가 없을 때마다 우리 집에 와있었던 것 같다.

작은 아버지한테는 군서 시골에 살 때 농사짓는 걸 돕게 하셨지만 부지런히 하지 않으시고 힘들어하셨다.

결국 대전에 가게까지 얻어 주시고 결혼을 시켜서 독립시키셨지만 작은 형님은 감당하지 못하고 다시 양산 큰 형님 집으로 들어가셨다.

엄마에게는 그것도 부담이셨을 것이다.

시골에 땅을 사주시고 고모들 살림에 보태고 작은 형님 먹고 살게 하려고 애쓴 것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을 테니까.

지금도 생각이 난다.

"고모부 입원했다고 너네 아버지가 병원비 다 내줬다."

그 송촌 고모네 집에 고등학교 때 동생들을 데리고 갔었다.

지금은 선비 마을로 아파트 촌이 되어 있지만 그때 그 시절에는 냇물을 건너 수로 위로 나 있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한참 걸어가니까 나오던 마을이었다.

그 마을에서도 외따로 떨어져 있는 작은 초가집이었다.

아버지 심부름으로 봉투를 전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캄캄하고 작은 방 안에서 고모라는 분이 나오셨는데 키가 작고 얼굴이 넙적한 분이셨다. 천정이 낮고 캄캄한 방안에는 들어갈 엄두도 못내고 초가집 방문 앞에서 봉투만 전해 준다음 인사를 하고 그대로 돌아서서 왔던 기억이 난다.

"큰집네 식구들 일이라면 다 퍼준다. 자기 식구들한테는 그렇게 인색하면서."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엄마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 입장도 이해가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동생한테 일이 생겼을 때

"아버지라면 저렇게 동생 일을 그냥 두고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부재가 정말 크게 느껴졌었다.

아버지와 함께 교감 선생님한테 인사를 했다.

교감 선생님은 당황한 얼굴로 어색한 웃음을 띄우셨다.

아버지와 연세가 비슷한 분으로 시골스러운 얼굴에 얼굴색이 좋지 않으신 분이셨다.

네모진 턱에 사각으로 생긴 얼굴 모양 때문에 조용하면서도 강단 있어 보이는 모습이셨다.

"아버지하고 같이 오는 경우가 없어서 ~ "

"잘 부탁한다고 봉투를 주고 가시네. ~ "

"교련과 회식을 하지."

자리는 바로 교무실 문앞 교련과 부장 선생님 옆이었다.

맞은편에는 체육과 선생님들 자리였다.

업무는 양호실 업무를 맡았고 수업은 1학년 교련 수업 1주일에 2시간씩 모두 20시간.

야간 수업으로 1학년 수업이 4시간 있었고 1학년 5반 담임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면접을 보러 오던 날 뵙고는 아침 조례 때 교무실에서 뵙는 정도였다.

별명이 '영국 신사' 이셨는데 하얀 얼굴에 자주 자주 잔잔한 미소를 띄우는 실눈을 하셨다.

사람 좋아 보이는 평안한 얼굴을 하신 보통보다는 조금 큰 키에 마른 체형을 하신 50대 후반의 깔끔한 분위기이셨다.

초임인데 담임을 하게 된 것은 부산대 간호학과를 나온 경력있는 분이 오신다고 했기 때문에 담임을 배정해 두고 있었다고 한다.

Jinnssam이 울산여상을 찾아 왔던 주가 지나고 그 다음 월요일날 오기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오기로 한 날보다 Jinnssam이 먼저와서 그분이 캔설이 된 것이다.

분홍빛 모직 옷이 한몫을 했을까?

어떤 일에 타이밍이 중요한 건 분명하다. .

2. 수업 시작.

출석부와 교과서를 들고 복도를 걸어갈 때마다

수업을 할 때마다

문득 ~ 문득 ~

첫날.

울산 오는 버스 터미널에서 부딪혔던 이강일 선생님이 떠오르고는 하였다.

어떤 표정으로 수업을 하셨더라?

무슨 이야기를 하셨더라?

분필은 어떻게 쥐고 쓰셨더라?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만났던 것이 우연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어디서도 만난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처음 출발하려고 하는 버스터미널에서 만나졌는지.

참 신기하기만 하다.

어쨌든 진영숙 선생이 고등학교 때 가장 존경하던 은사님이셨고 선생님이 되고 싶은 이유 중의 하나였던 멘토였다.

그분이 행동하셨던 대로 따라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이었을지도 모른다.

진영숙 ~

이젠 진쎔이 되었다.

진쎔 ~

진쎔의 도시 생활 ~

City life of JINNSSAM

도시로 혼자 독립하여 나올 때는 아버지가 데려다 주었지만 이제 앞으로 혼자 이 울산이라는 도시에서의 생활을 꾸려 나가야 한다.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어떻게 꾸려 나갈지.

그때의 수업은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칠판에 가득 써주고 아이들이 다 쓸 때까지 기다렸다가 설명해주면 수업이 끝난다.

칠판에 글씨는 칠판에 가늘게 그려져 있는 선을 따라서 쓰면 되고 설명은 칠판에 써 있는 것보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면 된다.

예시를 조금 붙이고 경험담이 있으면 좀 재미있게 덧붙여 이야기해주면 된다.

그렇더라도 23살.

