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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칼럼/국내여행

경북 천년 숲 정원

by 영숙이 2023.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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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천년 숲 정원 >  

 

 기차 타고 와서 저녁을 웨이팅때문에 가리 늦게 먹고 아침에 일어나서 토스트 한조각을 먹은후 다시 잠 들었다,

 몇일 못잔 잠을 자고 또 자고 자꾸 잔다.

 사실 잠이 깨어서 일어나도 되었지만 일어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침대를 뒹굴 ~ 뒹굴 ~ 

 백수의 특혜를 맘껏 누린다.

 

 점심때쯤 일어나서 jinnssam이 좋아하는 청국장을 먹으러 갔다.

 청국장을 먹고 나니 벌써 시간이 2시 30분 3시 블랙타임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시간 거리인 경북 천년 숲 정원을 향하여 고 ~ 고 ~ 싱,

 

 오랫만에 경주로 가는 길을 달린다. 

 3, 4십대에 매주 주말마다 다니던 길이다.

 예전 차인 엘란트라를 타고 정말 자주 찾았던 길인데 경주에 와서 온천을 한 다음 수육을 먹고 집으로 갔었다.

 

 오랫만에 오니까 옛추억이 새록  ~ 새록 ~

 

 통일전이 있는 경북 천년 숲 정원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섰다.

 은행 나무 가로수 길이 1킬로 정도 직선으로 뻗어 있는데  벌써 은행 나무 잎들이 죄다 떨어져서 나목으로 하늘을 향하여 팔을 뻗쳐 올리고 있었다.

 노오란 은행잎이 풍성하게 달려 있을 때에는 보이지 않던 나목의 팔이  적나라하게 아직까지는 춥지 않아서 돌아 다닐만한 가을을 배경으로 마음껏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통일전.

 

 jinnssam이 신혼이었을 때 역시 신혼이었던 똘이를 만났던 장소.

 통일전 앞에 있는 잔듸 밭에서 김밥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 부부가 똘이네 부부를 만나는데 울산과 포항의 중간이 경주였기 때문에 경주 통일전 앞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똘이 부부는 아름다운 부부였다.

 지금도 그 눈부셨던 두사람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jinnssam이 아직 미혼이었을때 포항에서 근무하던 두사람이 만나려고 울산으로 왔었다.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똘이가 해군 장교 정복을 입고 국군간호사관학교를 졸업한 올케가 국군간호 장교 정복을 입고 울산으로 왔었다.

 두사람을 만나서 시외버스 터미널 옆에 있던 작은 동산으로 산책을 했었던 추억이 있다. 

 

 찬란한 청춘.

 눈부신 두사람의 모습.

 어여쁜 두사람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설레이게 하기에 충분하였었다.

 밝고 빛나는 얼굴로 자신감 넘치던 똘이

 수줍은듯 미소짓는 해맑은 올케.

 눈부시도록 멋지고 아름다웠던 두사람의 모습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이제 너희는 어느정도 사회에서 보장된 위치에 있게 된거야."
 "아무나 그 나이에 두 사람이 다 그 자리에 있게 되는 것은 아니지."
 "너무 멋있고 너무 좋타아 ~ "

 아직도 통일전은 그 자리에  35년전보다 더 성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 인걸은 간곳 없구나.
 바로 엊그제 같기만 한걸.

 우리가 깨닫기도 전에  우리가 알던 젊은 청춘은 그렇게 우리 곁을 스쳐가는 것 인가부다.

 밀리면서 들어선 주차장에 다행히 나가는 차를 기다려 댈수가 있었다
 입구에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핫스팟이 있어서 사람들이 사진 찍느라 바그르 ~ 바그르 ~ 바그르르 ~
 폰을 들이대니 풍경이 기가믹히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잡힌다.

 그래서 사람들이 여기에 보그르 ~ 보그르 ~ 보그르르 ~.

 찰칵 ~

 찰칵 ~

 찰칵 ~
 맑은 가을 하늘

 곧게 뻗은 아름드리 나무들.
 동유럽의 어느 멋진 궁전의 정원같다

 

 젊은시절  매주 왔었던 경주지만 아직도 이렇게 모르는 곳이 있다니.
 우리가 평생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일들이 사실은 알고 있던 것이 그게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갈까?
 우리가 깨닫고 가는 일들이 얼마나 될까?

 

 다른 사람들처럼 사진을 찍으며 정원 안으로 들어가니 방송이 나온다.

