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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와 전도

무서운 어둠이었다.

by 영숙이 2021.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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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숙이는 어둠과 빛을 분간할줄 모르는 어린아이였다.
  

 밤과 낮도 모르는 아이.

 그런 아이 눈에도 어둠이 느껴졌고, 어둠이 무서웠다.

 

 그보다도 귀에서 끊임없이 들리는 푸닥거리에 따른 꽹과리 소리.

 그 꽹과리 소리는 흥겨운  한마당 잔치에서 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귓가에 끊임없이 들려오는 그 꽹과리 소리는 무당이 굿을 하면서 내는 푸닥거리였다.

 무당이 다른 사람 괴롭히기 위해 치는 꽹과리 소리.

 밤에는 귓가에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먹는거와 자는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

 학교에 갔을 때 아이들이 말했다.

"일주일만에 자주색 브라우스를 입고 나타난 선생님 모습은 충격적이었어요.
사람이 일주일 만에 저렇게도 변하는구나."

 학교는 나갔지만 제 정신은 아니었다.
 겨우 일상생횔을 버티어 나갔지만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근처에 아이들을 키워 주셨던  할머니가 사셔서 비는 시간에  찾아 갔다.
 할머니가 기도를 해주시면  할머니 옆에서 잠깐이나마 잠이 들었다.
 할머니가 말했다.

 "아까 잘 때 보니까 뱀이 휘익하고 창문 밖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보였어요."

 어둠이 무서웠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전부 나쁜 것들만 보였고 보이지 않는 두려움에 떨었다.

 

  '아, 사람들이 이런 상태가 되어서 정신병원에 가는가부다. 나도 정신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고 약을 먹어야 하나?'.

 

 답답해서 가슴에 브래지어를 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살아남기 위해서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전부 배제했다.  

 그런 어둠 속에 무서움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끊임없이 주기도문을 외웠다.

 한때 교회를 다녔었고 세례를 받았는데도 실제로는 주기도문도 외우지 못하고 있었다

 주기도문을 종이에 적어서 무조건 읽었다.
 밤마다 몇시간씩 읽다보니 드디어 외우게 되었다.

 눈을 감고 몇시간씩 주기도문을 외웠다.

 길을 걸을 때도, 무엇인가를 바라볼 때도 주기도문을 외워서 머릿 속에서 다른 생각을 못하게 했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두려움을 주기도문으로 씻어 냈다.

 미처 주기도문을 외우지 못할 때에는 그때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황수관 박사님의

 

 "아멘약"

 

 을 이용했다.

 길을 걸을 때도 무조건

 

 '아멘'

 

 힘들때도

 

 '아멘'

 

 신호등 앞에서도

 

 '아멘'

 

 어지러운 일 앞에서

 

 '아멘'

 

 다른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도

 

 '아멘'

 집에서 쌀을 씻을 때 나는 소리가 

 

 '아멘'

 

 괘종 시계 소리가 댕댕이 아닌

 

 '아멘' '아멘'

 

 으로 들릴 즈음 부터.

 

 '사도신경'

 

 을 외웠다.

  역시 외우지 못해서 종이에 써서 손바닥 안에 넣어 가지고 다니며 읽었다.

  그렇게 외운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수시로 외웠다.

  낮잠을 잘 때도 외웠다.

  외우다가 살짝 잠이 들었다 깨어나면 머리가 조금은 맑아졌다.

 

 밤에 잠들기 전과 잠에서 깨어날 때 그동안 했었던 자기암시 대신에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으로 잠을 자고 깨어났다.

 

 그렇게 월급 날이 되었는데 마침 계돈 타는 달이었었나부다.

 그때에는 계돈을 계좌이체로 주지 않고 현금으로들 주어서 몫돈들을 들고와서 영숙이에게 내밀었다.

 마음이 아직도 지옥이었던 영숙이는 돈을 받는 것도 귀찮았다.

 받은 계돈을 친정 동생들한테 1/n해서 보내버렸다.

 

  '왜 그렇게 악착스럽게 살았을까나. 그렇다고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는데...'   

 

 회한의 고통 속에서 발버둥치는데 책상 위에 옆자리 샘이 주신 교회 주보가 보였다.

 

  '교회에 다녀야 이 어둠이 벗겨질라는가 부다. 이 두려움을 벗어날 수 있는가부다. 정신 병원에 가는 것보다는 교회를 다니는 게 훨씬 낫지.'

 

  그런 생각이 들면서 그 주일 책상 위에 있던 교회로 가서 등록을 했다.

 

 알고보니 그 교회는 늘 다니던 대공원으로 가는 길 가에 있었던 교회였는데 그동안 한번도 그 교회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눈을 열고 바라보니 그 곳에 교회가 있었다.

 지금도 25년전 40살에 교회에 등록하면서 찍은 사진이 있는데 머리는 산발직전의 부시시한 머리로 눈동자를 위로 치켜뜬 무서운 모습이다.

 

 교회에 다닌다고 금방 정신이 온전해 지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눈에 귀신이 보였고 밤중엔 자다가 일어나서 앉으면 집안에 귀신이 마구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성당을 열심히 다니는 아주머니를 보면 성모 마리아 상으로 보였다.

