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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영숙이와 윤선생님은 보건지소 사무실 뒷문 쪽 창문 앞에 서서 퇴근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여름에 이 선생님이 상추를 심어 놓았었던 곳은 이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영숙이가 가을이 되면서 긴 머리를 잘랐던 것처럼, 저 화단의 풀과 시든 상추를 전부 뽑고 정리했던 것이다.
저녁 안개가 조용히 나래를 펴고 사무실 주위에 내려앉는다.
영숙이는 초록 원피스 주머니에 호두를 만지작 거린다.
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하실까?
옆얼굴을 올려다보니 묵묵히 창 밖을 보고 있다.
회색 양복에 같은 빛깔의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을 수가 없다.
영숙이도 말없이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나무 울타리에 마지막 남아 있던 따스한 햇살이 부서지고
회색 빛 저녁이 천천히 걸어오고 사방은 침묵 속에 잦아든다.
영숙이는 점점 몸이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선생님은 점점 더 키가 커 가고 영숙이는 점점 더 키가 작아지고 ㅡ,
선생님은 점점 더 커 간다.
영숙이는 점점 더 키가 작아진다.
점점 작아져 보이지도 않는다.
얼마큼 작아지면 선생님의 바지 호주머니 속에 들어갈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침묵 끝에서 선생님의 말소리가 들렸다.
" 정말 따뜻한데? 겨울 같지도 않아! "
영숙이는 현실로 돌아와 선생님과 나란히 서 있는 자신을 본다.
든든한 느낌이다.
아무 말 없이 서 있어도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고 의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 여기를 잊을 수 없을 것 같아! 문득 생각이 날 거야! "
윤선생님은 떠남을 생각하고 있었나?
영숙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떠남의 일을 상상할 수가 없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
그러나 선생님은 선생님의 길로
영숙이는 영숙이의 길로 헤어져 갈 것이다.
정말 그렇게 될까?
그 어떤 미래이거나,
지금 이 시간은 소중하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영원한 것이다.
" 시간 됐는데 퇴근하지. "
" 예. "
포플린 천의 하얀색 커튼을 내리고 사무실 문과 현관문을 잠그고 면사무소 뒷문으로 갔다.
뒷문을 나가서 면사무소가 내려다 보이는 뒷 길에서 윤선생님의 손이 갑자기 영숙이의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잠깐의 일이었다.
영숙은 주머니에 손을 짚어 넣은 체 웃는 얼굴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의 얼굴은 홍조를 띠고 있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한순간이었다.
자연스럽게 친구의 손이 들어 가 있는 호주머니에 자기의 손을 넣었다 꺼내는,
상대편에게 친밀감을 느낄 때,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영숙은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 선생님처럼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면서 걸었다.
선생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선생님이 영숙이에게 가지는 친밀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위에는 따뜻한 온기 속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영숙은 윤선생님에 대한 이해가,
따뜻한 느낌,
친밀한 느낌이 참 좋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타인이지만 그리고 타인으로서 부딪힐 일 없이 세상에 나왔다가 떠나갈 테지만 지금의 이 특수한 환경 때문에 서로에 대한 이해와 친밀감을 갖게 된 것이다.
안방에서 할머니, 선생님, 영숙이 셋이서 식사를 하고 선생님은 보고 있던 신문을 들고는 곧바로 사랑 채로 건너가셨다.
영숙이는 9시까지 할머니와 TV를 보다가 안방과 이어진 윗방으로 올라와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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