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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 생태 탐방로>
<억새 생태 탐방로>
잊을 수 없는 제자.
초임발령을 받고 23살짜리 아가씨가 처음 맡은 반에 있던 아이였다. 입학성적이 좋아서 성적 순으로 임시반장을 뽑았을 때 친해지게 되었다.
순수한 아이였다.
깔깔깔 해맑은 웃음을 웃을 줄 알고 어려운 환경에도 전혀 표시 없이 잘 지내는 아이.
그때 정식 반장으로 뽑힌 아이는 유머가 넘치는 철저한 야당이어서 아이들에게는 인기가 좋았지만 초임이었던 영숙이에게는 다루기 힘든 아이였다.
선생님들이 하는 일에도 언제나 잣대를 들이밀고 아이들을 좌지우지 하더니 졸업 후에도 취직해서 다니던 온산 공단을 그만두고 울대에 입학해 데모를 하다가 데모하는 남편을 만나서 울산 어떤 회사가 환경파괴를 하면 친척과 가족 모두 동원해 회사 앞에서 피켓들고 데모하다가 회사에서 수습하면 그걸로 생활하는 환경협회 총무로 남편은 환경협회 회장으로 살고 있다.
그때 부반장은 피부가 하얗고 키가 큰 미인이었는데 언니랑 형부랑 같이 살면서 삶이 힘든지 언제나 그 예쁜 얼굴에 시니컬한 웃음을 띄우고 있는 아이였다.
한번은 남아서 시험지를 매기라고 했더니 초등학교 때부터 하도 해서 신물이 난다며 초스피드 광탈로 시험지를 처리하고는 가도 되냐고 물었다.
역시 성적이 좋아서 온산 공단에 있는 회사에 사장 비서직으로 들어 갔는데 후일담을 들어보니 같은 회사에 한 남자가 끈질기게 따라 다녀서 결혼을 했는데 결혼 하자마자 시골 시댁에 데려다 놓고 돌아보지 않아서 이혼하고 딸하나 데리고 울산 시내에서 혼자 살다가 재혼하였다 한다.
고등학교 1학년 이었지만 그때 그 아이들이 보여준 삶의 태도에서 그때부터 그 아이들의 인생이 결정 되었다고 생각한다.
영화.
죽은 깨가 살짝있는 얼굴로 듬성듬성 떨어져 있는 이빨을 내놓고 귀엽게 웃던 아이.
너무나 순수해서 어디 나무랄데가 없는 아이였다.
3년 내내 소풍 때면 영숙이의 김밥을 싸와서 다른 선생님들이 놀리고는 했었다.
"영숙이 선생님 점심 굶을까봐 싸왔어?"
한번은 2월이었는데 유난히 추운 날씨였다. 자취하는 방문을 누군가 '똑똑똑' 두드렸다.
울산 역 근처에 사는 영화와 영숙이네 집 근처에 사는 정희였다.
"무슨일?"
"선생님. 떡 가져 왔어요."
"응?"
영화는 품에서 따끈따끈한 시루떡을 내놓았다. 방금 쪄서 김이 오르는 팥 시루떡.
"집을 몰라서 정희랑 같이 왔어요."
"아니,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내일 학교에서 주면 되지. 뭐하러 이렇게 왔어? 버스도 2번이나 갈아 타야하고 공업탑에서 내려서 걸어왔을텐데."
"내일 먹으면 굳어서 맛이 없을까봐요. 따뜻하게 맛있을 때 드시라고 가져왔어요."
영화를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따뜻해지는 아이였다. 뭐가 제대로 없던 시절 자취방을 떠돌던 영숙이에게 따뜻한 손난로 같은 아이였다.
졸업 후에도 한번씩 만났었다.
온산 공단에 취직해서 다닐 때에는 공업탑에서 만났었고 영화가 피아노 교습소를 오픈 했을 때는 교습소를 찾아 가기도 했었다.
영숙이도 결혼하고 또 다른 제자들도 계속 생기고 각자의 생활에 바빠서 서서히 옛날 제자가 되어 갔다.
초임때 반장하고 연락이 닿아서 아이들 전화 번호를 받았는데 영화의 전화번호가 있어서 무척 반가웠다.
마침 영숙이가 근무하는 학교 근처여서 전화를 한다음 찾아 갔다가 충격을 받았었다.
아름다운 성에서 여왕으로 이쁜 공주와 왕자를 키우면서 살고 있었다. 아름다운 성은 4층짜리 빌딩인데 1층과 2층에는 유치원이 3층에는 피아노 학원이 4층에는 살림사는 집이었다.
영화는 막 40이 된 나이라서 어려웠던 친정을 생각하면 본인이 해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너네 시댁 빵빵한가 보네. 시댁에서 이 건물 지어 줬구나."
"제가 사놓은 땅위에 시댁에서 남편 몫으로 떼어 준 돈으로 건물을 올렸어요."
"그래? 좋겠다. 남편은 어떻게 만났어?"
"회사 다니다 공부하려고 대학에 입학했는데 그때 미팅에서 만났어요. 10년도 넘게 남편이 내가 하는 피아노 교습소에 들락거리면서 알고 지냈는데 서로 마땅한 사람도 없고 그러다가 결혼 하자는 말이 나와서 시댁 식구 만나러 제주도에 갔었거든요. 시아버지라는 분을 만났는데 무슨 국회의원 같은 거예요. 남편이 명절때 제주도 집에 다녀오면 피아노 교습소에 감귤상자를 들고와서 제주도에서 감귤 농사 짓는 농부쯤 되나부다 생각했었거든요."
