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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맘, '세계1위 부자' 키웠다

by 영숙이 2022.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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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에게 매맞던 싱글맘, '세계1위 부자' 키웠다>

                                                          출처 : 한경닷컴(ㅇ22. 6. 18)

 
74세에도 런웨이 걷는
 
  '은발의 모델'
 
 메이 머스크.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이혼.. 삼남매 홀로 키워

"아이 흥미에 격려를.. 또다른 테슬라 될지 모른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와 어머니 메이 머스크 /사진=reuters

  “안녕, 서울!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지난 12일 한 70대 여성의 트윗이 국내 테슬라 팬덤 커뮤니티를 술렁이게 했습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어머니인 메이 머스크가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서울에서 지난 16일 열린

 

  ‘글로벌 우먼 리더십 포럼’

 

  에 연설자로 참석했습니다.

 

  발 빠른 ‘테슬람’ 트위터 사용자들은

 

  “축 일론 사장 어머님 방한”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등의 멘션과 함께 메이의 방한 소식을 리트윗했습니다.

  국내 언론도 앞다퉈 그의 동정을 보도했습니다.

 

  메이가 단순히

 

  ‘세계 1위 부자의 어머니’

 

  이기만 했다면 이렇게 화제가 되진 않았을 겁니다.

 

  그는 74세의 나이가 무색하게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디올과 돌체앤가바나 등 명품 브랜드의 모델이었고, 영양학 석사 학위를 받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캐나다, 미국에서 영양사로 일했습니다.

 

  두 권의 책을 쓴 작가이자 성공리에 세 아이를 키웠습니다.

 

  겉으로 보면 일도 가정도 남부러운 것 없는

 

  ‘슈퍼 맘’

 

  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화려한 경력 뒤엔 아픔의 과거가 있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발의 여왕(Vaal Queen)' 미인 대회에 출전한 스물한살의 메이 머스크. 평소 입던 수영복에 머리와 화장도 직접 했다. 우승은 그의 몫이었다. /사진=메이 머스크 인스타그램

탐험가 집안에서 자라다

  메이는 1948년 캐나다 서스캐처원의 주도(州都)인 리자이나에서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이자 머스크의 외할아버지인 조슈아 홀드먼은 바람 같은 남자였습니다.

 

  가족들을 비행기에 태우고 북미 곳곳을 여행하고 다녔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아무 연고도 없는 남아공으로 이주해 아프리카 사막과 오지를 탐험했습니다.

 

  메이를 비롯한 아이들은 철저히 자유방임으로 키웠습니다.

 

  이러한 기질과 교육 방식은 머스크가(家)에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메이는 15세 때부터 모델 일을 시작했습니다.

 

  금발에 키가 크고 쾌활한 표정의 소녀는 금방 사람들의 눈에 띄었습니다.

 

  처음엔 소박했습니다.

 

  지역 백화점 패션쇼에 섰고 화보를 찍었습니다.

 

  “일흔 살이 될 때까지 모델 일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때는 돈을 벌어서 대학에 가고 싶었습니다”

 

  (메이 머스크 《여자는 계획을 세운다》)

 

  대학에서 영양학을 공부하던 그는 스물한 살에 친구의 추천으로 지역 미인대회에 나갔고 우승합니다.

 

  이를 계기로 미스 남아공 대회에 출전해 결선까지 나갔습니다.

 

  이 경력은 그의 평생에 걸친 모델 커리어를 든든히 뒷받침했습니다.

1976년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리토리아에서 첫째 일론(맨 왼쪽), 둘째 킴벌(뒤편), 셋째 토스카(오른쪽) 삼남매와 함께한 메이 머스크. /사진=메이 머스크 인스타그램
 
툭하면 때린 남편... 지옥 같던 결혼생활

 

  메이는 남아공 북동부의 대도시 프리토리아에서 성장했습니다.

 

  10대 시절 메이에겐 같은 동네에 살던 에롤 머스크란 남자친구가 있었습니다.

 

  그와 수년간 사귀고 헤어짐을 반복하다 1970년 결혼합니다.

 

  에롤은 집착증이 있는 남자였습니다.

