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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다리에 쇠사슬 끊기

by 영숙이 2021.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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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다리에 쇠사슬 끊기>

 

엄마는 아기일 때 부터 발목에 쇠사슬을 차고 말뚝에 붙잡여 키워진 커다란 코끼리 같았다.

이제 충분히 커다란 코끼리가 되어 얼마든지 발로 차서 가느다란 쇠사슬을 끊어 버리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텐데도 쇠사슬을 끊을 줄 모르고 가느다란 쇠사슬에 매여 말뚝을 벗어나지 못하는 커다란 코끼리.

 

안쓰럽기는 하지만 아무리 쇠사슬을 끊으라고 응원해도 또 말뚝을 벗어나서 자유롭게 살라고 해도 그러지를 못하는 커다란 엄마 코끼리.

 

엄마는 아버지보다 키가 5cm는 더 컸다.

체격도 외할아버지를 닮아서 당당했다.

그에 비해서 아버지는 마르고 키가 보통키여서 엄마 옆에 서면 많이 작아 보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엄마는 19살에 시집을 갔다.

아버지와 5살 차이.

아버지는 군청에 근무하신지 벌써 5년째여서 사회 생활에서는 엄마에 비하면 베테랑이었다.

 

엄마는 호랑이같이 엄한 외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하여 어느 날 아버지한테 시집가라고 하니까 시집을 간 것이다.

동네 입구에 사는 아버지 먼 친척뻘 집에서 아버지를 외할아버지에게 중매를 했고 외할아버지는 아버지가 공무원이라고 먹고 사는데 지장없다고 좋아라 하고 엄마를 시집 보내신 것이다.

 

결혼해서 처음으로 외갓집인 친정에 엄마가 신행을 왔을 때 외갓집에서 술 한병을 어린 신부에게 들려 보냈는데,

그 술병은 발효되는 중이었고,, 걸으면서 흔들리니까 부풀어서,, 펑하고 길을 가는 중간에,, 술병 입구를 막은 신문지 뚜껑을 밀어 올리고,, 술이 다 발사되었다고 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신부는 얼마나 놀랐을까?

 

그렇게 시집을 간 엄마는 양산 큰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다.

양산 큰 집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큰아버지와 큰 엄마. 작은 큰 아버지와 작은 큰 엄마 이렇게 사셨는데 큰 아버지는 8남 1녀를 낳았고 작은 큰 아버지는 2녀 1남이었다.

큰 아버지네 식구 중에서 길석이와 영숙이가 동갑이니까 제일 큰 성석이와 범석이 그리고 삼석이.

작은 큰 아버지네는 위에 옥란이 언니와 옥님이 언니가 이미 태어나서 한집에서 살고 있었다.

 

이미 11명의 대가족이 사는 큰집에서 엄마는 그 식구들 밥을 다 해내고 설겆이하고 1년동안 살다가 영동군청에 근무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분가 하였다.

 

아버지는 엄마를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다독다독하는 분이 아니셨다.

 

할머니가 위에 아들 둘을 낳고 아들 딸 쌍둥이를 낳았는데 그중에 아들이 아버지셨다.

할머니는 이렇게 아들 3형제와 이후에 낳은 딸 하나를 키웠는데 특히 막내아들을 귀하게 키웠고 위에 아들들은 초등학교도 간신히 보냈는데 막내라고 면소재지에 있는 중학교를 보냈었다.

 

할머니가 키가 작고 왜소하셨던 탓인지 아버지도 몸이 약한 편이셨다.

큰 아버지는 체격도, 키도 컸는데 아버지는 보통 키였지만 체격이 크시지는 않았고 먹는 것도 까다롭고 편식도 심해서 좋아하는 것만 먹었다.

그러다보니 자기 몸을 엄청 챙기셨고 타고난 성품도 이기적이신데 이래 저래 본인만 위하는 정말 이기적인 분이셨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엄마한테 참 모질게 대하셨다.

