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설/홀로선 버드나무

< 홀로 선 버드나무 >38. 나목이야기

by 영숙이 2020. 1. 24.
728x90
반응형

 

 

 

<나목이야기>   

 

   잠을 청하려 하였지만 벽 하나로 잇 닿아 옆으로 2칸짜리로 된 신혼부부 방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잠이 오지 않았다.

   읽다가 접어 둔 박완서 씨의  " 나목 "을 펼쳐 들었다. 

   

   전쟁으로 인한 주인공들의 삶의 변화,

   주인공의 사랑,

   안방 유다 락으로 피하게 한 두 오빠의 폭격으로 인한 죽음 등이 영숙이의 가슴을,

   젊은 가슴을,

   잠못 이루고 서성이는 가슴을 환상으로 적셨다.

 

      " 나도 언젠가는 박완서 씨처럼 이런 소설을 쓸 수 있게 될 거야!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면에는 도움을 받지 못했다.

   영숙이는 일어나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가게에 가서 맥주 3병과 안주로 땅콩을 사 가지고 왔다.

   삼단요에 엎드려 맥주와 땅콩과 나목을 펴 놓고 책과 맥주와 신혼부부의 신음 소리에 취했다.

   옆방 T.V 소리 사이로 간간이 들려오는 신음 소리.

   

   나목 속의 두 연인이 팔짱을 끼고 자동으로 북을 두드리는 곰 앞에 서 있는 모습.

   맥주 때문에 붉은 색으로 얼떨떨 해 가는 영숙의 머릿속.

   드디어 나목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반듯이 천정을 향해 누웠다.

 

   옆방 신혼부부는 이사 온 지 약 보름 정도 되었다.

   처음엔 몰랐었는데 일주일 정도 지난 어느 날 새벽에 잠이 깨어 다시 잠을 청하려 몸을 뒤척이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촉각을 곤두 세우고 듣자니 그것은 분명 옆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물론 소리를 죽였지만 어딘가 불편한 강아지나 짐승이 낑낑대는 소리는 아니었다.

   다음 날부터 이상하게 새벽이면 잠이 깨었고 그리고 옆 방의 동정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지금은 밤 11시.

   T.V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온다.

   

   영숙은 김대리와 그 부인을 떠올렸다.

   김대리는 30세가 넘은 노총각이었다.

   호리호리하고 날씬한 몸매의 부인은 28살.

   김대리는 부인보다 키가 좀 작았다.

   신음소리에 신경이 쓰이면서부터 김대리를 마당에서 대하게 되면 아래 위로 자세히 바라보게 되었다.

   

   알코올 기운 때문에 알알한 붉은 머릿속으로 혼곤한 잠과 함께 이상하게 뜨거운 느낌이 밀려왔다.

 

       " 나는 이제 23살이고 젊음이고 난 청춘이고 나는 순결한 처녀야. 젊다는 건 기분 좋은 일임에 틀림없어. 기분이 좋다니까는 ㅡ, "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상쾌한 아침.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영숙이는 청춘의 명랑함이 가득 찬 하루하루를 사랑하고 아낄 줄 아는,

   젊음을 아낄 줄 아는 여자라고.

   오늘을,

   오늘이라는 시간을 사랑할 줄 아는,

   나름 스스로에 대한 자만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 스스로가 기분이 좋다.

 

   할머니가 상 차리는 걸 도와서 방에 가지고 들어가 세 사람이 마주 앉았을 때에도 선생님은 신문에서 고개를 들지 않는다.

   회색빛으로 침울해진 얼굴을 하고 영숙이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 잘 주무셨어요? 선생님? 식사하세요! "

   

   대꾸 없이 조용하다.

   상관없이 명랑한 기분으로 영숙은 밥을 먹으면서 선생님이 침울한 이유를 생각해 본다.

   하릴없이.

   엊저녁 식사 때 할머니가 물 가지러 나간 틈에 말했었다.

 

       " 김양. 저녁 먹고 우리 뒷산에 산책 갈까? "

       " 산책요? 지금 말이에요? "

       " 아니 이따 어두워지면. "

       " 캄캄한데 어떻게 산책을 가요? 무서워서요. "

       " 왜 호랑이라도 나올까 봐? "

       " 얼마 전에 앞 집에 초상이 나서 뒷산에다 뫼를 썼잖아요? 귀신 나오면 어떡해요? "

       " 귀신이 어딨어? 내가 있잖아. 아무튼 이따 내 방에 놀러 오라고! "

       " 알았어요. 이따 한밤중에 방문 두드리면 처녀 귀신 놀러 온 줄 아세요. 내가 놀러 갈 테니까요. 방문 잠그지 말고 열어 놓으세요. 네? "
       " 정말? "

       " 정말요. "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선생님이나 영숙이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선생님은 자기의 인생을 사랑했고 자신이 선택한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었다.

   영숙이는 공허 하기는 하지만 아껴야 할 청춘이 있었으며 청춘은 견뎌야 할 공허보다는 아껴야 할 가치가 충분히 큰 것이었다.

   슬쩍슬쩍 농담을 하면서도 그러나 전혀 거짓말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래 봤으면 하는 상상의 세계였다.

   

   지금의 저 침울한 선생님의 얼굴은 엊 저녁과 상관없는 얼굴이었다.

   무엇 때문일까?

   선생님에 대해선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니 솔직히 말한다면 깊이 생각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하는 것이 옳을게다.

   어쨌든 상관없는 일이다.

