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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셀프 메이드 마담 C.J. 워커 ~ 세기의 성공신화 (넷플릭스)

by 영숙이 2023.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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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셀프 메이드 마담 C.J. 워커 ~ 세기의 성공신화 (넷플릭스) >   

 마담 C J워커 이야기는 책으로도 여러번 읽었고 영화로도 여러번 보았다.

 영화를 볼 때마다 대단한 여성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상황이 좋다.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많고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기회는 얼마든지 주어진다.

 문제는 기회가 있어도 그것을 잡지 않는 것이다.

 그냥 안주하고 복지부동의 자세로 가장 편안한 길을 찾는 것이다.

 

 도전 정신이 없다.

 CJ 워커도 적당히 안주 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셀프메이드 마담 C. J. 워커는 1900년대 초 아프리카계 여성들이 사용할 수 있는 미용제품을 만들어 갑부가 된 흑인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넷플릭스 미니시리즈. 

  마담 C. J. 워커는 1900년대를 배경으로 자신의 힘으로 자수성가한 여성으로, 흑인을 상대로 한 린칭 반대 운동을 주도하고, 흑인대학교와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사회적인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마담 C. J. 워커는 1867년 미국 루이지애나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본명은 새라 브리들러브였으며, 부모님은 노예 출신이었습니다.

 그녀는 7살 때부터 농장에서 일을 하고, 14살 때 결혼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1887년에 사망하였고, 그녀는 딸과 함께 세인트루이스로 이사했습니다.

 

 그녀는 세탁 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고, 극심한 탈모에 시달렸습니다.

 그녀는 에디라는 미용가로부터 발모제를 구입하고, 그녀의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되찾았고, 자신만의 미용 제품 라인을 개발했습니다

 

 그녀는 1906년에 C. J. 워커와 재혼하고, 자신의 이름을 마담 C. J. 워커로 바꾸었습니다.   그녀는 전국을 여행하면서 그녀의 제품을 홍보하고, 흑인 여성들을 고용하고, 교육하고, 지원했습니다.

 그녀는 미용 학교와 공장을 설립하고,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부를 흑인 사회에 기부하고, 인권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녀는 1919년에 사망했으며, 그녀의 딸은 그녀의 사업을 계승했습니다.

 

 마담 C. J. 워커의 인생은 가난과 억압에서 벗어나 성공과 자선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녀는 흑인 여성들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넷플릭스 실화바탕 셀프메이드 마담 C.J. 워커 - 제이의 영 화

셀프 메이드: 마담 C. J. 워커 | 넷플릭스 공식 사이트 - 넷플릭스   

MADAM C. J. WALKER 약력-어린 시절, 인생 업적 및 타임 라인 - 사업가

[인물 아메리카] 첫 흑인 여성 재벌, 마담 C.J. 워커 -  VOA.

다음은 [인물 아메리카] 첫 흑인 여성 재벌, 마담 C.J 워커의 내용이다. 

[인물 아메리카] 첫 흑인 여성 재벌, 마담 C.J. 워커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재벌 마담 C.J. 워커의 얼굴이 그녀가 개발한 화장품 용기에 그려져 있다.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미용 제품을 만들어 대기업을 일궈낸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재벌, 마담 C.J. 워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마담 C.J. 워커는 아프리카계 여성들의 머리 손질과 미용 제품을 만들어 대기업을 일으킨 최초의 미국 흑인 여성입니다.

 1900년대 초 미국에 사는 흑인들의 삶은 극도로 어려웠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가정의 하인이나 농장, 빨래터의 노동자 등으로 일했습니다.

 마담 C.J. 워커도 20년 동안 옷을 빠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흑인 여성들의 모발을 보호하고 가꾸는 제품을 개발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마담 C.J. 워커는 돈벌이에 성공한 점뿐 아니라, 흑인 여성들도 머리를 아름답게 가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한 데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비교적 짧은 일생을 살다 간 마담 C.J. 워커는 대부분 세월을 무척 어렵게 보냈습니다.

 마담 C.J. 워커는 1867년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이름은 새라 브리들러브였습니다.

 새라의 부모들은 노예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가족은 미시시피 강 유역의 목화밭에서 일하며 살았습니다.

 

 새라도 5살이 되자 가족들과 함께 목화 따는 일을 했습니다.

 새라는 백인들을 위해 빨래를 하는 어머니와 언니도 도와줘야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새라가 7살 때 부모들이 황열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새라와 언니는 미시시피 주 빅스버그라는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새라는 불과 14살때 모세스 맥윌리암스라는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이들은 결혼 3년 만에 딸을 낳았습니다.

 딸에게는 릴리아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또 2년 뒤 불의의 사고로 남편 맥윌리암스가 죽고 말았습니다.

 연속되는 비극을 당한 새라는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 가면 빨래꾼 임금이 더 낫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옷을 빨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밤에는 학교에 가서 어렸을 때 못한 공부를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새라의 모발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머리카락은 건조하고 잘 부러지는데다 이곳저곳에서 빠지기도 했습니다.

 새라는 이런저런 제품을 써봤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새라는 만약 내 머리를 건강하게 하는 제품을 개발하면 돈도 벌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37세 되던 해 새라는 옷을 빠는 데서 아이디어를 얻어 바셀린과 설파 등을 합성해 모발과 두피를 보호하는 제품을 만들었습니다.