 사람들의 웅웅거리는 소리에 파묻혀 뭐라고 방송하는지 잘 안들린다.

 조금 더 정원 안쪽으로 가니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안보인다.

 그사이에 입구에서 사진을 찍고 있던 그 많은 사람들이 나가서 고요가 흐르는 한적한 정원이 되었다.

 사람이 너무 없으니까 조금은 쓸쓸해지는 정원 풍경이다.

 여기 저기 꽃과 나무 사이에서 사진들을 찍는 모습이 역시나 보기에 좋다.

 

 부지런이 동네 한바퀴 돌듯이 정원을 한바퀴 돌고 꽃이 피는 봄이거나 아직 초록초록한 잎새들이 풍성한 여름이거나가 아니고 잎파리들이 전부다 떨어진 늦가을 임을 아쉬워했다.

 다시 입구 쪽에서 보이던  메타세콰이어의 불타는 나무 거리를 지나 연못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태백이의 달 5개(하늘에 한개. 연못물에 한개. 술잔에 한개. 마주보는 연인의 눈속에 2개해서 모두 도합 5개)처럼 연못가에 나무들이 연못물에 비쳐서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찰칵 ~ 찰칵 ~ 찰칵 ~

 jinnssam이 이렇게 풍경사진을 열심히 찍을 줄 몰랐다.

아직까지는 풍경 속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모습을 찍기를 즐겨하기는 한다.

 

연못을 지나니 다리가 나온다.

시냇물을 건너는 아치형 다리.'

정원의 모든 요소가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

시냇물과 시냇물 양옆에 있는 나무들을 배경으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다.

특히 시냇물에 놓여있는 외나무 다리는 사진을 찍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누가 저 외나무 다리를 가져다 놓았을까?

 

옆에 튼튼한 돌시멘트 다리가 있는데도 모두들 외나무 다리 위에서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는다.

외나무 다리 하나가 사람들을 충분히 행복하게 한다.

맨처음 외나무 다리가 필요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외나무 다리가 그 무엇보다 필요한 곳이 되어 버렸다. 

멋지다.

 

 다른 사람의 불러그를 보았는데 외나무 다리 위에서 찍은 사진이 정말 멋있었다.

 사람들이 블러그를 읽었는지 아니면 본능을 따라했는지 카메라 앵글 속으로 멋있게 보이기
때문인지 모두들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jinnssam 은 그곳에서 포즈를 잡지않고 스리스을쩍 다른 사람들의 뒷모습을 촬영했다.

 ㅋㅋㅋ

 

 방송이 여러번 반복해서 나오는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11월부터 내년 2월까지 겨울철에는 이곳 경북천년정원 공개 시간이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라고 한다.
아하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갑자기 사라진거구나.

 

 우리가 들어올 때  3시 30분이었고 한시간 남짓 돌아다녔으니까 4시 30분.

 뉘엿 뉘엿 기울었던 해가 멋진 노을을 연출하는 시간이다.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도 멋지다.

 

 주차장을 나올 때에야 비로소 맞은편에 있는 연구원이 보인다.

 연구원 둘레를 사람들이 참 많이 걷고 있었다.

 트레킹하기에 정말 좋은 장소였다.

 옆에서 말한다.

 '좀 일찍 왔으면 여기서부터 통일전까지 걸어보려고 했는데.'

 

 또다시 통일전에서의 추억이 생각의 표면 위로 떠오른다.

 지금의 똘이와 올케의 상태를 보면 안타깝기가 그지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쌍을 이루어 살라고 하셨다.

 그래서 한쌍을 이루어 살아야하는데 이루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을 불쌍한 사람이라고 한다. 

 김문훈 목사님의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작은 조카가 중학교 때부터 친정 엄마가 불쌍하다며 올케가 인천 친정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똘이는 포항에서 부대장을 하면서 15년동안 따로 살고 난후에 결론은 모두가 불쌍한 사람이 되었다.(불쌍 ~ 쌍이 아님)

 똘이도, 올케도, 캐나다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조카 두사람도 모두 불쌍하게 된 것이다.

 기러기 아빠로 15년 세월이 흐르고 나서 똘이가 은퇴한 이후 올케가 모시고 있는 친청 엄마가 암에 걸리셔서 똘이와 올케가 전원생활을 갈망하는 친정엄마를 모시고 시골에서 전원생활을 하였다. 

 

 이미 그전에 15년동안 따로 살면서 똘이는 많이 무너져 있었다.