 

  여러 차례의 청혼에도 메이가 거절하자 그녀의 부모님에게까지 찾아가 결혼을 졸랐습니다.

 

  당시 남아공에선 남자들이 여자의 아버지에게 결혼 승낙을 받아야 했습니다.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흑인 인종차별 정책)로 인한 흑백 갈등이 심각했고, 인권운동이 막 태동하던 시기였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였지만, 여성 인권이란 인식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에롤은 유럽 신혼 여행길부터 아내를 손찌검했습니다.

 

  “친절과 배려가 넘치는 집안”

 

  에서 자란 메이에겐 큰 충격이었습니다.

 

  모든 게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첫째 일론을 임신하는 중이었습니다.

 

  친정 식구들에게 남편이 때린 사실을 하소연할까 했지만

 

  ‘너무 창피해’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남아공 법률은

 

  ‘합당한 사유가 없는’

 

  이혼을 금지했습니다.

 

  그 사유에

 

  ‘여자를 학대하는 남자’

 

  는 해당 사항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남자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습니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1976년 머스크 삼남매의 어린 시절. 사진 왼쪽부터 일론, 토스카, 킴벌 머스크. /사진=메이 머스크 인스타그램

 

  1971년 6월 28일 첫째 일론이 태어났습니다.

 

  이후 3년 사이 둘째 아들 킴벌, 여동생 토스카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에롤은 기계 엔지니어로 일했고 사업이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집에 차가 6대나 있었고 휴가철엔 호주나 홍콩, 뉴욕으로 해외 여행을 다녔습니다.

 

  집안 살림은 풍족했지만, 메이에 대한 신체적 폭력은 멈추질 않았습니다.

 

  에롤은

 

  “이혼하면 면도날로 얼굴을 그어버리겠다”

  “아이들 다리에 총을 쏘겠다”

 

  는 등의 막말과 폭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메이는 결국

 

  ‘회복 불가능한 혼인의 파탄’

 

  법률이 통과된 해인 1979년 이혼소송을 냅니다.

 

  별거를 시작하자 에롤은 칼까지 들고 쫓아왔습니다.

 

  메이는 법원에서 판사에게 말했습니다.

 

  “남편의 돈은 필요 없어요. 아이들만 있으면 됩니다”

 

  남편과 이혼 후 메이는 아이 셋 딸린 싱글맘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남아공 동부의 항구도시 더반에서 영양사로 개업했고 모델 일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세 가족이 입에 풀칠할 수준은 됐습니다.

 

  그러나 가족이 해체된 지 2년 만에 일론은 아버지와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당시 아버지 곁엔 아무도 없어서 슬프고 외로워 보였어요”(에슐리 반스 《일론 머스크, 미래의 설계자》)

 

  메이에겐 충격이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론은 자기 생각이 확고한 아이였어요”

 

  혹자는

 

  “일론이 부자 아버지를 선택한 것”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당시 소년 일론은 손주를 가엾게 여겼던 친할머니와 매우 가까웠고 그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둘째 아들 킴벌마저 형을 따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한 자리에 모인 머스크 가족. 사진 왼쪽부터 토스카, 일론, 메이, 킴벌 머스크. /사진=메이 머스크 인스타그램

 

'천재' 아들을 키운다는 것

 

 

  메이는 부모님이 자신을 기른 방식으로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아기처럼 대하지도 꾸짖지도 않았습니다.

 

  아이들에게 무슨 공부를 해야 하는지 정해주지도 않았습니다.

 

  “응석받이로 키우면 안 됩니다. 안전한 상황이라면 아이들 스스로 책임지게 내버려 두세요”(메이 머스크 《여자는 계획을 세운다》)

 

  대신 그는 아이들 각자의 관심 분야를 좇아가도록 도왔습니다.

 

  첫째 일론은 어렸을 때부터 책벌레였습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다 읽고 몽땅 외웠습니다.

 

  하루에 10시간씩 책을 보기도 했습니다.

 

  한번 생각에 잠기면 무아지경에 빠진 듯 누가 불러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이와 조금 다르다고는 생각했지만, 괴짜 정도로 이해했어요”

 

  여동생 토스카는 오빠를 가리켜

 

  “모르는 게 있으면 우리 집 천재에게 물어봐”

 

  라고 농담삼아 말하곤 했습니다.

