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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

마음에서의 거리 ~ 엄마

by 영숙이 2021.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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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서의 거리 ~ 엄마>     

 

 엄마.

 어린 시절이나 어른이 된 후에도 엄마는 엄마 그대로 언제나 100% 가까이 하고 싶고 애틋함 그 자체였다.

 

 엄마라고 이름만 불러도 왠지모를 푸근함이 가득차고 어렸을 때부터 모든 일의 기준은 엄마였다.

 

 "엄마한테 물어 보구요."

 "엄마한테 혼나요."

 "엄마가 안된다고 할거예요."
 "엄마한테 미안해서요."
 "엄마가 보구 싶어요."

 

 딱히 우리 엄마는 우리를 혼낸다거나 우리한테 화를 낸다거나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분은 아니셨다.

 그런데도 엄마를 생각한 것은  충동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에서 한발 물러나 생각하기 위한 잣대였다.

 

 엄마는 그만큼 전부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혼자 몇달 살면서 혼자라는게 어떤 건지, 얼마나 힘든건지 충분히 경험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외갓집에 살면서 엄마는 언제나 보고 싶고 그립고 사랑스러운 최고의 존재였다.

 

 엄마랑 아버지랑 같이 살면서 술마신 아버지가 엄마에게 술주정을 하는 것을 보았다.

 사춘기 시절에 잠결에 싸우는 소리에 깨서 앉은뱅이 책상 옆에서 누운채로 엄마 아버지가 싸움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다. 

 술마시고 늦게 온날 아버지는 아버지보다 체격이 큰 엄마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누구 마누라는 미장원을 해서 돈을 잘번다더라. 누구 누구 마누라는 ~  너는 뭐하냐."

 

 '아버지들은 원래 저렇게 술마시고 오면 술주정 하는 가부다.'   

 

 하고 생각했었나 부다. 

 엄마는 집에 가면 항상 우리를 집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셨고 아버지는 밤늦게 술 취해서 집에 오시는 분이셨다.

 우리를 위한 모든 일은 엄마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밖에서 아버지를 만나면 

 

 '우리 아버지구나'

 

 아버지는 늘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는데 밖에서 영숙이를 아는 척  하지 않았다.

 그냥 동네 아저씨들처럼 같이 가는 군청 직원들하고 떠들면서 영숙이 옆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영숙이도

 

 '아버지.'

 

 하고 아는 척 하지 않았다.

 군서에서 살 때에도 따뜻하게 우리 형제들을 대해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건 엄마한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엄마한테 따뜻하게 말을 건네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수고 했어. 애썼네. 잘했어."

 

 이런 말을 하시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옛날 사람이라서 ~ 옛날에는 다 그랬어 ~

 꼭 말로 하지 않는다 해도 느끼는게 있다.

 아무튼 아버지는 포근하고 따뜻한 분이 아니라 무섭고 엄격하고 잘못하면 매를 드는 분이셨다.

 

 군서에서는 아버지가 전방 100미터 앞에만 보여도 90도 각도로 인사를 했었다.

 

 "아버지. 다녀오셨어요?"

 "아버지. 안녕히 다녀오셔요."

 

 우리는 일렬로 아버지가 세워놓고 교육 시킨대로 아버지 얼굴만 보이면 인사를 했었다.

 엄마는 그런 엄격한 아버지와는 달리 말은 없었지만 우리를 위해서 섬세하게 돌보셨고 또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주시려고 애를 쓰셨다.

 우리가 하고 싶어하는 것은 형편이 닿는 한 거의 다 들어주셨다.

 

 고등학교 시절.

 스케이트를 타러 다니고, 베드민턴을 치고, 수영장에 다닌 것은 다 엄마 덕분이다. 

 

  그렇게 힘든 아버지 밑에서 우리를 커버해주는 엄마한테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엄마 때문에 우리가 잘 지내고 학교도 잘 다니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많은 아이들이 중학교 가기보다는 초등학교 졸업도 못한 아이들도 많았지만 초등학교 졸업한 후에도 방직 공장이나 연초 공장으로 많이 갔었다.

 중학교에 진학하는 여자 아이들이 6학년 전체 200여명의 여학생 중에서 5명 안쪽이었으니까.

 

 돈을 벌면 당연히 엄마한테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간호학교 졸업하고 보건 지소에서 근무하면서 월급을 타면 그대로 가져다 드렸다.

 용돈만 얻어 쓰고, 그때 엄마는 돈 번다고 옷도 맞춰 주셨다.

 

 고등학교 교사로 발령이 나서 울산이라는 모르는 동네로 갔을 때에도 월급타면 무조건 엄마한테 전부 부쳐 드렸다.