 

 한달에 두어번 남편을 방문하던 올케.

 올케는 분명히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선 가지고 안되는 일이 있다.

 부부는 함께 있어야 한다.

 오랜 시간 떨어져 있으면서 각자의 생활에 길들여지고 각자의 생각에 길들여지고 함께 동참하는 일이 없다보니 서로 공감하는 영역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캐나다에서 그리고일본에서 최선을 다해 공부하느라 힘들었고 그곳에서 적응하느라 힘들었었다.

 결론은 아이들 교육에 투자하느라 부부는 빈털털이가 되었고 아이들은 유학에서 돌아왔지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특별하고 엄청난 직업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들도 먹고 사느라 바쁘고 부부는 오랜 세월동안 공통분모와 추억도 없이 간극을 못메우고 따로 따로 힘들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젊었을 때 한창 기러기 아빠가 유행이었다.

 기러기 아빠로 지내면서 아이들의 교육에 100%로 헌신했던 남편들이 아이들에게 투자하느라 경제적 능력이 제로가 되어버렸다.

 그런 아빠들이 무능하게 되어 가족으로부터 버려진다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부인한테 이혼 당해서 혼자 정신 놓고 떠돌아 다닌다는 이야기.

 

 슬프다.

 생각만해도 슬프다.

 

 분명 우리는 부모님의 생활비를 대준 세대이다.

 지금의 세대는 100% 자신들을 위하여 헌신한 부모님을 위해서 생활비를 절대로 대줄리가 없다.

 오히려 자신들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원망한다.

 

 누구는 부모님이 사업자금을 얼마 주었는데요.

 누구는 건물을 물려받았는데요.

 누구는 부모님한테 외제차를 선물로 받았어요.

 

 그 눈부신 청춘으로 연애 이야기를 써나갔던 그 두사람이 지금은 어떤 이야기를 쓰고 있을까?

 각자 불쌍한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서로를 원망 중일 것이다.

 

 당신이 재테크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었네요.

 아니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었으면 좋았잖아.

 캐나다와 일본까지 가서 공부했으면 부모님을 모시는게 당연한거 아니야?

 부모님을 모시기는 커녕 전화도 한통 안하는 사람들이 되었는걸.

 남보다 못한 가족이 되었는걸..

 

 슬프다.

 너무 슬퍼서 생각조차 안하고 싶다.

 

 바로 울산으로 넘어오는데 고속도로로 오니까 40분이면 도착한다.

 사우나를 하고 옆에 있는 칼국수 집에서 한그릇씩하고 집에 왔다.

 오늘은 여기까지.

 

< 기러기 아빠"라는 용어는 한국에서 유래되었고 2000년대 초에 유명해졌다.

 이는 자녀에게 더 나은 미래를 제공하기 위해 종종 다른 나라에서 가족과 따로 일하고 사는 아버지들을 말한다.

 

 자녀의 교육을 위해 자녀와 아내를 해외로 보내고 국내에 혼자 남아있는 아버지를 가리키는 말.

 보통 자녀를 해외 학교에 조기 유학을 보내면서 탈선이나 범죄 등의 불안으로 인해 아내까지 같이 가서 뒷바라지를 하도록 하고, 혼자서 고국에 남아 일하면서 해외에 나간 다른 가족들의 생활비를 송금한다.   다른 가족과 동거하지 않고 혼자 생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아내/자녀와는 1년에 1~2차례 정도 상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같은 방식으로 기러기 엄마도 있을 법 하지만, 가능성 여부를 떠나서 현실적으로 거의 없는 형태이기 때문에 "기러기 부모"가 아닌 "기러기 아빠"로 특정해서 부른다.

 지방에서 돈을 벌고 자식과 아내가 서울에 있는 경우도 일부 해당된다고 볼 수 있지만, 어차피 국내는 자주 볼 수 있기도 하고 이런 경우는 갈매기 아빠라는 별도의 이름이 있다.

 지방의 직장을 이유로 떨어져 사는 경우 정말 멀리 떨어져 사는 경우가 아닌 한 남편이 주말에 집에 오곤 하기 때문에 기러기 아빠라고 하지 않고 '주말부부'라고 부른다.

 이들은 대부분 금전적으로 여유있는 중산층 이상이 많은데, 자녀를 유학보내는 곳이 대부분 한국보다 잘사는 선진국이기 때문이다.

 이런 선진국은 한국보다 물가와 생활비 비싸기 때문에 중산층이라고 해도 소득의 대부분을 송금하는게 일반적이다.