칠판에 있는 내용을 설명하려고 아이들 얼굴을 쳐다보면 60명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가슴이 답답해지고는 했다.

때때로 교실에 들어갈 때면 심장이 쿵 ~ 쾅 ~

쿵 ~ 쾅 ~ 거리면서 숨쉬기가 곤란해지고는 하였다.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난로 가까이 서 있다가 난로의 뜨거운 열기에 원피스 자락 끝부분이 검게 그슬렸다.

어떻게 할수가 없어서 그슬린 끝부분을 옷 수선 집에 가서 잘라 버렸다.

짤막해진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야간 수업을 들어갔다.

야간 수업에 언니(?)들이 그런 진쎔을 보자마자 키득 거리는 웃음소리가 교실 가득 번졌다.

그때 울산여상에는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산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아가씨들을 대상으로 야간학교가 개설되어 있어서 한 학년에 2반씩 6개 반이 있었다.

야간반 반장 나이가 28살이었다.

하얗고 작은 얼굴에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야간반 언니들의 평균 나이가 진쎔보다 많았으니 짐 셈이 수업한다고 들어갔을 때 에헤헤 ~ 헤에 ~

에헤헤 ~ 하고 웃음을 웃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어려 보여도 선생님은 선생님이다.

책을 올려놓고 인사를 받으면서 째려보니까 조용해진다.

전부 다들 만학도라서 처음 볼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에헤헤 ~ 헤에 했지만 막상 수업을 시작하니까 무척 진지하게 수업을 들었다.

그 진지함이 또 진쌤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선배 언니 문 선생님에게 말했다.

"선생님. 수업 시간만 들어가면 가슴이 답답해져요."

"수업 별거 아냐. 그냥 마음 편하게 생각해."

"아~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마음이 편하게 먹어지지가 않았다.

답답증이 너무 심해서 무슨 병인가 싶어 시내에 있는 내과로 진찰을 받으러 갔다.

시내 옥교동에 있던 내과 병원에서 진찰을 했는데 청진기를 진지하게 대시고 듣더니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심장 기능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고 정신적인 이유인 것 같아요."

"그럴 때마다 심호흡을 하세요."

"그럼 좋아질 거예요."

정신적인 거라면 결국은 진쎔이 혼자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수업이 없을 때마다 운동장 가에 있는 커다란 송이벚꽃나무 아래에 있는 벤치에 혼자 앉아서 심호흡을 하였다.

벚꽃 잎이 가끔 하늘 ~ 하늘 ~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진쌤.

들숨 ~ 날숨 ~

긴 들숨 ~ 긴 날숨 ~

화려한 송이 벚꽃 ~

꽃분홍 송이 벚꽃 ~

꽃송이로 가득한 벚꽃 나무.

진쎔은 혼자 버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답답하게 짓눌러 오는 알 수 없는 어떤 힘을 이겨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늘 ~ 하늘 ~

떨어지는 벚꽃 잎을 바라보면서

벚꽃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벚꽃나무와 하나가 되어 ~

들숨 ~ 날숨 ~

긴 들숨 ~ 긴 날숨 ~

화려한 송이 벚꽃 ~

꽃분홍 송이 벚꽃 ~

꽃송이로 가득한 벚꽃나무와 하나가 되어 ~

City life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City life에서 살아남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23살의 봄.

그렇게 송이 벚꽃 나무 아래에서 심호흡하면서 흐르고 있었다.

외로울 틈이 없었다.

외로움은 사치였다.

할 수 있어. ~

잘할 수 있어. ~

넌 심장이 아픈 사람이 아냐.

정신적인 문제라잖아. ~

할 수 있어. ~

심호흡하면 괜찮다잖아. ~.


출처: https://sjjtc1.tistory.com/276 [베이비 붐 세대 - 또순이:티스토리]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편 23 : 6) - 내가 변하지 않으면 내 삶은 변하지 않는다. 나의 시야. 관점. 가치관. 생각을 변화 시킬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시다.

◐ 요즘 소설을 쓰면서 다육이를 심고 있다.

다육이도 잘 모르고 식물도 잘 못키우면서 다육이를 키우다보니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있다.

커피 캡슐에도 심는데 캡슐 속에 들었던 커피 찌꺼기를 흙과 마사와 섞어서 심었더니 여름 동안에 말라 버렸다.

독한 커피에 다육이들이 시들 ~ 시들 ~

노랗게 말라서 쪼그라붙어 버렸다.

ㅎㅎㅎ

헛웃음이 난다.

새로 산 다육이는 언성과 애성이 잎꽂이가 안되고 삽목을 해야 하는데 전부 미니 토분에 잎장으로 심어서 제대로 살런지 모르겠다.

일단 심고 나서 유튜브를 보았더니 잎장으로 심으면 뿌리가 내리지 않는 다육이였다.

ㅎㅎㅎ

헛일을 한셈.

다시 심어야 한다.

30년, 40년 동안 다육이 농장을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그분들의 노하우를 유튜브로 먼저 공부를 하고 시작했으면 좋았을텐데.

잘 못할 수도 있지.

어떻게 다 잘할 수 있음?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스스로의 행동이 어이 없음에 헛웃음만 나온다.

지금 다육이 농장 유튜브를 계속 틀어놓고 있다.

무슨 일이든지 거저 되는 일이 없고 쉽게 얻을 수는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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