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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칼럼/국내여행

물을 찾아서 (영동군)

by 영숙이 2022.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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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찾아서(영동군)>

영동역 ~

영숙이가 7살 때.

학교가 끝난 오후에는 기차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영동역으로 갔다.

엄마가 기차 타고 청주에서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

매번 실망했다.

개찰구에서 나가는 사람의 표에 구멍을 내주고 들어오는 사람의 표를 받는 역무원 맞은 편 석조로 만든 출입구에서 한사람 한사람의 얼굴을 살폈다.

"누구 기다리니?"
"엄마 기다려요."
"이제 다 들어왔는데 오늘 안오시는가 보다."
"네."

영숙이 키보다 조금 작은 높이의 턱에 손과 얼굴을 올리고 마지막 사람까지 살피고 나면
역무원과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렇게 표를 검사하는 역무원 곁을 떠나 영동역 출입문 유리창이 있는 어둡고 진한 고동색 나무 문에서 역광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는 했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기다리는 집을 향하여 종종 걸음으로 광장에서 사라지고는 하였다.

그렇게 바라보다가 역앞에 있는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왔다.

때로는 서산에 붉은 해가 넘어 가고  온통 노을빛으로 젖어 있는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방문을 열면 아무도 없는 방안.

영숙이가 아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고 영숙이를 아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는게 이상하게 여겨졌다.

그렇게 방안에 오두커니 혼자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저녁 어스름이 내려오면 옆집에 사시는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작은 소반에 밥, 김치, 된장국,물, 수저와 젓가락을 받쳐들고 나타났다.

그렇게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자고 일어나는 아침이면 또 아주머니가 작은 소반에 밥, 된장국, 김치, 물, 젓가락 수저를 담아가지고 왔다.

때로는 국이 없으면 물에 말아서 김치랑 먹었다.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가방을 챙겨매고 학교를 갔다.

그때문인지 성장하는 동안 영숙이 꿈속에 종종 나타나던 영동역을 잊을 수가 없다

이제 59년이 지나서 영동역을 방문했다.

마침 철희가 고향인 무주에서 동창들을 만나러 간다해서 가는 길에 영동역에 내려 달라고 한 것이다.

영동역.

기차가는 시간표를 올려다보고 사람들이 앉아 있는 역사를 둘러 보았다.

기차표를 파는 자동판매기가 2대 있다.

영숙이가 7살 때 보았던 영동역은 정말 넓었다.

이렇게 작은 역이 아니었다.

역도 크고 역광장도 크고 거리도 넓었다.

7살의 작은 아이 눈에는 모든 것이 다 커보였다.

지금 보니 역사도 아담하고 역광장도 자그마하고 거리도 정말 작은 거리다.

지방의 작은 읍내.

관광안내소에 들렸다가 거리를 따라 내려오면서 예전에 살던 집이 있을까 기웃거렸다.

거리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흙으로 된 작은 골목길이 있었고 골목길 옆으로는 풀로 된 둑이 있었다.

그때는 집으로 가는 길 옆 풀로 만들어진 둑에 작은 라일락도 피어 있고 나팔꽃도 보였었다.

풀로 된 둑으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나무도 만든  집, 작은 아이 눈에도 작은 집에 들어 가고는 했다.

지금은 전부 벽돌로 만들어진 신식집 뿐이다.

대부분이 역앞이라서 가게로 이루어져 있다.

길을 따라서 내려오니까 영동중학교와 영동고등학교가 있고 바로 옆이 하천이다.

영숙이가 자주 꿈속에서 만나고는 했었던 커다란 강가가 아니다.

하천에서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엄마 나, 지금 영동이야."
"엄마가 지금 86이니까 26살 때 살던 동네네."
"그래? 기억이 안나네."
"여기 하천이 있는데 기억이 안나?"
"응. 생각이 안나."
"여기저기 다니다가 저녁 늦게 자러갈께. 기다리지 말고 저녁먹어요."
"응."

영숙이가 입학했던 영동 초등학교와 아버지가 근무하던 영동군청을 찾아 가기로 하였다.

영동 초등학교.

한 학년에 4개반씩 약 100명씩이라고 한다.

6학년은 5개반이라고 하니까 여기도 아이들이 줄고 있는 것이 맞다.

영숙이가 입학할 당시에는 운동장에 입학하는 아이들이 가득 차서 바글 거렸었다.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입학식을 마치고 엄마와 함께 사진관에 가서 기념 사진을 찍던 기억이 난다.

엄마하고 같이 찍어도 됐었는데 엄마는 왜 영숙이만 찍어 주었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을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했고 또 여학생들을 만나서 영숙이 이야기를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크리스마스에 학용품 준다고 해서 교회에 갔었거든. "
"나만 안주길레 손을 들고 물었지."
"왜 저는 선물 안주나요?"
"다음 주에 오면 줄게요."
"다음 주가 1월 1일 신년이어서 다같이 합동예배를 드렸어."
"교회 벽에 써있는거야. 구하라. 구해질 것이요."
"무슨 소리지?"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설교를 하다말고 에이 모르겠다 말하면서 구하라는 것은 기도하라는 것이고 구해질 것이요 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거야."
"아하 ~ 구한다는 게 그런 거구나."
"중학교 붙게 해주셔요."
"고등학교에 합격하게 해주셔요."
"중학교 때부터 선생님 되게 해주셔요. 공부도 그냥 보통 아이들만큼 밖에 못하는데도 그렇게 구했던거야."
"고등학교때 친하고 싶었던 친구가 있었는데 친구가 되었지."
"그 친구따라 교회를 갔었어."
"결론은 선생님이 되었어."

아이들이 헤어지고 싶어하는 얼굴이 되어서 급히 말했다.

"너희도 구해봐. 그리고 예배드리면 더 좋구."

아이들과 헤어져서 군청을 찾아가는데 영동역에서 떠나 영동 시내를 한바퀴 돌아서 영동군청을 앞에 두고 무인카페로 들어와서 지금 티스토리를 쓰고 있다.

강렬한 햇볕에 얼굴도 따끈따끈하고 뚜벅이도 힘들고 ~

예쁘고 조용하고 시원한 무인카페에 들어앉아 자몽쥬스 한잔 하면서 티스토리를 작성하고 있다.

이제 기운 차리고 다시
뚜벅 뚜벅 ~

작은 오토바이라도 아니면 작은 전기 자전거라도 빌려도 부르릉거리면서 다니고 싶은 마음 굴뚝 ~

그냥 뚜벅 뚜벅 거려서 배도 꺼트리고 2만보 걸어서 밤에 잠도 잘자고 또 뚜벅이로 다니다 보면 차를 타고 다니면 보지 못하고 스쳐지나가는 것들도 챙겨 보게 될지도 모른다. 

맛있는거 먹을라해도 배가 꺼져야 먹을텐데.

아무튼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빈들거리며 돌아다니는게 너무 좋다.

7살 영숙이.

혼자서 영동역에서 기다렸을 때부터, 그리고 혼자서 밥먹고 잠들고 학교 다닐 때부터,
혼자라는 걸 무서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역쉬 제일 좋은 것은 누군가와 동행하는 것.

혼자라는 것도 좋고, 누군가와 동행이라는 것도 좋고,

그중에서 제일은 역쉬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영동 군청을 갔다가 물을 찾아서 영동에 있는 강가를 가봐야겠다.

심천의 강과 이어진 영동의 물을 찾으러 가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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