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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23살의 수채화

스물세살의 수채화

by 영숙이 2022.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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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세살의 수채화>

 

 3. 로맨스

 영숙이와 윤선생님은 보건지소 사무실 뒷쪽 창문 앞에 나란히 서서 퇴근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여름에 이곳에 근무하시던 이 선생님이 상추를 심어 놓았던 곳은 이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영숙이가 가을이 되면서 긴 머리를 잘랐던 것처럼,

 면사무소 용인 아저씨가 화단의 풀과 시든 상추를 전부 뽑고 정리했다.

   

    저녁 안개가 조용히 나래를 펴고 사무실 주위에 내려앉는다.

    영숙이는 초록 원피스 주머니에 호두를 만지작 거린다.

   

    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하실까?

   

   옆에 서있는 윤선생님의 옆얼굴을 올려다보니 묵묵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회색 양복에 같은 빛깔의 얼굴을 하고 창문 밖을 보고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을 수가 없다.

   

   영숙이도 말없이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나무 울타리에 마지막 남아 있던 따스한 햇살이 부서지고,

   회색 빛 저녁이 천천히 걸어오고,

   사방은 침묵 속에 잦아든다.

   

   영숙이는 점점 몸이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선생님은 점점 더 키가 커 가고

   영숙이는 점점 더 키가 작아지고 ㅡ,

   

   선생님은 점점 더 커 간다.

   영숙이는 점점 더 키가 작아진다.

   

   점점 작아져 보이지도 않는다.

   

   얼마만큼 작아지면 선생님이 손을 넣고 있는 바지 호주머니 속에 들어갈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침묵 끝에서 선생님의 말소리가 들렸다.

 

       "정말 따뜻한데?

        겨울 같지도 않아! "

 

   영숙이는 현실로 돌아와 선생님과 나란히 서 있는 자신을 본다.

   

   든든한 느낌이다.

   

   아무 말 없이 서 있어도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고

   의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를 잊을 수 없을 것 같아!

         문득 생각이 날 거야! "

 

   윤선생님은 떠남을 생각하고 있었나?

   

   영숙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떠남의 일을 상상할 수가 없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

 

   그러나 선생님은 선생님의 길로

   영숙이는 영숙이의 길로 헤어져 갈 것이다.

   

   정말 그렇게 될까?

   

   그 어떤 미래이거나,

   지금 이 시간은 소중하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영원한 것이다.

   

      "시간 됐는데 퇴근하지."

      "예. "

 

 포플린 천의 하얀색 커튼을 내리고 사무실 문과 현관문을 잠그고 면사무소 뒷문으로 나란히 걸어갔다.

   

 뒷문을 나가서 면사무소가 내려다 보이는 교회 옆길에서 옆에서 걷고 있던 윤선생님의 손이 순간적으로 영숙이의 원피스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영숙이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체 웃는 얼굴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의 얼굴은 홍조를 띠고 있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한순간이었다.

   

 자연스럽게 친구의 손이 들어 가 있는 호주머니에 자기의 손을 집어 넣었다 꺼내는 것처럼

   

   상대편에게 친밀감을 느낄 때,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고 있는 선생님처럼 영숙이도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면서 걸었다.

   

   선생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선생님이 영숙이에게 가지는 친밀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위에는 따뜻한 온기 속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영숙이는 윤선생님에 대한 이해가,

   따뜻한 느낌,

   친밀한 느낌이

   참 좋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타인이지만 

 타인으로서 부딪힐 일 없이 세상에 나왔다가 떠나갈 테지만

 지금의 이 특수한 환경 때문에 서로에 대한 이해와 친밀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안방에서 할머니, 선생님, 영숙이 이렇게 셋이서 식사를 하고 선생님은 보고 있던 신문을 들고는 곧바로 사랑 채로 건너가셨다.

   

 영숙이는 9시까지 할머니와 TV를 보다가 안방과 이어진 윗방으로 올라와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출처: https://sjjtc1.tistory.com/203 [베이비 붐 세대 - 또순이: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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