엄마는 엄마한테 있었던 일들을 우리에게 일일이 다 말씀하지는 않으셨는데,,

굳이 지난 세월들을 다 들춰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으셨을 것이다.

 

우리는 엄마가 아버지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버지가 엄마한테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

성장하면서 수시로 들어야했다.

 

안그래도 포시라운 구석이란 1도 없으신 아버지인데다

아이들을 챙기는 일이라곤 전혀 없는 아버지에게

엄마의 보태기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알기 이전에

 

아버지는 나쁜 사람,,

싫은 사람,,

무서운 사람으로 정해졌었다.

 

영숙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어느 여름 날.

학교가 끝나 집으로 오는 도중에 어떤 젊은 여자가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채 아스팔트가 깔린 대로변 길가에 서 있었다.

영숙이가 유심히 바라보니까 몸을 손으로 가리고 벽쪽으로 고개를 꼬고 등을 보였었다.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만약 지금 그런 모습을 본다면?

가지고 있는 것중에서 가릴 수 있는 것을 건넸을 것이고

무슨 사연인지도 물었을텐데,

 

불란서풍 2층집에

담장에는 장미 덩쿨

대문에서 현관까지는 돌자갈이 깔린 길이 있어야하고

푸르른 잔듸 마당 한 옆에는

그네가 있는 작은 모래 사장이 있다.

 

2층에는 영숙이가 글을 쓰고 밖을 내 다볼 수 있는 창문이 달린 다락방

그런 집을 꿈꾸던 여고 1학년인 문학소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냥 충격을 받은 얼굴로

충격적인 모습을 바라보면서 지나갔었다.

 

"무슨 일일까?"

 

온갖 상상을 하면서,,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일이다.

 

집에 온 영숙이는 오는 도중에 있었던 그 말도 안되는 일을 엄마한테 이야기하였다.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엄마는 원래 어두운 얼굴이 더 어두워지면서 말했다.

 

" 나 결혼하고 얼마 안되었을 때인데,, 영동 살 때 였는데,, 너네 아버지한테 그렇게 쫓겨 난 적이 있어."

"응? 무슨 소리야? 정말 옷 하나도 안 입고?"

"그래 아버지가 내가 입은 옷을 전부 찢은 다음에 나가라고 집밖으로 쫓아 냈었어. 얼마나 챙피했는지. 끔찍했었어. 절대 잊어버릴 수가 없어. "

"아버지가 왜 그랬는데? "

 

엄마는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했는데도 영숙이가 기억을 하지 못할 수도 있었고,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을 수도 있었고,,

영숙이는 보지도 못한 일을 엄마가 말해서 알았는데,,

아버지가 왜 그랬냐고 꼬치꼬치 물을 수가 없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영숙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안채가 커다린 기와 집이었는데 그집 바깥채인 단칸방에 살 때에,, 밤늦게 술이 잔뜩 취해서 들어오셔서 저녁을 먹으면서 밥상 머리에서 흔들리면서 웅얼 웅얼 혼자 떠드는 모습이었다.

잠결에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다시 잠이 들었었다.

 

그때 이미 남동생이 초등학교 1학년 이었고 그 밑에 여동생이 있었다.

그런데 왜 그런지 모르지만 동생들에 대한 기억이 없다.

엄마 심부름으로 꽁치를 사온다던지,,

바가지에 콩나물을 사온다던지,,   

기억이 나는데......

 

이사도 참 많이 했었다.

 

아버지는 돈을 모아서 다른데 투자를 하고 가족은 계속 월세를 살게 하였다.

가족에게 돈을 투자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옥천에서 2번째 이사 한 집에서 3째 남동생이 태어났다.

아직 젊은 엄마는 어둑한 방안에서 잘 안나오시고 아기를 이뻐하는 얼굴로 들여다 보시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생활비를 주셨지만 절대로 넉넉하게 안주시고 쌀은 양산 시골에서 농사 지은 것을 가져오고 채소나 반찬거리를 살만큼 가끔 조금씩 주셨던 것 같다.