게임숍에서 게임을 즐기고 있는 일론 머스크의 어린 시절. 그는 열두 살에 '블래스터'라는 게임을 개발했다. /사진=메이 머스크 인스타그램

  일론은 컴퓨터광이기도 했습니다.

  열 살 때 처음으로 PC를 가졌고 사흘 밤을 꼬박 새워서 베이식 프로그램을 마스터합니다.

  12세엔

 

 ‘블래스터’

 

  라는 컴퓨터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보통의 엄마였다면 게임에만 정신이 팔렸다고 나무랄 법도 했습니다.

 

  메이는 오히려 아들에게 그 게임을 컴퓨터 잡지에 내보라고 권했고 상금으로 남아공 돈 500랜드(당시 미화로 약 750달러 가치)를 받았습니다.

 

  그는 본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상합니다.

  “1983년 일론에게 컴퓨터를 사줬고, 컴퓨터는 아직도 아주, 아주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땐 그 아이가 장차 무엇을 할지 몰랐습니다.

   테슬라나 스페이스X가 나올지는 상상도 못 했어요.

   돌이켜보니 우리 아이들이 성공한 것은 어린 시절 좋아했던 것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어떤 것에 흥미를 보이면 격려해주세요”   

 

 

<'머스크 엄마' 주식 투자 130배 대박…그 돈으로 뭐했나>  

                                                                              출처 : 한경닷컴(22.6.25)

                 아이들 교육 위해…안정된 삶 버리고 캐나다 이주

"벤처 창업 머스크 믿었다"…쌈짓돈 1만달러 내줘
"워킹맘 죄인 아니야…일하는 모습이 최고의 교육"

 

  대학 3학년 때 한 친구가 나를 미인대회에 추천했다.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덜컥 수락해 버렸다.

 

  다른 참가자들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은 듯 매우 화려했다.

 

  평소 입던 수영복에 머리와 화장도 직접 했다.

 

  무대 뒤에 순서가 배정됐다.

 

  첫 순서로 나가게 된 여자가

 

  “첫 번째는 싫다”

 

  고 했다.

 

  “그럼 내가 할게요”

 

  나는 두렵지 않았다.

                                          - 메이 머스크《여자는 계획을 세운다》중

미국 스포츠 잡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표지 모델로 등장한 메이 머스크. 그는 SNS에 '74세의 나이에 수영복 모델이 됐다는 게 흥분된다'고 적었다. /사진=메이 머스크 인스타그램

  메이 머스크는 40대 들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최대 도시 요하네스버그에 정착합니다.

  영양사 사업이 번창하면서 집도 구입했습니다.

 

  서른한 살 이혼 후 불안했던 삶이 드디어 안정을 찾은 겁니다.

 

  첫째 아들 일론은 프리토리아 남자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이 학교 학생은 영국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같은 명문 대학을 준비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러나 아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더 큰 세상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캐나다로 떠나다

 

  “일론은 캐나다로 이주하고 싶어 했어요.

 

  컴퓨터 관련 일을 하려면 북미(北美)가 낫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나더러 시민권 복구 신청을 해달라고 조르더군요.

 

  그러면 세 남매 모두 캐나다 시민권을 받을 수 있다면서요”

 

  메이는 일론의 청을 이기지 못하고 시민권 복구 신청을 합니다.

 

1985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브라이언고 재학 시절 일론 머스크(맨 왼쪽). 학창시절 심한 괴롭힘을 당한 머스크는 이후 프리토리아남고로 전학한다.

  

  당시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흑인 인종차별 정책)로 인한 흑백 갈등이 유혈사태로 번지며 사회가 극도로 불안했습니다.

  일론은 남아공 남자의 의무였던 입대가 마뜩잖았습니다.

 

  이후 한 인터뷰에서 그는

 

  “흑인을 억압하는 정권의 군대에 들어가는 게 시간 낭비라 생각했다”

 

  고 밝힙니다(찰스 모리스《테슬라 모터스》)

 

 

  17세 일론은 캐나다 여권을 손에 쥐자 지체 없이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메이는 아들에게 여행자수표 2000달러를 들려 보냅니다.