 그때는 지금처럼 이체가 손쉽지 않아서 학교에서 울산 시내에 있는 엄마가 거래하는 국민은행으로 가려면 버스를 타러 걸어 내려갔고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내려서 또 은행까기 걸어 들어가야했다.

 매번 월급날마다 그렇게 은행을 다녀오고는 했었다.

 

 나와 남동생이 벌어서 부쳐드려도 엄마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동생들에게 용돈을 풍족하게 주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버지 재테크 밑천으로 엄마가 모은 돈은 들어갔고 아버지는 재테크해서 벌었다 해도 동생들을 위해 쓰지는 않았다.

 

 교사가 되어서 몇달동안 용돈을 가지고 모은 것을 시내 금은방에서 동그란 알과 두툼한 줄로 된 금목거리를 샀다.

 방학 때 가서 엄마한테 보여주었더니 엄마가 달라고 하였다.

 

 "싫어. 내가 돈 번 기념으로 나를 위해서 산 건데 안 줄래."

 "뭐? 안준다고?"

 

 엄마는 화장품 방판하러 오는 아주머니에게 금목걸이를 샀는데 안준다고 말했다.

 왠지 불효녀인거 같아서 여름방학 끝나고 다시 학교로 올라오면서 드렸다.

 아파트를 샀다 팔았을 때도.

 결혼 후에도.

 

 주식 열풍이 불던 1988년이 지나고 1990년대. 

 엄마는 형제 5명이 버는 수입으로 꽤 많은 저축을 하고  계셨다.

 만기 되었을 때 빌려 달라고 하니까 당연히 빌려 주실 줄 알았는데 안빌려 준다고 하였다.

 그게 첫번째 충격이었다.

 

 두번째 충격은 막내 상가를 사준다고 할 때였다.

 

 "왜 막내만 사줘? 나도 상가 필요해."

 "니가 나한테 돈준다고 유세 부리냐? 다 갚아 줄께."

 

 그때 큰 충격을 받았다. 

 너무 화가 나서 전화에 이렇게 말한 기억이 난다.

 

 "응 알았어. 다 갚아줘. 내가 드린 존경과 감사와 사랑까지 다 계산해서 갚아줘."

  

 학교에서 하는 공제회에서 대출을 했다고 하니까 그 대출 대신에 엄마 돈을 가져다 쓰고 이자와 원금을 갚으라고 하였다.

 거절하였다.

 엄마한테 빌리는거 신경 쓰이니까 그냥 은행 대출을 쓰겠다고 하였다.

 필요할 때는 안빌려 주시더니 은행에서 빌려 쓴다니까 빌려 준다고 한다. 

 

 평생 생활비를 보내드리는데도 어느날 친정에 갔을 때 엄마가 먹는 반찬을 보고 또 충격을 받았다.

 아침 먹자고 해서 보니까 반찬이 시어빠진 김치에 고추장에 무친 무우생채와 고사리 삶은 거 그리고 고추장이었다.

 

 다음에는 2달에 한번씩 시장을 봐드렸다.

 보내드리는 생활비는 찾아서 쓰지 않고 그대로 여동생들한테 건너갔다.  

 생일에 참석해서 노래 부르라고, 노래 부르면 상금 준다고, 참석 못하겠다니까 생활비 안줘도 되고 2달에 한번씩 시장 안봐줘도 된다고 하였다. 

 생일에 참석하고 매달 생활비 안드리고 한달에 한번씩 시장을 봐드리러 친정을 방문한다.

 

 젊었을 적에 엄마는 이성적이고 분별력있고 사려 깊으신 분이셨다.

 자존심도 세었지만 그보다는 좋은 점이 많은 분이셨다.

 이제 팔순 노모인 엄마는 이성적이지 않고 감정적이고 분별력 대신 본능으로 움직이고 사려깊음 대신에 작은 일로 좋고 싫음에 움직이신다.

 

 이젠 예전처럼 엄마를 보아도 애틋함이라던가,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덜하다.

 나만 그런가 싶었는데 10년 넘게 아이들 학부형으로 맺어져서 만나고 있는 영아 엄마도 그런 말을 한다.

 최근에 영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영아 외할머니 생일 때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는 대공원을 걸으면서 각자의 생각에 잠겨서 말했다.

 

 "이렇게 해서 엄마가 마음으로부터 멀어지는가부다."
 "그런가 부네. 그게 자연의 이치인가부다."

 

 어느 날 나도 그런 엄마가 되어 있을까?

 그게 자연의 이치일까?

 왠지 조금은 쓸쓸해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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