 일반적으로 아이의 언어 능력을 기르고 해외 대학에 진학하게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하지만, 아이가 ADHD나 아스퍼거 증후군등을 앓고 있어서 해외에 보내는 경우도 있다.

 대한민국에는 이러한 경증 및 경계선 지능 장애아를 대상으로 한 특수학교가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 일반 학교를 다닐 경우 집단괴롭힘 등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현저히 높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런 아이를 두고 있는 사람들 중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특수학교가 있는 외국 선진국에 아이와 아내를 보내고 기러기 아빠가 된 경우도 있다고 한다.

 2013년 기러기 가구는 115만에, 조기유학을 보낸 기러기 아빠는 20~30만이라고 한다.

 경제적 문제로 환율이 급상승하면 그 타격을 직격으로 얻어맞게 된다.

 2009년 초 환율이 급상승할 때 피해를 본 사람이 많이 있었다.

조기유학의 효율 문제

 애초에 효율면에서도 조기유학의 폐단이 많다.

 그 방면을 잘 아는 사람들은 굉장한 영재성이 있거나 한국에서 배울 수 없는 특수한 과목을 어릴 적부터 해외에서 배울 필요가 있을 경우를 제외하면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

 보통은 한국에서 초중고를 마치고 국내의 명문대에 개설된 의치약수나 이공과 학부에 진학시켜 학사 학위를 딴 뒤, 석박사 학위를 딸 수 있는 대학원 과정부터 해외로 유학하게 하는 것을 FM코스로 추천한다.   이런 경우에는 일단 한국에서부터 능력과 배경 지식이 검증된 상태고,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현지에 이민하는 것도 쉬운데다 설렁 이런저런 사유로 인해 한국으로 유턴할 경우에도 어느 정도의 직장은 보장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렇게 하는 것이 경제적 측면이나 적응 면에서도 유리하다.

 석박사 학위 취득을 목표로 한 해외유학을 고민해볼 정도의 나잇대라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부모로부터 경제적인 독립이 본격적으로 요구되기 시작하는 20대이기 때문에 일가친척 중 1명 이상이 유학을 가는 당사자와 함께 외국으로 떠날 필요가 훨씬 줄어든다.

 설렁 노파심 때문에 외국으로 동행하고 싶다고 해도 자녀가 대학교 학부과정이나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할 때 쯤의 부모의 나이는 보통 50대 이상의 중년층인지라 체력이나 적응력 등이 청년 시절만큼 뒷받침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라 사실상 어렵다.
 

 또한 유학을 가는 당사자가 자신의 가족과 20년 이상 상호작용을 해온 데다가 성인이 될 때까지 한국에서 한국인으로서 살았기 때문에 때문에 가족 구성원 간의 소통 부재와 한국 재적응 실패라는 중대한 문제를 겪을 가능성이 줄어들며 설렁 귀국 이후에 해당 문제들을 겪는다고 해도 이를 해결할 가능성이 미성년 시절에 조기유학을 했던 경우 보다 더 높다.

 

 조기유학은 이런 안정성에 있어 매우 취약하고 심한 경우는 학위 인정조차 못 받는다.

 유학 중간에 학업포기 등으로 실패하고 유턴할 경우엔 사실상 시간만 버린 셈으로, 더 심하게 미래가 없다.

 더구나 해외생활 자체가 언어와 문화 모두를 적응해야 하는데다, 유학은 거기에 더해 현지어로 공부해야 하므로 성인들에게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런데 그걸 가능하게 하는 자기통제와 인내심과 목적의식 등에 있어서도 미성년자는 평균적으로 성인에 비해 불리하다.

 모든 걸 다 버리고 도전에 매달려야 할 시기에 나태함의 유혹에 빠지거나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망가질 확률도 해외가 국내보다 훨씬 높다.

 해외에 존재하는 다양한 한국 학생들을 보면, 해외에 나온 한국인은 대다수가 두 부류다.

 한국에서 매우 잘해서 엘리트로 나가던지, 아니면 한국에서 적응 못하고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어서 도피성으로 유학이라도 해 보려고 나가던지. 한 마디로 아주 잘 나가거나 매우 못 하거나의 극단적인 두 부류로 갈리고 그냥 평범한 집안의 평범한 학생은 해외에 적다.