 

  이 돈의 출처가 드라마틱합니다.

 

  20년 전 메이는 ‘발의 여왕’ 미인대회에서 우승한 상금 100랜드(당시 미화 150달러 가치)로 주식을 샀습니다.

 

  친구의 권유였습니다.

 

  초보 개미의 운명인가요.

 

  증시가 폭락하면서 주식가격은 10분의 1로 쪼그라듭니다.

 

  1971년 일론이 태어난 해, 메이는 아이 명의로 주식계좌를 엽니다.

 

  그리고 18년 뒤, 15달러 투자금은 무려 130배 넘게 불어있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발의 여왕(Vaal Queen)' 미인 대회에서 우승한 메이 머스크. 그의 나이 스물한 살 때였다. /사진=메이 머스크 인스타그램

 

메이 머스크는 15세 때부터 모델 일을 했다. 열여덟 살에 찍은 첫 화장품 광고 사진. /사진=메이 머스크 인스타그램

 

  첫째가 캐나다로 떠나자 둘째 킴벌과 셋째 토스카도 가고 싶다고 나섰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메이는 본인까지 남아공을 떠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생활이 안정된 데다 케이프타운에 박사과정 입학 허가까지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렇다고 아직 고등학생인 아이들끼리만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일단 일론도 볼 겸 캐나다에 한 번 가보게 됩니다.

 
 
 

  메이는 캐나다 최고 명문 토론토대학에서 영양사 연구원 제의를 받습니다.

  교직원이 되면 아이들이 수업료를 면제받고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토론토는 대도시답게 모델 일이 제법 많았습니다.

 

  메이는 3주간 캐나다에 머물면서

 

  “괜찮을 것 같다”

 

  는 생각은 들었지만 당장 이주 결심을 하진 못했습니다.

 

  요하네스버그 집으로 돌아오자 막내 토스카가 이미 사고를 쳤습니다.

 

  15세 아이가 엄마의 집과 가구, 자동차까지 몽땅 팔아버린 것입니다.

 

  메이는 자서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서류에 서명하는 일만 남았더군요.

   그렇게 했습니다.

   아이의 행동에 화를 내지 않았어요.

   일리가 있었고, 계획을 앞당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이 미국에서 미래를 봤고 캐나다에서 시작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1988년 메이 머스크의 40번째 생일파티 때 요하네스버그에서 찍은 아이들 사진. 당시 메이에게 카메라가 없어서 친구가 찍어줬다. 왼쪽부터 킴벌, 일론, 토스카. /사진=메이 머스크 인스타그램

 

매서웠던 토론토의 겨울

 

  캐나다의 새 삶은 예상대로 힘들었습니다.

 

  12월의 토론토는 매우 추웠습니다.

 

  평생을 따뜻한 남아공에서 살다 오니 옷차림부터 적응이 어려웠습니다.

 

  작은 아파트에 입주했습니다.

 

  침실 침대는 메이와 토스카가 쓰고 일론은 거실 소파에서 잤습니다.

 

  영양사 면허를 따기 위해 토론토대에서 5개 학부 시험을 봐야 했습니다.

 

  마흔 넘어 다시 시작하는 공부가 만만치 않았지만 재미있었습니다.

 

  야간에 어린이 영양 강의를 맡았고, 지역에서 조그마한 모델 일을 시작했습니다.

 

  강연을 나가기 시작했고,《기분 최고》라는 영양학책을 썼습니다.

 

  이름이 알려지자 토론토에서의 사업도 궤도에 올랐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토론토를 떠나 타지의 대학으로 갔습니다.

 

  일론은 킹스턴의 퀸스대학교에서 물리학과 경영학을 전공합니다.

 

  토론토대에서 학비를 면제받을 수 있었지만 모두 자신만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장학금, 학자금 대출도 아이들이 직접 챙겼습니다.

 

  일론은 대학 졸업 후 캘리포니아 팰로 알토로 건너갑니다.

