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순과 신입사원>
- 노명숙, (주) 한국제지 총무과장. 처용수필 제2호 1996. 겨울 -
모처럼 따스한 햇빛에 화단의 색바랜 잔디가 융단 같은 포근함을 주는 것 같다. 내년 봄이면 저 포근함 속에서 반짝이는 파란 새싹이 움트겠지? 눈을 들어 화단 가장자리에 줄지어 선 배나무에 시선이 머무는 순간 "아" 나도 모르게 손에 든 커피잔이 흔들림을 느낀다.
모양이 일그러진 잎사귀와 나무에 매달린 채 말라 버린 나뭇잎 사이로 빠알갛게 새싹이 보이는 것이다.
이제 추위가 시작되는데 계절도 모르고 피어난 새싹의 무모함이 안타깝지만 한편으로는 며칠 전 입사한 신입사원들에게 해준 얘기가 생각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나간다.
최충우돌, 천방지축, 질문도 많고 무슨 무슨 시리즈도 많고 새모자, 새신발, 새 작업복, 속의 웃음들이 꼭 저 배나무의 반짝이는 빠알간 새순 같다.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 화원과 같은 학교, 특수 집단인 군대를 나와 본인이 선택하고, 또 선택받은 직장이라는 조직 속에서 동료들과의 인간관계, 새로운 업무의 어려움과 두려움들을 헤쳐나가는 과정이 저 배나무와 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봄의 꽃샘바람 속에 화사하게 꽃잎도 흩날리고, 뜨거운 여름날의 뙤약볕에 힘들어 하다가도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나기에 온몸으로 환희하고 서늘한 가을 무성한 잎사이로 생긴 모양도, 크기도 제각기인 결실의 열매를 보여주는 -
몇 년전 우리가 처음 온산이라는 곳에 내려와서 건설 작업을 시작할 때 주변에는 배나무 과수원이 많이 있었다.
과수원의 주인은 이미 땅을 팔고 이사를 갔기에 배나무들은 임자가 없었다. 우리는 그 배나무를 캐다가 정문 입구에서부터 사무실 앞 화단까지 일렬로 심어 놓고는 봄에는 꽃 보고 배가 익으면 사원들의 디저트로 하자며 좋아했었는데, 우리의 기대가 너무 컸는지 그해에는 잎도 많이 나지 않고 더더욱 꽃은 빈약하고 배는 열리지 않고.
우리의 욕심많은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배나무 잘못 심었다고 안달하는 나에게, 이 지방이 고향이신 아저씨께서
"염려 마세요. 지금 뿌리를 내리는 중이라서 그러니 내년에는 괜찮을, 겁니다."
하시는 것이다.
그 이듬해 정말 잎도 무성하고 하얀 꽃도 너무 예쁘게 무리지어 피어나 전 사원들의 찬사를 끌어내더니 배가 너무 많이 열려 솎아 내고 봉지를 씌워 주느라고 며칠을 직원들이 부산했었다.
배맛이 들고 부터는 며칠 새 다 없어지긴 했지만, 그러고는 해마다 거름도 주고 약도 쳐주니까 지금처럼 저렇게 큰 나무가 된 것이다.
그때부터 신입사원들이 들어오면 꼭 해주는 얘기가 있다. 전체가 남자 사원들인데 그들을 보고
"여러분은 지금 회사에 시집을 온 것입니다."
하고 시작하면 모두들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그래서 나는
"저 창밖의 배나무를 보세요. 저 배나무는 몇 년 전에 시집온 배나무 입니다. 시집 온 첫해에는 뿌리가 뻗어 나가는 땅에 진흙도 나오고 자갈밭도 있고 또 어떤 뿌리는 바위에도 막히고 하니까 그 뿌리를 정착시키는데 온 힘을 쏟아 제대로 잎도 피워 내지 못하고 꽃도 피지 못했지만 뿌리가 다 제자리를 찾고 정착을 하고 보니 이듬해부터는 꽃도 피고 열매도 맺었습니다. "
여려분들도 저 배나무와 꼭 같습니다.
처음온 이곳에 뿌리를 내리기 위하여는 인내와 무수한 가슴앓이가 있어야지, 조그만 일에 좌절하고 포기해 버리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꽃도 피우지 못하고 성공이라는 열매는 더더욱 맺지 못합니다.
점심식사를 마친 사원들이 얘기를 나누며 배나무 밑을 지나간다. 창문을 똑똑 두드리니 전체의 얼굴이 똑같이 이쪽으로 돌려진다. 배나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니까 그 중 한명이 낙엽을 가리키며
"따드릴까요?"
고함을 지른다.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으니 그럼? 하는 눈빛들을 향해
"새순을 보라고"
하고 외치니
똑같이 내가 처음 했던 탄성
"아, 새순이 나왔네요. "
"닮은 것 같아서 새순과 신입사원."
"새순과 신입사원 맞는데요."
싱그런 웃음소리들이 따스한 햇빛 속에 녹아든다.
◐ 위의 글은 글쓴이의 혜안이 돋보이는 글이다. 인생 살이를 자연에 빗대고 자연처럼 적응해 간다고 표현해 낸 것은 정말 대단하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 60대가 되고 보니 그때는 그게 최선이고 전부였다고 알았던 어렸을 적이나 또 젊었을 적에 가졌던 인생에 대한 인식들이 얼마나 보잘 것 없었던 편견이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어렸을 때 떠났던 군서면 상지리에 살고 있는 초등학교 동창생들을 둘러보면 다들 어디서인가 자리를 잡고 삶을 일구어 낸 것을 본다. 우리 모두는 결국 자연 속에 살면서 자연의 일부로 살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자연을 지으신 이도 하나님이시니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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