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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City life of JINNSSAM

City life of Jinnssam

by 영숙이 2022.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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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life of Jinnssam

 

1. 여샘들 분파       

 

 어떤 조직이든지 오래된 조직은 구성원들이 개인의 세력을 형성하기 마련이다. 

 좋은 뜻일지 나쁜 뜻일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속성인 것 같다.

 

 당시 사립학교 한 곳에서 오래 근무하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친한 사람과 덜 친한 사람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여선생님들이 전체 70여명의 선생님들 중에서 절반 이상을 차지하니까 그 절반의 여선생님들이 연세가 많으신 선생님을 필두로 두부류로 나뉘었다.

 

 가정과의 호선생님은 천안에서 오신 객지파였고 영어과의 조 선생님은 주로 울산에서 성장하신 분들로 울산파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던 것이 아무래도 친한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자신의 성향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호선생님을 따르는 분들은 Jinnssam의 선배님과 선배님과 친한 박선생님 거기에 박선생님과 친한 박선생님 후배들 그리고 새로 오신 신규 선생님들이 많았다.

 

 조선생님을 따르는 선생님들은 나름들 울산에 기반을 마련한 분들로 대표적으로 친정에 부동산이 많다고 항상 자랑하시던 국어과의 기선생님, 남편이 대형회사의 임원이신 역사과의 여선생님 그분들과 친한 선생님들이셨다.

 

 대표를 맡고 계신 분들의 성향은 여러가지로 달랐다.

 

 우선 호선생님은 실속파라고 할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실속을 챙기는 경우로 브랜드나 명품보다는 알뜰살뜰 저축을 하는 성향이었고

 조선생님은 예의파로 서울의 유명 여대를 졸업하신 분으로 예의를 엄격하게 따졌다.

 

 그러다보니 그분들의 삶에서도 그러한 성향이 나타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지금 돌아보면 어떤 분의 어떤 생활 태도가 좋다 나쁘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호선생님은 저축으로 부산에 빌딩을 마련하였지만 연세가 드시고 공립에서 같이 근무할 기회가 있었는데 학생들에게 광고목적으로 제공되는 생리대를 개인 사물함에 산더미처럼 가지고 계셨다.

 

 "선생님 이게 뭐예요?"
 "선생님은 이제 mens를 안하시잖아요."
 "응, 내가 필요해서."

 "선생님. 달걀을 여기에 두고 잊으셔서 뭐가 생겼네요."

 

 이후에 선생님은 Jinnssam을 시켜서 전에 사학에 같이 근무하던 선생님들과 조우하고 모임을 가지려 했지만 결국은 와해되고 말았다.

 서로의 성향이 달라서 모임이 계속되지 않았던 것이다.

 

 영어과의 조선생님과도 공립에서 같이 근무한적이 있다. 

 수업하시는 것을 복도를 지나다가 들은 적이 있는데 영어 발음이 천천히 ~ 천천히 ~ 슬로우 ~ 슬로우 탬포였던 기억이 난다.

 우아하셨지만 입고 계신 옷들이 예전처럼 브랜드가 아니고 동네 양품점 옷이라고 말씀 하셨다.

 

 은퇴후에 백화점에서 만난적이 있다.

 여전히 연세가 드셨는데도 우아하게 다리를 옆으로 모아서 앉는 포즈를 취하고 의자에 앉아 계셨다.

 

 그렇지만 가난은 숨긴다고 숨겨지는게 아니다. 

 지금도 예전에 하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내가 아이들 3명을 서울 유학 보내느라 일년에 아파트 한채를 팔아서 올려 보냈어요."

 

 물론 딸 2명은 선생님처럼 서울의 명문 여자 사립대를 나왔고 아들은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을 나왔다. 

 

 두분의 성향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다.

 

 호선생님은 아이들을 부산에 있는 지방대학에 보냈었다.

 은퇴 후에 울산에 있는 H회사에 근무하는 아들하고 아파트를 마련해 함께 사셨는데 평생 한량이셨던 남편님이 경제권을 요구하셨는데 거절하셨고 그로 인해 안좋은 소문이 들려 왔었다.

 

 조선생님을 따르던 선생님은 10여분. 

 호선생님을 따르던 선생님들은 20여분 정도였다.

 모임도 따로 했고 서로에 대한 안좋은 이야기가  모임의 주요 이야기 거리로 모임의 안주거리였다.

 오랫동안 함께 근무하다보니 서로에 대해 속속드리 아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 교무실에 있으면서도 친한 사람끼리 모여서 차를 마시거나 휴게실에 모여서 점심을 먹고 가쉽거리가 생기면 친한 사람들끼리 주고 받았다.

 

 신발장에서 신을 꺼낼 때면 까마득한 선배의 신발장은 맨 위에 있어서 언제 맨 밑에서 맨 위의 신발장에 신발을 넣게 될까 생각하고는 했었다.