 또 길건너 편에 길바닥을 내려다 보면서 조용히 걸어가고 있는 청소년 머리 위로 말못하는 귀신이 내리 눌러대고 있는 모양이 보였다.

 

 예배를 드리는 데 예배당 중간층 화장실 앞에 매달려 있는 영숙이 본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배만 드려서는 이길 수 없나보다. 새벽기도를 다녀야 하나부다.'

 

 그때부터 새벽기도를 다니기 시작했다.

 영숙이가 살던 아파트의 구역장은 초등학교도 거의 다니지 않은 분이셨는데 굉장히 영적인 분이셨다.

 그분은 우리 구역식구들을 모두 모아서 새벽기도 시간에 맞춰서 태우고 다녔다.

 

 모든 공예배에 참석했다.

 한번은 아이들을 데리고 대 예배를 드리러 가는데 남편이 회사를 다녀오다가 우리를 보고는 어디를 가느냐고 차안에서 소리쳤다.

 대꾸도 하지 않고 그대로 예배드리러 갔다 왔는데 남편이 화가 많이 나서 말했다.

 

 "왜 사람이 물어보는데 대답도 안하고 모르는 척하고 가는거야?"

 

 할말이 없었다.

 그래도 저녁 예배 드린다고 하면 데려다 주었다.

 

 "너무 교회에 깊이 빠지지 마라"

 

 그렇게 일요일 저녁예배를 드리러 들어 갔는데 복음 송

 

 "나 가진재물 없으나"

 

 를 작사한 송명희씨가 간증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모두들 일어서서

 

 "나 가진 재물없으나"

 

 라는 복음송을 불렀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이 가진 건강 없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

 

 1963년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날 때부터 뇌성마비 장애를 얻었다.가족은 부친 송형섭 장로, 모친 최정임 권사, 여동생 명선 자매가 있으며, 11세에 독학으로 한글을 배우고 17세에 모태 신앙이었으나 환경에 절망해서 하나님을 만나 성령으로 거듭나게된다.

 그후 약 4년간 하루 5시간씩 기도하며 성경 삼십여번 통독으로 주님의 지도하심을 받아 시를 기록하게 되었고, 1985년 5월 시집 두권과 한권의 간증 수기를 출간(규장문화사)하고 동시에 송명희 작사 최덕신 작곡 주찬양1집 ‘그이름’이 발표되었다.(시집 2는 85년 한국 기독교 저작 최우수 도서상, 92년 한국 복음성가 작사 대상수상)

 저서 스물 네권과 작사 찬양이 백여곡 발표되고, 외교외, 학교, 방송출연 등 1천오백여회 집회 활동과 기독신문 칼럼 십일년째 연재 집필하고 있다.

 1990년에는 함께 선교단 창단과 활동하여 KBS-TV 열린 음악회, 사랑의 리케스트 등 출현한바 있다. 그러나 1997년 말부터 무리한 사역 활동으로 목디스크를 얻었고, 노화현상까지 증가하여 모든 사역 활동과 집필 활동을 중단하고 투병 생활을 하고 있으나 호전된 것은 없고 전신 마비로 전환되었다.

 우리들에게 송명희 시인은 장애인이라기 보다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그의 투병생활 소식을 전해들은 많은 기독교인들은 안타까운 마음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그의 생의 마지막 꿈인 장애인 학교 건립을 위해 최덕신 집사님을 비롯하여 많은 후원인들이 동참하여 사업을 추진중에 있다

 눈물이 흘렀다.

 송명희 시인처럼 저렇게 힘든 몸으로 태어 났어도 하나님께 쓰임 받는데 친정엄마의 환갑 잔치가 끝나고 한달도 안되어서 33살에 하늘에 별이 된 남동생.

 

 '그 잘나고 똑똑한 남동생은 왜 그렇게 쉽게 갔을까?'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는 우리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하나님의 피조물이었다.

 누구인들 하나님의 피조물에서 벗어날 사람이 있을까.

 

 새벽기도에 참석해서 정말 많이 울었다.

 

 그때부터 회개가 시작되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잘못했던 일들이 하나하나 생각났다.

 동생하고의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 하나 하나가 생각났다.

 

 영숙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못됐고 어리석었는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얼마나, 잘못했는지가 매일 매일 하나씩 하나씩 생각났다.

 날마다 울었다.

 

 어디에 그렇게 울음이 쌓여 있었을까.

 어디에 그렇게 울음이 감추어져 있었을까.

 

 울어도

 울어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왜 그렇게 어리석은 충고를 했을까나. 가만히만 있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나. 전화만 하지 않았어도 살아있지 않았을까나. 병문안만 안갔어도 살아있지 않았을까나. 가서 차분히 들어보기라도 했으면 괜찮지 않았을까나. 전화만 하지 않았어도 괜찮지 않았을까나.'

 

 아무리 후회해도 무슨 소용이랴.

 아무리 회개해도 어떤 변화가 있으랴.