 그리고 옛날 90년대 해외여행 자율화 초기까진 자격미달의 학생들이 해외에서 초중고를 다닌 후, 한국에 돌아와 해외학생 특례입학을 이용해 한국 명문대로 가는 편법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기유학을 가는 사람들이 매우 많아졌고 한국 대학의 심사도 엄격해져 그런 것도 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조기유학은 나가서 현지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끝까지 싸워 이겨내던지, 1년 내로 빨리 포기하고 돌아오던지 선택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녀들의 한국 역적응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자유스럽고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며 '아이들=자유롭게 뛰어노는 존재'인 해외의 분위기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니 갑자기 친구들과 놀 시간 따위 없는 입시지옥에 떨어져 도저히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부적응자가 되고 마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갔다와 한국어에까지 익숙지 못하면, 몇 배로 힘들어진다.

 남자의 경우는 더욱 심각한데, 딱딱하고 군대식인 조직과 직장문화 등에도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모처럼 외국에서 선진국식 좋은 가치관을 배워 왔는데, 한국에서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다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개방적 의견을 피력하면 존중받기는커녕 ‘외국물 먹더니 저렇다’라는 식으로 낙인찍히기 일쑤이니.

 외국 살다 왔다고 오히려 편견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

 조기유학생이 낙오자일 거라고 무시하기도 한다.

 '쟤는 해외에서 현지 적응에 실패했거나, 취업을 못해서 한국으로 유턴한 걸 거야'라는 식. 

 재외국민 학생은 한국 문화 이해도가 떨어질 테니 한국 기업에 융화되기 어렵다고 지레짐작하거나, 면접은 대부분 직장생활에 적응을 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서 시작하고, 긴장 탓에 발음이 조금 꼬일라 치면 한국말 할 수 있냐고 검증하려 들기도 한다.

 국내 취업을 목표로 한국에 왔는데도, top 20 명문대가 아닌 이상 유학 이력이 취업에 플러스는커녕 감점 요인이 되기 십상인 것이다.

 게다가 유학국과는 너무나 다른 한국의 채용과정에 당황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영어만 잘했지 다른 업무능력은 딸리는 경우도 많다.

 조직생활에 적응도 못하고 언어마저 서투른 사람을 누가 뽑고 싶어하겠는가.

 조기유학을 보낼 경우엔 아예 한국인이 아니라 그 나라 사람으로 만들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보내면 안 된다.

 

  그런데 초록은 동색이라고 끼리끼리 모이는 경향은 해외에서도 동일하고, 아이의 바탕이나 인성, 공부실력 등에 의해 자연스럽게 소속 집단이나 친구들이 결정된다.

 성인이 되어서 토플 등의 영어와 입학자격을 만족한 후 해외 명문대의 석박사로 유학을 갈 경우엔 이런 막장 교우의 문제에서 안전하지만 조기유학은 그대로 노출된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한다.
 

  정체성의 혼란 역시 심하다. 

 워낙 어린 나이에 가는 유학이다 보니 일부는 사실상 교포 1.5세라고 해도 될 정도로 현지에 동화하기도 한다.

 

우울증

 

 기러기 아빠가 되는 것은 개인에게도 굉장한 부담이다.

 가족과 떨어져서 사는 기러기 아빠의 외로움은 상상 이상이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고, 그리고 부부가 떨어져 있기 때문에 관계가 소원해질 수도 있다.

 

가족이 아닌 ATM으로 전락

  사실은 아빠와 친해질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해도 친해질 수가 없어요. 집에서도 자주 못 만나니까 남의 집에 온 느낌이에요. 가족들과 좋은 추억이 별로 없어요. 아빠는 저에 대해서 진짜 모르는 거예요. 뭘 좋아하는지 제가 뭘 해야 하는지.. 엄마는 저에 대해서 진짜 잘 알거든요. 그런데 아빠는 저에 대해서 잘 모르더라고요.

 이 문제는 사실 기러기 아빠에게만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지만 기러기 아빠의 특성상 더욱 자주 일어나는 문제다.

 자의건 타의건 함께 있는 시간이 적어지면 가족간 유대관계가 형성되기 어려운 탓에 가족이라 해도 낯설 수 밖에 없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처럼 학업을 마치고 국내에 복귀했을 때 이미 아이와 엄마가 생각하는 '가족'의 개념에서 아빠는 사라져 버리는 경우도 발생한다.

 물론 머리로는 가족이라는 걸 알고는 있다.

 하지만, 1년에 한두 번 짧게 보는 게 고작인 관계가 지속되면 심리적으로 가까이 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것이다.