   영숙은 영숙이 짊어져야 할 무게를 갖기 시작한 나이다.

   자신의 일은 자신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침 먹고 호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고 면사무소를 내려다보며 출근하였다.

   저 밑에 안양 언니가 예의 아장아장 걸음걸이로 출근하고 있었다.

   

   영숙이는 가족계획실 청소를 하고 진료실로 건너갔다.

   선생님의 얼굴 표정을 살피면서.

 

      " 난로가 따뜻하네요. "

      "..... " 

      " 뭐 하시는 거예요? "

      "...... ".

 

   선생님은 말없이 진찰 대 위에 넓려 진 붕대만 정리하고 계셨다.

   영숙이도 묵묵히 선생님을 지켜보았다.

   그때 선생님이 비로소 고개를 들고 영숙이를 바라보았다.

 

       " 어제 밤늦게 환자가 있었어. "

       " 네? "

       " 아이인데 머리를 20 바늘이나 꿰매었어. 혼자 했다고! "

   

   선생님은 힐난하는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ㅡ 아뿔싸. 그래서 화가 났구나. ㅡ

     

      " 저는 전혀 몰랐어요. "

      " 몰랐어? 어젯밤 그렇게 시끄러웠는데? "

      " 정말이에요. 잠이 푹 들어서 몰랐어요. "

      " 한 밤중에 12시도 넘었는데 갑자기 웬 여자가 아이를 안고 와서는 선생님. 선생님!  우리 아이가 머리가 터졌어요. 선생님 계셔요?  선생님 여기 계셔요? 하고 소리소리 지르고 그 때문에 엄청 시끄러웠는데 정말 몰랐어? "

 

   선생님은 여전히 의심쩍은 시선으로 영숙이의 얼굴을 살펴본다.

   영숙이는 계면쩍게 웃으면서 변명을 하였다.

   맥주 마시고 나가떨어졌기에 전혀 몰랐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 정말 몰랐어요. 세상에 그렇게 시끄러웠는데도 몰랐다니! 제가 알았으면 왜 안 나왔겠어요? "

   

   말을 그치고 혼자 마음속으로만 떠들었다.

       

      ㅡ 선생님 혼자 하시려면 얼마나 애먹는데요. 제가 왜 안 도와 드렸겠어요. 정말 몰랐어요. 맥주 마시고 기절해서 자느라고 몰랐어요. 제가 잠귀가 얼마나 밝은대요. 평생 토끼잠을 자는 사람이라구요. 잠이 안 와서 맥주 마셨거든요. 안 마시던 술을 마셔서 기절했다고요. 아세요? 옆방에서는 잠 못 들게 하지. 잠은 안 오지. 문만 열면 거기 멋진 남자가 손짓하면서 오라고 하는데 안 가고 싶겠어요? 어떻게 잠이 들겠어요? 가게에서 맥주 사다가 마셨다고요.  ㅡ

   

   영숙이는 정말 미안해하는 얼굴로 선생님을 보았다.

   선생님은 뚫어질 듯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붕대를 계속 정리하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 나는 알면서도 안 나온 줄 알았어. 그렇게 시끄러웠는데도 몰랐다니. "

      " 선생님. 정말 몰랐어요. 전혀 몰랐어요. "

      " 이게 전부 엊저녁에 치료하느라 벌려 놓은 거야. 치료 끝내고 나니까 새벽이더군. 환자 먼저 보내 놓고 도저히 정리하기가 힘들어서 그냥 놔두고 올라가서 자버렸지. 정말 몰랐었어? 몰랐었다고? "

       " 예! 정말 몰랐었어요. 잠이 깊이 들었었거든요. 제가 알았으면 왜 안 나왔겠어요. "

       " 혼자 하느라 애먹었어. 누가 도와줘야지. 보호자는 정신없이 떠들기만 하고 내 말을 알아 들어야지. 더디기만 하니 미치겠더군! "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엊저녁의 일을 설명하셨다.

   영숙이는 정말 미안하였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그토록 무심히 잠들었었다니 ㅡ

 

   청춘은 깨어지기 쉬운 크리스털과 같다.

   자칫 잘못하면 깨어지기 쉬운, 또 한 번 깨어지면 다시 붙이거나 주워 담기 어려운 크리스털.

   소중히 다루고 귀하게 여기면 보석처럼 반짝이는 청춘. 

   아무리 청춘이 깨어지기 쉽다 할지라도 냉정할뿐더러 비인간적이라면 가치가 없을 것이다. 

   영숙은 자신의 행동이 선생님에게 어떻게 비쳤을까 생각해 보았다.

 

   모든 것을 놔두고서라도,

   영숙 자신도 환자가 필요로 할 때 그 능력을 발휘해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하는 간호사였고 보건지소의 보건요원이었다.

   

   선생님 얼굴은 밝아지기는 하였으나 수면이 부족한 얼굴이라 날카로웠다.

   저렇게 많은 붕대가 풀어져 있으니 혼자서 얼마나 바빴을까?

   더불어 영숙이에 대한 원망과 치료가 끝난 후 혼자 한밤의 보건지소에 남겨지게 되었을 때는 그 쓸쓸함이 얼마나 가슴을 적셨을까?

   영숙이는 그 쓸쓸함을 절실히 알 것 같았다.

   평소의 깔끔하고 단정한 성품임에도 불구하고 어질러진 채로 진료실을 놔두고 잘 피우지도 않는 담배 한 대 피워 물고서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다가 쓸쓸한 가슴으로 보건 지소를 벗어났을 것이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