 

 그렇게 2달쯤 새벽기도에서 울고 났을 때, 귓가에 무당들이 하는 굿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린아이 울음 소리는 가끔 들리기는 하였지만 그건 귀에서 들리는 게 아니라 저쪽 아파트 어디에선가 들려왔다.

 

 그렇게 무섭게 화인 맞은 것처럼 머리 속에 박혀 있던 일그러진 부처님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 환갑잔치가 있었던 전년도에 전원주택에 미쳐서 매주 주일마다 전원주택을 보러 다녔었다.

 그날도 정보지에서 찾아낸 전원주택 위치를 물어보고 찾아 갔었는데 찢어진 창호지 틈 사이로 들여다 보는 순간 고통에 일그러진 부처님 얼굴이 보였다.

 

 한번 뇌리에 박힌 그 얼굴 모양이 떠나지 않았다.

 너무 무서웠다.

 

 하루는 집에서 자는데 그집에서 굿을 하다가 굿할 때 입는 옷을 벗어서 아궁이 불 속에 던져 넣는게 보였다. 

 

 '아 ~ 못참겠다.'

 

 이후로 귀에서 굿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느날 새벽인가는 창고문이

 

 '끼이익'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귀신들이 날뛰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새벽예배에 참석하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귀신의 모습이 보였었다.

 어떤 날 새벽에는 어떤 권사님이 교회 홀에 놓여있는 장의자에 앉아 계시는 데 어깨 위와 권사님 몸 위에 여기저기 있는 아기 귀신 일곱이 보였다.(권사님 아드님과 며느님은 삼성 병원에서 일하시는 부부의사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산부인과 의사가 아니었을까? 이유는 모르겠다. 그 시절은 아기들이 생기면 낳기보다는 유산을 쉽게 선택하던 때다.)

 

 하루는 너무 힘들어서 기독교 서적을 파는 곳에 가서 책을 뽑아 들었는데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귀신이 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방편이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예수 이름 의지하여 하나님 원하시는 대로 가면 괜찮아진다. 아니면 귀신이 끌고 가는 지옥 세상으로 간다.'

 

 주일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씌여 있는 것도 읽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일날 하루종일 교회에서 사는 경향이 있는데 원래 주일을 정한 이유는 6일 동안 열심히 일을 하고 남은 하루는 예배를 드리고 쉬기 위해서  있는 날이다. 그러므로 주일날 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지만 그렇다고 당장 귀신이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귀신이 보였고 힘들었고 그에 대한 기도를 했었다.

 

 '하나님.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은사를 주시옵고, 귀신이 보이는 게 좋지 않은 일이면 보이지 않게 하옵소서.'

 

 새벽에 창고 문이 닫히듯 끼긱 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고 난 다음에는 귀신들이 안보였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마음에 평강이 자리를 잡아 갔고 고요한 마음이 되어갔다.

 아무데서나 기도하고 싶었고, 아무 교회나 가서 기도를 하고 싶었고, 그때마다 아무데서나, 아무 교회나 가서 기도를 하였다.

 

 그해 가을(1998년).

 새벽 기도 시간에 주님의 하얀 손이 내 손 위에 겹쳤고 성령님의 치료의 손이 내주하신 것을 알았다.

 또 방언이 터졌고(여동생이 고등학교 때 수련회에 가서 방언을 했다고 이야기 하는데 영적인 일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여동생이 의지박약이라서, 기도에 집중했기 때문에,  혀가 꼬여서, 헛소리가 나온 것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사과하였다.) 

 기도할 때마다 축복과 감사의 기도가 나왔다.

 

 개천절 즈음.

 새벽에 엎드려 있는데 강화도 마니산 참성대에서 재를 지내는 하얀 옷을 입은 칠선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쌓아 놓은 돌단이 무너져 내리면서 커다란 바위같은 것들이 굴러 떨어졌다.

 

 깜짝 놀라서 깨어나면서 무슨 뜻인가를 내내 생각하였다.

 그때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였다.

 다만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길 것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것은 IMF가 오리라는 전조였다.

 

 동생이 엄마 환갑잔치에 참석했다가 병에 걸려서 아무 것도 못먹고 굶주리다가 하늘 나라로 갔다는 생각 때문에, 그때 수없이 굶주려서 쓰러져 갔던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면서 울고 또 울고 또 울었었다.

 

 '불쌍한 북한 동포 구원하셔서 평화통일 이루어 주소서.' 

 

 그때부터인가?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기면 알게 되기 시작하던 때가?

 

걍화도 마니산 참성단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마니산(摩尼山)에 있는 단군이 하늘에 제를 올리기 위해 쌓은 것으로 전하는 제단.

 사적제136호. 면적 5,603㎡. 전통시대 단군 관련 문헌기록에 의하면 단군이 제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으로 전해지며, 실제로는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서 고려·조선시대에는 국가제사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즉 단군이 366가지에 이르는 나라 다스린 공을 세우면서 아울러 제천의 대례를 행하고 뜻을 드높였던 곳으로 전해진다.

 이 제천의식은 1955년 전국 체전의 성화 채화를 계기로 부활되어 개천대제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매년 양력 10월 3일 개천절에 거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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