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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동행일기

부활절에 화를 냈다.

by 영숙이 2022.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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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에 화를 냈다.>

고린도전서 13:4-8 개역 한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어렵게 하는게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화를 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고린도전서 13: 4- 8절 사이의 내용을 반대로 하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어렵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고난주간동안 점심 금식을 하였다.

금식하면서 한가지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런 저런 생각에 끌려 다니고 유튜브나 넷플릭스 영화를 보면서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였다.

그래도 유일한 위안이라면 점심 금식을 하는 것이고, 예수 믿고 난 이후로 지금까지 지나온 과정을 살펴보면 확실히 화를 내는 빈도가 줄어 들었다는 것이다.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전같으면 충분히 화가 날만한 상황인데도 그냥 무사히 지나간다는 것이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1-16)는 성경귀절이 생각나면서 영숙이의 성품도 온유하게 변하는건가?

생각해보면 화를 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불편하게 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화를 내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또 얼마나 많이 화를 냈는지.

화 ~

화를 낸다는 것은 어쩌면 조상으로 부터 물려 받은 성품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학교 다닐 때에 그런 생각을 한적이 있었다.

영숙이의 본관이 천천히 서 인 것은 성품이 불같아서 천천히로 붙인 것이든지, 아니면 아주 느린 사람들이라서 천천히 서라고 붙인 것이라고,

영숙이의 성품은 불같은 성품을 물려 받은 것이라고.

제일 먼저 기억나는 것은 외할아버지가 화를 내는 장면이다.

뚱띵이 이모가 복숭아 과수원에 같다가 한밤중에 들어 왔을 때였다.

"이누무 가시나. 지게 작대기로 때려 **다. 머리를 빡빡 깎아서 다락에 가둬
서 대문 밖에 나가
지도 못하게 할거다. 어디를 싸돌아 다니다 이제 들어 와?"

옛날 어른 치고는 185센티가 넘는 기골이 장대한 장신의 할아버지가 고함치며 지게 작대
기를 흔들어 대는 것은 진짜 무서웠다.

또 한번은 영숙이가 중학교 1학년 때 소죽 끓이는 가마솥에 물을 뎁혀서 목욕을 할 때였다.

처음에는 따뜻한 물을 떠서 바껫쓰에 담아 씻다가 푸는 것도 힘들고 작은 바가지에 물도 너무 적어서 그냥 가마솥에 들어가서 씻었다.

한참 씻는데 외할아버지가 들여다 보시더니 벽력같이 화를 냈다.

"아니, 가마솥 바닥이 깨지면 어쩔라고 거기 들어가서 씻어? 씻기를? 빨리 안 나와?"

중학교 1학년이라 영숙이가 눈치도 없고 늦되었다고는 하였지만 사춘기인데다 선생님이 학교에서 때 검사를 한다고 해서 씻고 있는 중이었다.

나름 혼자 물도 뎁히고 혼자 씻고 있는 것을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부엌 문 밖에서 안을 힐끗 들여다 보던 외할아버지가 정식으로 뒷짐을 지고 고함을 지르니까 너무 부끄러웠다.

평소에는 말이 없고 조용하시던 영숙이 엄마는 아이들한테나 집안에서 큰 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엄마는 말이 없었지만 늘 많은 생각에 잠겨 계시던 분이었다.

그런 엄마하고 초등학교 6학년 때인가?

군서면에 살 때였다.

추석을 얼마 앞두고 옥천 장날에 시장에 갔었는데 시장바닥에서 장사하는 사람한테 미친듯이 고함을 지르며 화를 내는 것이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여? 어디다 대고 속이길 속여? 응? 내가 촌에 산다고 촌년으로 보여? 사람 웃읍게 보지말라구."

사실 정확한 내용은 모른다.

기억나는 것은 뭔가 무시를 당했는지는 모르지만 화를 내는 것을 본적이 없던 엄마가 '저렇게 화를 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에 놀랐던 일이다.

아버지.

아버지는 늘 화가 차 있는 사람이었다.

세상에 대해 울분이 가득했고 항상 술에 취해 집에 들어 오
셨고 술 주정을 하셨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하신 적이 없다.

관심도 보이지 않으셨다.

우리 5형제 누구도 아버지한테서 좋은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고, 형제 자매 누구한테도 특별한 배려를 하신 적이 없었다.