 

 아무리 연락을 자주 한다고 해도 실제 만나는 것과는 다르며, 돈과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많지 않은 이상 외국에 있는 가족들과 만나는게 쉽지 않다.

 원래부터 돈이 매우 많은 금수저 집안이 아닌 다음에야, 남자가 고소득 직업군이라고 해도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계속 많은 시간을 들여서 일을 해야만 하기 때문에 미국이나 유럽에 자주 방문하기는 힘들다.   고소득 자영업이나 전문직은 대부분 휴가를 길게 내기 힘든 직종이 많고, 그나마 상대적으로 일정이 안정적인 대기업 간부급 직장인들도 유럽이나 미국에 방문하는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애초에 그렇게 시간과 돈이 넘쳐나는 환경이라면 아빠는 남겨두고 엄마만 따라갈 이유도 없다.

 만약 자주 만난다고 해도 같이 사는 것만은 못 하다.

 유학 기간이 끝날 때까지 별 일 없이 지내서 다시 같이 산다 해도 오랜 시간 공백 기간 때문에 아버지와 다른 가족끼리 서로 어색해지는 경우도 많다.

 주로 아버지 쪽에서 소외감을 많이 겪게 된다.

 서로 겪은 경험이 다르니 대화에서 많이 소외되는 등이다.

 한국의 현재 아버지 세대들은 같은 집안에서 가족과 쭉 같이 살아온 경우에도 은퇴하고 나면 겉도는 경우가 많은데 고작 1년에 몇번 만난 정도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십 년 이상 떨어져 살던 가족이 다시 결합하여 살게 될 경우 서로의 생활습관, 생각 등의 차이가 매우 크게 벌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자식과 함께 사는 빈도가 높은 부인의 경우 자식의 행동을 그냥 '얘는 원래 좀 이런 면이 있지.' 혹은 '얘가 평소 이렇게 말은 해도 속마음을 그렇지 않아.' 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을 자식과 오래 살지 못한 남편의 경우엔 '얘는 내가 지 키우느라 고생한 걸 알까?' 혹은 '왜 얘는 어른 앞에서 이런 식으로 말을 하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부인의 경우 자식의 행동을 매번 봐 왔기 때문에 그 행동에 익숙하고 행동에 담긴 함의를 아는 반면 남편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한국의 경제생활 환경상 아버지는 회사 일로 늦게 퇴근하고, 그나마 주말이라도 편하게 지내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고전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일부 아버지들은 '자녀교육은 엄마의 책임'이란 생각을 갖고있는 편이 많아서 소홀히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서 옛날 가부장적 가정을 묘사한 드라마를 보면 아버지에게 반항적인 자녀와 대립하는 중에 엄마를 불러 "도대체 집안에서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애가 이 모양이야?!"라고 야단하는 장면이 흔하다.

 그런데 하물며 서로 외국에서 떨어져 살았으니 더더욱 그렇다.

 기수, 나이, 경력 등의 기준을 통해 수직적인 분위기가 매우 강한 한국의 기업, 사회적 환경이 주는 영향도 의외로 크다.

 보통 기러기 아빠들이 자녀들과 충돌을 빚는 시기는 자녀들의 머리가 어느 정도 굵어진 사춘기 시기인데 자녀가 사춘기가 될 정도면 아빠들은 보통 30대 후반 이상이 되며 보통 상사 포지션에 있다.

 사회에선 자녀들 나이 두배는 되는 20대, 30대 직원들이 자신의 부하직원으로서 자신의 지시에 복종하며, 말 한 마디도 최대한 가려하는 것에 반해 집에 있는 자녀들은 자신의 부하직원보다 나이도 어리고 사회경험도 없으면서 말도 가려하지 않는 경우(허나 엄마와는 문제가 안 되는 말)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녀는 아빠의 '부하'가 아니며, 판단력이 부족한 미성년자이기까지 하므로 부모로서, 어른으로서 너그럽게 이를 이해해주고 아빠 쪽에서 먼저 따뜻하게 다가가야 하는데 정작 자녀의 특징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사달이 나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 아빠들은 크게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는 경우가 많은데 정작 화를 내고 나서 머리가 식은 후에는 엄청난 자괴감과 비참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한편 같이 살게 되면 자식은 자식대로 '아빠는 다른 행동은 다 괜찮은데, 이렇게 하면 화를 내시더라', '화는 내셔도 속마음은 나를 사랑하신다.' 등 아빠의 감정적, 행동적 패턴을 학습할 기회가 많아져 문제가 줄어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기러기 아빠를 둔 자녀의 경우 아빠와의 감정 교류의 기회를 상실하게 되며, 그 결과 '내 뜻은 이게 아닌데... 아버지는 나를 이해 못해. 어머니는 괜찮은데 아버지는 매번 화만 내셔.'라는 단편적 인식을 가지게 되기 쉽다.