 

  둘째 킴벌도 형을 따라 실리콘밸리에 합류했습니다.

 

  당시 실리콘밸리는 인터넷 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시기였습니다.

 

  똑똑한 젊은이들은 대학 기숙사 방에서 세상을 변화시킬 아이디어를 짜내 돈방석에 앉았습니다.

 

 

  머스크 형제는 1995년 ‘집2(Zip2)’라는 인터넷 회사를 창업합니다.

 

  이 회사는 일종의 온라인 도시 안내 사이트였습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는 사업체 목록을 만들고 여기에 지도를 결합했습니다.

 

  집2는 뉴욕타임스, 시카고 트리뷴 등 언론사와 협력해 180개 이상의 도시 사이트를 운영합니다.

 

  지금 보면 평범한 지도 서비스지만 당시만 해도 혁신적인 아이디어였습니다.

1996년은 머스크 형제가 인터넷 기업 '집2'를 창업하고 한창 일에 빠져살던 시기였다. 메이는 캐나다를 떠나 아이들이 있는 미국으로 오게 된다. 왼쪽부터 킴벌, 메이, 일론 머스크.

 

쌈짓돈 꺼낸 ‘혁신가의 어머니’

 

  벤처 창업가들이 그렇듯, 머스크 형제도 초창기엔 형편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창업자금으로 지원해준 2만8000달러는 순식간에 말랐습니다.

 

  아주 싼 사무실을 임대했고 거기서 숙식을 해결합니다.

 

  샤워는 YMCA 시설을 이용했습니다.

 

  일론은 밤새 코딩에 매달렸고 킴벌은 사업체를 방문하는 영업을 맡았습니다.

 

 

  아들들이 타지에서 고생하는데 엄마가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메이는 6주에 한 번씩 팰로 알토를 찾았고, 식료품과 옷, 가구 등을 사줬습니다.

 

  아들들이 사업 자금이 떨어졌고 급전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자 주저하지 않고 쌈짓돈을 꺼냅니다.

 

  토론토에 집을 사려고 또박또박 모아뒀던 1만달러였습니다.

 

  “아이들이 하는 일을 믿었어요. 힘닿는 한 돕고 싶었습니다”

 

  메이는 결국 아이들 뒷바라지를 위해 캐나다를 떠나 미국으로 또 한 번 이주합니다.

1995년 뉴욕에서 첫째 아들 일론과 다정한 한때. 메이는 일론에게 책 원고를 보여주며 조언을 구했다. 평생 돌봐야할 것 같던 아이들은 어느새 엄마의 가장 큰 조력자가 되었다. /사진=메이 머스크 인스타그램

 

  창업 이듬해 벤처투자 회사

  ‘무어 데이비도우 벤처스’

 

  에서 머스크 형제의 사업에 관심을 보입니다.

 

  일론은 발표 기술은 미숙했지만, 회사를 잘 선전했고 투자가들은 그가 뿜어내는 에너지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집2에 300만달러(약 39억원)를 베팅하기로 결정합니다(애슐리 반스 《일론 머스크, 미래의 설계자》).

 

  기쁨에 들뜬 그날 저녁, 메이는 아들들을 데리고 근사한 식당에 갔습니다.

 

  식비를 내면서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이제 내 신용카드 볼 일 없을 거야”

 

  머지않아 메이의 말은 현실이 됐습니다.

 

  1999년 컴퓨터 기업 컴팩이 집2를 3억700만달러(약 3990억원)에 사들입니다.

 

  지분 7%를 보유한 스물여덟 살 머스크는 단숨에 2200만달러(약 286억원)를 거머쥐게 됩니다.

 

  ‘혁신가’ 머스크의 첫 성공이었습니다.

2013년 머스크 3대가 한 자리에 모였다. 윗줄 맨 오른쪽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일론 머스크, 일론의 두 번째 부인 탈룰라 라일리, 메이, 토스카, 킴벌. 아랫줄 오른쪽부터 5명의 소년들이 일론의 아들들. 나머지 둘은 킴벌의 아이들. 토스카와 라일리가 안고 있는 아기들은 토스카의 쌍둥이 아이다. /사진=메이 머스크 트위터

 

아이들에게 ‘일하는 엄마’의 의미

 

  메이는 칠십 평생을 영양사와 모델로 일했습니다.