엄마에게 물어보면 알겠지만 절대로 넉넉하게 생활비를 주실 아버지는 아니셨다.

 

엄마는 셋집 마당에 상추도 키우고 고추도 키우고 오이도 키워서 반찬을 하셨다.

아버지가 점심 먹으려고 집에 오시면 엄마는 풋고추를 씻어서 상에 내셨고 아버지는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서 밥 한그릇을 다 비우셨다. 

 

엄마는 알뜰살뜰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5남매를 키우시느라 바쁘셨다.

자식들에게 관심이라고는 1도 없으신 아버지 대신 독박육아를 하신 것이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셋집 마루를 뒹굴면서 엄마한테 용돈 달라고,,

간식 사먹을 돈 달라고,,   

시장에서 뭐좀 사먹게 돈좀 달라고,,

떼를 썼었던 기억이 난다.

 

반나절 동안 떼를 썼지만,,

엄마는 기미가 낀 우울한 얼굴로 방에서 마루를 내다보다가 돈없다고 하면서 안주셨다.

 

그 후 언제인가 딱 한번 엄마가 돈이라는 걸 주셨다.

그 돈을 들고 대문을 열고 나가니 대문 앞에 5일장이 열리고 있었는데

리어카에 커다랗고 싱싱한 참외를 가득 싣고 젊은 농부가 팔려고 서 있었다.

 

"이 참외 얼마여요?"
"10원에 10개"

"집에 가서 그릇 들고 올께요."

 

설겆이를 하는 통에 가득 담겼다.

엄마한테 참외를 보여주니 깜짝 놀랐다.

정말 좋아하면서

 

"이게 정말 10원어치야?"

"그렇다니까, 정말 싸지? 정말 맛있지?"

 

엄마하고 동생들하고 맛있게 행복하게 먹었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영숙이는 지금도 참외를 좋아하나부다. 

 

두번 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장농 만드는 집에 세를 들어 살 때 였는데 영숙이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날이면 날마다 술을 마시고 오시던 아버지가

하루는 엄마 멱살을 잡고 서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결에 아버지가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김서기 마누라는 미장원을 해서 돈을 그렇게 잘 번다는데 너는 뭐야? 집에서 맨날 밥먹고 뭐하느냐고? 응? 김서기 마누라만 돈 버는게 아니고 이서기 마누라도 잘만 번다더라. 너도 돈 좀 벌어봐."

 

잠결에 멱살을 잡혀 있는 커다란 키의 엄마에 비해서

멱살을 잡고 있는 아버지의 키가 정말로 작고 왜소해 보였다.

그냥 한번 밀면 뒤로 벌러덩 넘어갈 것 처럼 보였었다.

 

" 확 밀어 버리지."

 

잠결에 영숙이는 아버지가 엄마한테 매달려 멱살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술주정하고 있구나 생각하면서 다시 잠이 들었다.

 

아버지는 술을 마셔도 꼭 식사를 하셨다.

밥상 앞에서 밥을 드시면서 혼자 중얼 중얼.

 

그날은 영숙이가 늦게 집에 들어와서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아버지가 밥상 앞에서 밥을 먹고 있는 영숙이를 술이 취해서 몽롱한 눈으로 팔베게를 하고 옆으로 누워서 흔들거리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영숙이 사타구니를 손으로 쓰윽 문질렀다.

순간 영숙이는 숟가락을 밥상 위에 탁 내려 놓으면서 소리쳤다.

 

"이 ** **"

 

그러고는 재빨리 일어나서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 날 이후 몇일 동안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

 

아버지가 출근하고 안계시면 들어가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아버지가 퇴근 하실 때 쯤에는 눈에 안띄게 밖으로 나가던지 월셋집 뒤에 있는 땔감이 쌓여 있던 헛간 같은 곳에 있는 가마니 위에 누워서 잠을 잤다.

 

사실 너무 무서웠다.

첫날 집 뒤에 있는 헛간 가마니 위에서 잔 다음 밥먹으러 집안으로 들어갔을 때.