"화장실 가는데 같이 나오신 아주버님이 - 우리 아버지 제주도 도지사 - 인거 아느냐고 말하더라구요."
"아버님이 결혼을 반대했어요. 며느리들이 전부 이화여대 출신이고 우리 집안은 불교 집안이라 기독교 며느리 볼 수 없다고 전화를 하셨더라구요. - 알았습니다. 아드님 데려 가셔요. - 그렇게 5년 지나서 아버님이 결혼 허락 하셨어요."
"감귤 밭이 5만평이래요. 재산 분배할 때 남편 몫이라고 남편 이름으로 명의변경해서 등기필증 보내왔는데 도로 돌려 보냈어요. 저는 제가 할도리를 하고 싶어서 시부모님도 부모님이시니까 매달 10만원씩 통장에 넣어 드렸어요. "
"왜 받지. 부동산은 3대가 덕을 쌓아야 생긴다더라. 보내온걸 굳이 돌려 보낼 필요까지야 없지 않았을까?."
"남편이 부자인줄을 지금도 회사 사람들 아무도 몰라요."
대단한 남편과 연애를 해서 재벌까지는 아니어도 준재벌 집으로 시집을 간 것이다.
만나고 돌아오면서 멍해진 머리 속으로 영화가 그렇게 복을 받은 것은 영화의 순수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10년 이상 피아노 교습소에 들락거렸어도 봐주지 않았을까.
정말 괜찮은 남자를 만난 것 같은데 영숙이는 어떤 남자인지 무척 궁금하였지만 집에 있는 사진으로는 어떤 남자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후 영화한테 두어번 연락이 왔다.
"삼성전자에 다니는 남동생한테 여선생님 좀 중매 해 주세요."
"우리 학원에 영어 선생님 필요한데 소개해 주세요."
영화가 명촌에 새로 8층으로 지었다고 하는 건물을 찾아 갔었다. 맨꼭대기 8층과 7층은 살림 집. 6층은 영화가 꾸려 나가는 학원. 1층에는 칼국수 집으로 세를 주고 있었다.
나머지 층은 비어 있었는데 전기세가 200만원 넘게 나와서 아직 회사에 다니는 남편이 전기세를 내준다고 하였다.
2층은 카페로 빌딩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응접실처럼 이용하고 있었다. 건물 근처에 중학교로 파견 근무 다니던 어느날 찾아 갔던니 마침 남편이 집에 있다고 영화는 8층 집에 있는 남편을 전화로 불러 내어서 소개를 했다.
옛날 스타일의 겨자색 양복을 입고 내려온 영화의 남편은 꽤 괜찮아 보였다.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이야기도 잘했다.
영화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러브스토리도 잠깐 언급을 했다.
"그때에는 이사람이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했었어요."
"아. 네 ~ ".
영숙이가 결혼 하기 전.
신정동에 있는 LG 사택 근처에서 자취를 했었기 때문에 LG 사택을 지나 다닐 때가 많았었다.
LG 사택에 사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워서 지나갈 때마다 영숙이도 LG 사택에 사는 꿈을 꾸고는 했었다.
여상에 근무하니까 학교로 걸어 올라 갈 때면 LG 회사 버스가 지나가고는 하였다.
LG 회사 버스에는 항상 남자들이 가득 차서 지나갔다. 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영숙이는 유심히 바라보고는 하였다.
"저 중에 한 남자만 만나면 LG 사택에 살 수 있는데."
결론은 만나지 못했고 LG 사택에도 살아보지 못했다. 아니 그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영화 남편의 얼굴은 어디서인가 많이 본 얼굴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얼굴은 잘 모르겠고 단발 머리로 깎은 찰랑거리는 직모인 머리 스타일이 낯이 익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그 옛날 35년전에 한때 유행하던 머리 스타일이었다.
영숙이 아가씨 시절이 돌아봐졌다.
LG 사택도 기억 났다.
사택 앞을 지나가면서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그때가 생각났다.
영화 남편은 35년 전 그때부터 지금까지 LG 회사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명촌에 있는 8층짜리 빌딩 앞 태화강변에는 억새 생태 탐방로가 있는데 자주 가느냐고 물어 보았었다.
"저는 자주 가고 싶은데 남편이 싫어해요. 저 실은 한번도 해외 여행 가본적도 없어요. 남편이 여행 다니는 거 안 좋아해서요. 친정 가서도 한번도 자고 온적이 없어요."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은지 7년이 지났다.
난 어제 LG 회사 주식 1주를 샀다. 먼길 걸어서 LG사택 대신 LG회사 주식으로 LG회사와 함께 간다. (못가본 LG사택 때문에 그동안 LG 회사에 일부러 관심을 안가졌었다.)
치과 가느라 아침 일찍 서둘러서 나왔는데 롯데 시네마에 조조할인 영화를 볼까 하다가 요즘 코로나로 집에서 넷플릭스 영화를 많이 보는데 생각하면서 운전을 하다보니 남목에 정선생네 집까지 갔었다.
정선생이 그림 때문에 바쁘다고 하여서 다시 나오는데 억새 생태 탐방로가 보였다.
몇번 지나가면서 가봐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 됐다 싶어서 차를 돌려 주차하고 억새 밭을 돌아 다녔다.
억새 밭을 돌아 다니는데 정화 생각이 났다.
-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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