 

 선배선생님들에 대한 깍듯한 예우를 했었다.

 저절로 예우를 해드릴 수 밖에 없는 분위기도 있었다. 

 

 처음 공립으로 넘어가게 되고나서 여선생님들을 전부 양호실에 모아서 조선생님이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생각난다.

 공립이라서 새로 발령 받은 선생님들도 많았었다.

 

 "선생님이 되어서 청바지를 입는 건 있을 수 없어요."
 "학교에 청바지 입고 오는 건 자제하세요."
 "귀에 커다란 귀걸이를 달고 다니다니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예요."
 "여선생님으로서의 품위를 지키셔요."   

 

 특히 새로 발령 받은 한 여선생님을 노골적으로 지적하셔서 그 선생님은 많은 여선생님들이 모인 곳에서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었다.

 

 그후 공립학교에서 근무하다 보니 그 시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사립에서 공립으로 넘어가니 사립일 때와  공립 일때의 근무 태도가 저절로 달라졌다.

 사립에서는 실기 시험 종이가 남으면 내년에 쓸거라고 캐비넷에 보관하고는 했었다. 

 공립으로 넘어 오니까 내년을 위하여 남겨 두는 일은 없었다.

 

 모두들 최대 4년이나 그 이전에 새로 발령을 받아 학교를 옮기게 되니까 사립때처럼 깍듯한 예의가 있을 수도 없었다.

 무언가 잘못되면 나이나 선배 불문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지적 당하고 수정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본인이 맡은 업무는 철저하게 해내야 했다.

 누가 대신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어찌보면 인간미가 없을 수도 있어 보이지만 그만큼 능력있는 선생님들이 모이는 것이다. 

 

 그래도 친한 선생님은 있기 마련이다. 

 그 친하다는 건 새로 발령받아서 다른 학교로 옮기기 전까지만 해당한다.

 

 Jinnssam이 은퇴하고 보니 맛집 점심 때에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남편님들은 회사에서 근무하는 젊은 여성들이 가득 가득 모여서 넘쳐난다. 

 거의 전부다 여자분들이  맛집을 차지하고 남성들은 한두사람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다.

 

 

 직장 생활하는 여성은 일하느라 바쁘고 평일에 맛집에 올 시간이 없다.

 주말에는 아이들을 돌봐야하고 밀렸던 집안일이나 미루어 두었던 집안행사를해야하기 때문에 따로 시간을 낼 틈이 없기 마련이다.

 돈 쓸 시간이 없다.

 친구를 만들 시간이 없다.

 직장 동료가 전부인데 샘들 같은 경우에는 직장 동료가 길어야 4년마다 바뀐다고 생각하면 직장 동료도 길게 가지 않는다.

 

 그래서 여선생님들이 은퇴하면 같이 놀거나 어울릴만한 친구들이 없다.

 Jinnssam같은 경우는 학교 ~ 집 ~ 교회가 전부였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 외에는 순수한 친구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성격도 한몫하는 것 같다.

 이건 남자들도 마찬가지인 듯.

 

 베이비 붐 세대가 1700만이고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하게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친구를 만들어가기가 쉽지 않은 이유인 것 같다.

 

 또 하나는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 농촌이다 보니 은퇴하면서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들어간 경우다.

 그동안 생활했던 생활기반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터전인 시골살이를 가는 것이다.

 

 울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두동 골짜기에 비싸 보이는 전원주택이 잔뜩 모여 있는 곳이 있다.

 그곳에 은퇴하신 분들이 많이 모여 산다.

 

 지금 돌아보면 사학 때에 매일 학교에서 만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근무하면서 서로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들을 은밀히 주고 받았던 일들을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온다.

 그래도 그때에는 그것이 전부인 세계였다.

 또 자신의 성향도 있겠지만 알게 모르게 그분들의 영향을 받는 것도 있었다.

 

 지금은 모두들 어디에 계실까?

 요양원에 계시는 분들도 있을테고 또 돌아가신 분들도 있고 지금 살아계시다면 90이 넘었을 나이다.

 인생 100년이 길고 긴 것 처럼 보여도 그리 길지 않고 젊은 시절의 도시 생활은 더 짧았던 것 같다.

 하물며 아가씨 시절의 도시 생활은 더 말할 필요가 있으랴.

 

 그런 모든 과정에도 지금 이글을 이렇게 쓸 수 있다는게 제일 감사하다.

 

 어제 저녁에는 지상파 방송에서 드림 호스라는 영화를 보았다.

 그중에서 이말이 가장 깊이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기대할게 필요해 ~ "

 

 결혼을 안하신 은퇴 전의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갈 곳이 있다는게 너무 감사해요. ~"

 

  지금 이말을 이렇게 바꾸어 말한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오늘은 무엇을 쓸까 생각하는게 정말 감사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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