 

  서른한 살에 싱글맘이 된 후엔 홀로 돈을 벌고 아이들을 보살펴야 했습니다.

 

  “내 어머니 역시 일하는 여성이었고, 결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어요”

 

  아이들 하교는 이웃 부모에게 부탁했습니다.

 

  패션쇼에 나가면 무대 바로 앞줄에 아이들이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일론은 편지를 워드로 치는 등 엄마의 일을 도왔습니다.

 

  “자립적이고, 정직하고, 예의 바르고, 근면하게 기르고 싶었습니다.

  보호해주려 들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들은 내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서 덕을 봤습니다”(메이 머스크 《여자는 계획을 세운다》)

 

 

  메이의 교육관은 손주들에게까지 이어집니다.

 

  그가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한 뒤 일론 가족과 함께 집에서 저녁을 먹곤 했습니다.

 

  메이는 일론의 다섯 아들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함께 게임을 하고, 예의 바른 식사법을 알려줬습니다.

 

  “식사를 마치면 너희들 식기는 물론이고, 네 아빠의 식기도 주방에 갖다 놓거라.

   너희의 하루가 어땠는지 아빠에게 말하지만 말고, 아빠의 하루도 여쭤보고”

 

  머스크 가(家)의 혁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었습니다.

 

 

◐ "문제 아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 부모가 있는 것이다."

  란 말이 있다.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아이를 키운 부모에게 문제가 있다는 뜻일게다.

 

 워킹 맘으로 3명의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잘 이끌어 가도록 격려하고 믿고 밀어주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하다. 

 

 위의 내용에 대입하면 이렇다.

 

 "대단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부모가 있다는 것이다."

 

 대단한 사람이 된 것은 그 사람을 키운 부모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마음의 그릇을 넓혀 가는 것도 쉽지 않다.  하물며 ~

 

 그래서 기도가 필요하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길에 십자가를 짊어지고 올라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위해 울지말고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눅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날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 속에 잡초가 쑥쑥쑥 자란다.

 

 날마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한다.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해야 한다.

 

 

 지난 주에 친정에 갔을 때 남동생이랑 여동생이랑 친정엄마랑 신탄진에 갔었다.

 강가에 텐트가 많이 쳐져 있었다.

 역시 강가에 쳐져 있는 동생 텐트 앞에 서 있는데 강건너에서 굿하는 소리가 들렸다.

 징과 꽹과리를 치면서 굿하는 소리.

 마음 속으로 외쳤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들은 물러갈지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며 이곳은 하나님의 땅이니 악하고 더러운 귀신은 물러갈지어다."

 

 마음속으로 외치고 나니까 더 이상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참 신기했다.

 영숙이 귀에 그런 소리가 들린 것도 신기했고 들리니까 예수 이름으로 축출기도를 한 것도 신기했고 그렇게 기도하니까 들리지 않는 것도 신기했다.

 누구에겐가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집에 와서 대공원 쪽 멀리에서 징 소리가 들렸다.

 다시한번 축출기도를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는 들리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일주일이 지난 오늘 점심무렵에 친정엄마한테 전화를 걸어서 했더니 엄마도 신기해했다.

  엄마한테 말했다.

 

 "예전에 나 안좋을 때 굿하는 소리가 들였을 때는 왜 예수이름으로 물리칠 생각을 못했을까?"

 "그때는 예수를 안 믿어서 그랬지."

 

 영숙이한테 예수 믿는다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마음의 평강을 위해서 또 악한 귀신이 미혹하는 것을 물리치는 데에도 정말 중요하다.

 

 

 그래서 날마다 기도하지 않으면 마음 속에 잡초가 쑥쑥쑥 자란다.

 

 날마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한다.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해야 한다.

 악한 세력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겨내기 위하여 날마다 기도해야 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향하신 하나님 뜻이니라.

 

1 Thessalonians 5:16-18

16. Be joyful always;

17. pray continually;

18.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God's will for you in Christ Jesus.

 

데살로니가전서 5:16-18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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