영숙이에게 새겨진 아버지의 이미지는 술주정과 돈계산과 윽박지름이었다.

외갓집에서 크다가 아버지랑 군서에서 살 때 초등학교 5학년인가 6학년이었는데 또돌이랑 싸운다고 헛간에 끌려가 매로 얼마나 맞았는지 동네가 떠나가도록 울면서 빌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싸울께요. 아버지, 잘못했어요. 안싸울께요."

너무 아파서 두손을 싹싹 빌면서 그렇게 헛간에서 맞고 나온 다음에는 또돌이가 매를 맞았다.

또돌이가 매를 맞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들으며, 울면서 눈물을 팔로 닦아훔쳐내고 있는데 집 대문간에 동네 애들이 잔뜩 모여서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서 아버지가 제일 무서웠다.

100미터 전방에 보이면 무조건 폴더로 인사를 했다.

사실 그때 그렇게 맞은 것은 엄마가 아버지한테

"재들 날마다 싸워요."

하고 말한 탓이었고, 그 이후로 놀란 엄마는 우리들 이야기를 아버지한테 절대로 하지 않았다.

우리 5형제는 사춘기를 지나면서 아버지랑 갈등을 겪었고 따뜻하게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세상으로 나가야 할 준비를 해야 하는 대신에 '불통' '억지' '힘' '억누름' '술주정'을 받아야 했다.

아버지는 한마디로 '나뿐'인 사람이었다.

엄마에게 따뜻하게 대할 줄도 몰라서 엄마는 그렇게 쌓인 불만을 아버지에 대해 안좋은 이야기로 우리에게 말하여 해소하였고 우리는 아버지에 대해 더욱 더 안좋은 이미지만 마음 속에 쌓아갔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그나마 우리가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경제적 능력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아버지는 정말 싫은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아버
지는 그 시골 깡촌
에서 유일하게 중
학교까지 다녔고, 공무원이었고 나름 짊어진 짐이 많았었
다.

너무 없는 집안에서 그나마 집을 일으키
려고 평생을 애쓰셨
던 것이다.

또한 아버지도 아버
지의 아버지 그러니
까 할아버지한테 사랑이라는 것을 배운 적이 없었던 것이다.

엄마 말로는 할아버
지는 '숙맥'이었다고 표현하셨는데 정확히 어떤 분이셨는지는 모른다.

아버지의 엄마, 할머니는 두번째 부인이셨고 첫번째 부인은 딸 하나를 낳았고 할머니는 아들 셋을 낳으셨
는데 아버지가 막
내였다.

모든 집안 대소사를 할머니가 해결하셨
다고 한다.

제일 큰 아버지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자녀들을 8남
매를 두셨는데 우리
는 자주 큰 집에 가서 성장기의 사촌들이랑 한번씩 얼굴을 대했
던 것 같다.

둘째 큰 아버지는 일
찍 혼자 되셔서 1남 2녀의 자녀들을 학교 도 보내지 못할 정도
로 무능하셨는데 아
버지는 둘째 큰 아버
지에게 군서에서도 살게 하고 대전에도 가게와 부인까지 얻
어 주었지만 잘 운영
을 못해서 그때마다 정리하고 큰 집 옆에 가서 살고는 하셨다.

아버지는 부모의 사
랑이라는 것을 제대
로 배우지 못한 것 같
고 그것을 그대로 우
리 5남매에게 전수 하
신 것이다.

엄마도 엄마의 아버
지인 외할아버지가 어린 나이에 큰 여관
을 하던 부자 큰집에
서 형님 부부한테 여
동생하고 맨몸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이집 저집 친척 집을 전전하면서 공부를 하는 대신 머슴으로 성장하여서 당신 혼
자 힘으로 집안을 일
으키느라 애를 쓰셨
던 분이다.

딸 4명을 멕이고 키
우고 시집 보내고 하
나뿐인 아들을 교육
시키느라 노심초사
하셨고 자녀들에게 사랑을 표현할 기회 나 있었을까나?

2년 전인가?

엄마가 이렇게 말씀 하셨다.

"나도 외할아버지한테 사랑 받고 커본적이 없어
서 귀히 여기는게 뭔지 잘 몰랐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쌀 퍼내서 엿사먹다가 외할아버지한테 혼
나고 집에 있는 돈 가
지고 물건 사다가 혼
나고 외할머니는 한
마디로 '숙맥' 이었
으니."