 

"아버지가 너 들어오면 때려 죽인다고 도끼 갖다 놨어."

"정말?"

"그래 책상 밑에 있어. 겁도 없이 어쩌자고 아버지한테 욕을 했어."

 

책상 밑에 있는 못보던 도끼자루를 보니까 정말 겁이 났다.

중간크기의 나무 패는 도끼 였는데 도끼자루가 하얗고 손에 딱 잡히는 크기로 도끼자루 중간이 약간 휘어져 있었다.

 

엄마는 왜 아버지한테 욕을 했는지 물어 보지 않았고 영숙이도 왜 아버지한테 욕을 했는지 말하지 못했다.

 

너무 부끄러웠다.

아버지가 그런 짓을 한게 너무 부끄러웠고,,

이후에도 아무한테도 그 일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못했었다.

 

영숙이 나이가 50 중반이 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5년쯤 되었을 때인가 엄마한테 이야기 했었다.

 

엄마는 튀어 나간 어제 밤에 어디서 잤는지 물었다.

밤에 딸이 자러 들어오지 않아서 걱정이 되었었나 부다.

 

아버지가 무서워서 집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만약 아버지한테 붙잡히면 얼마나 맞게 될지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 전에 군서에서 살 때 초등학교 6학년 때였는데 남동생이랑 싸운다고 아버지가 남동생과 함께 헛간에 데리고 가서 동네 애들이 대문간에 모여서 구경을 할 정도로 심하게 두드려 맞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해가 뉘엿뉘엿하게 넘어가는 석양 무렵에 집에서 좀 떨어진 옥천 여중 맞은 편에 있는 성당으로 올라갔다.

성당으로 향하는 경사가 심한 계단을 올라가면 계단 끝에 하얀 성모마리아 상이 자애로운 얼굴로 내려다보던 성당이었다.

성당 화단에 있는 조그맣고 하얀 성모마리아 상을 바라보면서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서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성모 마리아 상에 있는 이끼를 닦아 내었다.

 

"저 좀 집에 들어 갈 수 있게 해주셔요. 아무 일도 없이 집에 들어가게 해주셔요."

 

그렇게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다음 다음 날인가?

집에 들어갈 때 집안이 환해 보였고 책상 밑에 도끼 자루도 없었고 아버지는 몇일이 지난 탓인지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는 말을 안했다.

아버지는 원래 우리에게 다정하지는 않았지만 이후로는 정말 아는척도 안했다.

 

하지만 둥근 알루미늄 저녁 밥상에 둘러 앉아서 다같이 밥을 먹게 되었다.

 

한번씩 아버지 얼굴을 바라 보기는 했지만 눈치를 보지는 않았다.

아버지도 이후로는 집에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 술주정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아버지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셨을 것이다.

 

성당사택에서 월세 살다가 충남여고로 진학을 하면서 엄마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전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까지 월세로 전전하던 집들과는 달랐다.

 

새로지은 2층 양옥집.

 

엄마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전으로 이사를 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아버지라는 말뚝과 아이들이라는 쇠사슬에 묶여 있는 커다란 엄마 코끼리였다.

 

생각해보면 엄마만 그런 삶을 사신 것이 아니고 그때의 어른들은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사셨다.

나름대로 말뚝에 매여 쇠사슬에 묶인채 사셨던 것 같다.

 

지금은?

요즘 젊은이들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도 동물이기 때문에,,

또 다른 의미에서 가느다란 쇠사슬에 묶인 코끼리처럼 살아가고 있을까?

 

얼마든지 스스로 끊어낼 수 있는 쇠사슬이지만 그렇게 묶여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때로는 종교라는 이름의 쇠사슬에 매여진 채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양한 쇠사슬에,,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매여 살고 있을 수 있다.


그럼 자유란 무엇일까?

진정한 자유란 어떤 것일까?

 

어떤 것이 진정한 자유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따라서 조금씩이라도 실천하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애쓰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란

진정한 사랑으로 조금씩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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