 특히 인격 형성에 가장 중요한 시기인 사춘기, 성장기를 같이 보내지 못하는 것은 이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시행착오를 겪은 뒤 아빠가 '다음에는 잘 해줘야지. 내가 좀 더 이해하고 참아야지.'라고 생각하더라도

이미 자녀들은 아빠를 '알지도 못하면서 화만 내는 사람.'으로 인식해버리고 난 뒤인데다, 남성이 극도로 감정을 절제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의 특성상 악순환이 반복되곤 한다.

 한국 외국 가리지 않고 대중매체에서 아빠가 아침에 화를 내고 출근했다가 밤에 먹을 것이나 장난감을 사 들고 오는 장면, 용돈을 주는 장면이 묘사되곤 하는데 아빠들이 감정을 자녀들에게 건전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해 그런 것이다.

 매일 같이 보고 사는 상황이라면 아빠의 감정표현이 부족해도 앞서 언급했듯이 선물을 주거나 하는 등 자녀에게 알게 모르게 표현할 기회가 많아서 문제가 없는데, 기러기 아빠들은 가끔, 심하면 1년에 한두번 만나는 꼴이니 이것이 매우 어렵다.

 이 간극을 자녀와 사는 엄마들이 적극적으로 메꿔줘야 하는데, 엄마들도 인생 2회차는 아닌데다 자신들의 현지 적응도 어려운 경우가 많아 마냥 중재적 역할을 바라긴 어렵다.

 조기유학을 간 아이들은 외국식 사고방식에 익숙해지면서 한국에 남아 있던 아버지와는 세대차이와 사고방식의 차이가 더욱 커지게 될 수 있다.

 처음에는 당연히 재결합하려는 생각이더라도 갈수록 다른 가족들은 외국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귀국할 생각이 사라지기 쉬워질 수 있다는 것.

 

 아이들이 영주권자나 시민권자일 경우에는 역으로 부모님을 외국으로 모셔와서 퇴직한 부모님을 모시고 살수도 있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언어 문제 때문에 부모님이 외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무엇보다도 서양권 문화에선 미국의 남부 중산층과 같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이미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문화가 없다시피 해서 결혼을 하면서 분가라도 할 경우에는 애로사항이 꽃핀다.

 다만 경제 상황이 나빠지고 고령화가 심화되면서 요즘은 오히려 부모님을 모시는 문화가 부활하는 추세.

 가족이라도 같이 살면서 어떤 구성원이 특정한 누군가의 입장에만 맞추기는 어렵고 하루 아침에 생활 방식이나 사고 방식을 바꾸는 것 또한 불가능하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이 경우는 이미 서로 떨어져서 살아볼 만큼 살아봤기 때문에 '서로 힘들어 하는데 뭣하러 같이 살아 긁어 부스럼을 만드나? 그냥 살던 대로 살자! 이 참에 갈라서자!'라는 결말이 날 수도 있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또 아버지는 이렇게 자기 인생을 다 갈아넣고 행복도 버려가면서 자식의 성공만을 위해 기여했는데, 자식의 유학 생활의 성과가 잘 나오지 않을 경우 아버지 입장에서는 자식과 아내에 대한 분노가 한국에서 평범하게 양육해서 잘 안 됐을 때보다도 훨씬 더 커질 수 밖에 없고 가정파탄이 나기도 쉬워진다.

 결국 최악의 경우 가족 해체의 길을 걸을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

 만약 이런 식으로 파탄나고 붕괴하는 가정의 숫자가 사회적 문제가 될 정도로 많아지면, 문자 그대로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만약 이런 사태가 터지면 주변 사람들의 여론은 (진짜 아버지 측에서 막장이 아닌 한) 어머니, 자녀들에게 엄청나게 싸늘한 반응을 보인다.

 심한 경우에는 '상종못할 인간들'로 보기도 한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가치관이 다르다.', '오래 떨어져 살다 보니 서로간의 이해가 어렵다.'라는 핑계를 대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수년간 수천만원, 심지어는 수억원씩 가져다 바친 기러기 아빠들의 뒤통수를 제대로 직격하는 글자 그대로 토사구팽이기 때문이다.