결론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한 영숙이 부모님 덕에 영숙이를 비롯한 우리 5형제도 부모의 사랑이 무언지 잘 모른채 성장 한 것 같다.

사랑을 잘 모르고 성장한 우리는 결국 원만한 생활을 못한 것 같다.

또돌이는 현재 올케와 별거 중이고 올케는 또돌이와 이혼하려고 변호사를 사서 이혼 소송 중이라고 한다.

또돌이는 아이들과도 연락 두절인채 살고 있다.

그 다음 여동생은 대학 캠퍼스 커플로 8년 7개월 연애해서 결혼 한 다음 잘 지내고 있다.

그나마 제일 원만한 성격이어서 그런 것 같다.

셋째는 하늘에 별이 되었다.

넷째는 남편과 이혼한 다음 다른 남자와 결혼 안하고 동거 중이다.

영숙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지내온 것 같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살아온 것 같다.

한번씩 마음에 안들면 미친듯이 화를 내는 것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품이고 애써 변명하자면 아버지의 사랑을 못받아서라고 말하고 싶다.

매년 고난 주간 때마다 점심 금식을 했었고, 영숙이보다 더 영숙이의 속마음
을 아시는 성령님
께서 그때마다 필요
한 은혜를 주셨다.

목요일 점심 금식 때 저녁 5시라고 음료수를 마시면서 시계를 보니 10분전 5시였다.

먹을 음식 준비를 10분 동안 한 다음에 5시에 먹는다고 생각 한 것을 시간이 다 되었다고 착각한 것이다.

어쩔 수 없어서 금요일 5시 넘어까지 금식을 하였다.

무사히 토욜까지 금식하고 주일인 부활절 새벽기도를 한다고 해서 나름 평소에 잠드는 2시보다 1시간 땡겨서 자러 갔다.

자다 보니 철희가 일어나서 돌아다니길레

"지금 몇시야?"

"4시 반."

아직 일어나려면 30분 남았다고 생각하고 잠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자다보니 날이 너무 환하였다.

"아니, 이거 새벽기도 시간 지난거 아냐?"

벌떡 일어나면서 교회에 갈때 입는 윗옷을 들고 거실로 나오면서 시계를 보
니 5시 25분이었다.

영숙이도 모르게 화를 내고 있었다.

윗옷을 바닥에 팽개치면서

"오늘이 부활절이란 말야."

작은 방에서 컴퓨
터를 하고 있던 철희
가 놀라서 눈을 동그
랗게 뜨고 작은방에 서 뛰쳐 나왔다.

"떽떽이(모닝콜)가 안들렸어. 자기가 껐어?"

" 안껐어."

"자기가 안껐으면 왜 안울렸어?"

" 미치고 환장 하겠
네. 안울렸어."

그때야 생각났다.

부활절 날은 주일이고 우리 교회는 주일 날 새벽기도를 안해서 떽떽이를 안 켜놓았다는 생각이 났다.

그러니까 떽떽이가 울릴턱이 없었다.

"아, 미안. 미안. 떽떽이를 안켜놓았네."

지금이라도 가자 싶어서 서둘러 옷을 입고 차를 타러 갔다.

가면서 화를 냈던 자신에게 또 실망했다.

많이 온유해지고 화도 안내는 스스로에게 '참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이 한순간에 와르르 ~

부지런히 갔더니 아직 목사님이 설교 중이셨다.

맨뒤에 조용히 앉았다.

많은 생각을 하고, 반성을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영숙이의 성품은 화를 안내고 참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여기까지 온 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새벽기도 마치고 집에 와서 밤새 끓였던 곰솥을 들여다보니 철희가 그 사이에 곰솥에 떠 있던 기름을 국자로 전부 걷어서 한그릇이 가득 담아 놓았다.

정말 미안했다.

부활절 새벽에 벌컥 화낸 것이.

다시 한번 깨닫는다.

철희는 영숙이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배필로 하나님이 보내준 사람이라는 것을.

철희의 온유한 성품이 불같은 영숙이의 성품과 가장 잘 어울린다는 것을.

"미안해. 미안해. 부활절에 화 내서 정말 미안해."

(미안한 마음에 철희
한테 부활절 날 나름 애교와 서비스와 스킨 쉽을 영숙이의 한도초과까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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