 아내가 남편을 가족이 아닌 그저 재정 후원자로만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논란

 사실 기러기 아빠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반대의 상황이긴 하지만, 아버지 혼자 타지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가족들 상당수에게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고 한다. 

 독일의 경우 외국인의 비자 연장을 계속 받아주다가 노동자들의 가정 문제가 심각해지자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겸 노동력 추가 확보)을 위해 가족 초청을 허용했는데, 반세기쯤 지난 2015년이 되자 전체 인구 중에 장기거주자, 즉 이민자 비중이 무려 22%에 달하게 되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소개했는데, 한 필리핀인 노동자는 "해외에서 10년 넘게 일하다 보니 아들이 나를 그저 돈 벌어다주는 사람으로 보더라" 라고 씁쓸해하며 인터뷰를 했다.

 한편 교육열이 높은 한국에서는 이러한 기러기 아빠들이 사회적으로 큰 동정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사회적 풍조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기러기 아빠의 삶은 애초에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절대다수의 경우 자녀가 딱히 해외 교육기관의 전문성이 필요한 고급 인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언어 교육만을 위해 국부 유출을 일으키고 있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범죄는 아니므로 손가락질 받을 것 까진 없지만, 딱히 동정받을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스스로 택한 길이니 그로 인한 결과는 스스로 책임져야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담


 '기러기 아빠' 라는 표현은 '해외로 이주한 가족들을 뒷바라지 하는 아빠'를 의미하긴 하지만, 이것이 문제가 되는 원인을 보면 가족간의 소통 부재가 큰 영향을 주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가족인데 가족 같지가 않은 것이다. 

  굳이 해외가 아니더라도 아빠가 ATM인 가정은 국내에서도 분명 존재하고, 이런 가정의 아빠 역시 소외감이나 공허함 등 감정적인 문제에서 보자면 '기러기 아빠'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다.

 아빠와(자녀와) 관계가 서먹한 사람들 역시 결코 이 문제에서 예외가 아니다.

 굳이 공익광고마냥 웃으면서 다가와 어깨를 주물러주는 식의 행동까지 필요하지는 않고, 가볍게 문자나 카톡 등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아빠는 힘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가족 간의 소통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한 번 도전해보자.

                                                                                               < 나무위키에서 가져옴 >

 

◐ 기러기 아빠에 대하여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위의 내용은 나무위키에서 가져온 내용이다.

 안타깝지만 주변에서 이런 일을 흔히 본다.

 사실 jinnssam도 은퇴한 이후 서로의 생활반경이 너무도 달랐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아침 저녁으로 얼굴을 대하고 주말에만 대했기 때문에 하루종일 함께 있는 것에 대하여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하고 트러블이 있을 때면 자야 엄마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해결책을 찾기도 했고 또 너무 힘들 때면 잠시 서울을 다녀 오기도 했었다.

 혼자 있다가 합류하면 확실히 친절해지기는 한다.

 짜증도 덜내고 말도 조심해서 가려가면서 하고, 여러가지로 좋은 점이 많다.

 

 그렇지만 누구나 다 그렇게 해결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악화는 악화를 양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은 경제 이론으로만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에도 적용된다.

 

 jinnssam도 결혼 생활이 평탄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잘 이겨냈고 제일 중요한 것은 결혼 이후 남편을 위해서 항상 기도했다는 것이다. 

 기도는 많은 면에서 훌륭한 해결책이 된다.

 

 또 한가지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은 정말 상대편이 미운 이유도 있겠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마음이 미움으로 가득찼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지구 상에 있는 온 인류를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에 십자가 고난에도 인류를 구원하신 것이다.

 

 어렸을 때에 신문소설에서 읽었는데 예수님의 마음은 온인류를 품에 품을 정도로 크다고 하셨다.

 지구를 송두리채 예수님의 사랑이 가득한 마음에 퐁당 빠트렸다 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그게 무슨 소리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아무리 상대편이 잘해주어도 미움이 가득한 마음에는 상대편의 미운 모습만 찾아내서 미워하기 마련이다.

 왜곡된 시선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말을 해도 들리지 않으니 소용이 없다.

 왜곡된 마음에는 객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그 사람에게는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기도로 길을 묻고

 말씀으로 답을 얻고

 찬송으로 숨을 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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