 독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 향료도 섞었습니다.

 그 약물을 써 보니 놀랍게도 자신의 머리털이 새로 나고 곱슬머리도 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새라가 자신만의 비법을 가미해 새로운 제품을 만들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라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제품을 개발했다고 말했습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자신이 썼던 제품을 만든 회사들과 경쟁을 하기 원치 않았던 새라는 서부 지방인 콜로라도 주 덴버로 이사를 갔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미시시피 강 주변을 벗어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덴버에서는 우선 남의 집 부엌 일을 했습니다.

 낮에는 빨래를 하고 요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밤에 모발 제품을 계속 연구했습니다.

 새라는 자신과 친구들의 머리에 제품을 시험했습니다.

 효과는 아주 좋았습니다.

 새라는 적은 돈이지만 몽땅 털어 작업장을 만들고 개발한 약물을 병에 넣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마담 C.J. 워커가 1913년 YMCA 흑인 지부 건물 현판식에서 다른 관계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워커는 당시 1천 달러를 기부했다.

 새라는 1906년 신문기자 출신인 찰스 조셉 워커와 재혼을 했습니다.

 찰스는 새라의 친구이자 조언자이기도 했습니다.

 결혼하면서 새라는 이름도 마담 C.J. 워커로 바뀌었습니다.

 마담 워커는 자신의 제품을 판매할 여성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또 전국적으로 미용문화 학원이라는 것을 열어 제품 판매 훈련을 시키고 이들로 판매망을 구성했습니다.

 훈련을 받은 여성들은 워커 에이전트로 불렸습니다.

 이들은 전국 어디서나 흑인 사회에서 아주 인기 있는 사람들이 됐습니다.

 마담 워커는 전국을 돌며 제품 판매에 노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메이카, 파나마, 쿠바 등 카리브해 국가들도 방문했습니다.

 마담 워커의 제품은 대부분 주민이 흑인인 그런 곳에서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마담 워커의 사업은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에이전트가 3천 명이나 될 정도로 급속히 커졌습니다.

 학원에 갈 수 없는 흑인 여성들은 통신교육으로 워커의 제품 사용법을 배웠습니다.

 머지않아 수십만 명이 마담 워커 제품의 사용법을 배우고 사용하게 됐습니다.

 수많은 흑인 여성들이 마담 워커 제품을 판매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집을 살 수 있었습니다.

 마담 워커는 많은 유색인종 여성들이 빨래터를 떠나 즐겁게 돈을 버는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큰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마담 워커는 사업이 번창하자 1908년 사업 본부를 동부인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로 옮겼습니다.

 피츠버그는 워싱턴 DC, 뉴욕, 볼티모어 등 흑인들이 많이 사는 대서양 쪽 도시에 가까워서 사업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곱슬머리를 곧게 펴는 것은 백인처럼 만드는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기독교 성직자들은 곱슬머리란 본래 하느님이 흑인에게 준 것인데, 사람이 그것을 바꾸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담 워커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목적이 여성의 모발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마담 워커는 큰 재산가가 됐고 전국에 유명해졌습니다.

 마담 워커는 즐거운 새 삶을 살게 됐습니다.

 그러면서도 마담 워커는 자신의 재산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었습니다.

 당시로써는 개인이나 단체를 돕는데 큰 돈을 기부할 수 있는 흑인 여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마담 워커는 흑인의 권익향상을 위해 싸우는 전국 유색인종 발전협회와 교회, 문화 단체 등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흑인 예술가들과 작가들도 지원했습니다.

 흑인들을 상대로 한 폭력을 막는 데도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마담 C.J. 워커는 대통령도 만났습니다.

 1917년에 흑인 여성단체 회원들과 함께 워싱턴으로 가서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을 찾아가 폭도들의 공격을 금하는 연방법을 제정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마담 C.J. 워커는

 “나는 인생의 목적을 단순히 나를 위해 또는 나만 쓰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를 다른 사람들을 돕는데 두고 있다. ”

 

 라고 말했습니다.

 마담 워커는 1918년 뉴욕시에 크고 아름다운 집을 마련해 정착했습니다.

 마담 워커는 여전히 열심히 일을 계속했지만 점차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의사는 쉬라고 권했지만 마담 워커는 듣지 않았습니다.

 마담 워커는 51세때인 1919년 신장기능 장애로 갑자기 숨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마담 C.J. 워커의 사업 규모는 에이전트 2만여 명, 판매고는 오늘날로 치면 연간 수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마담 C.J. 워커는 요즈음 가치로 600 내지 700만 달러에 달하는 저택에 살 정도로 부를 누렸지만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돈을 어떻게 쓰는 것이 보람 있는 것인지를 보여준 여성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 마담 C.J 워커의 이야기와 땅콩 박사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읽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때 땅콩박사에 관한 책을 사서 여러 아이들에게 건네 주었었다.

 한창 예민한 사춘기의 아이들이 그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책을 사주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시리즈 영화로 나온다.

 여러번 보았지만 볼 때마다 감동을 받는다.

 

 셀프 메이드 마담 C.J. 워커 ~ 세기의 성공신화 (넷플릭스)를 보고 많은 사람들에게 동기부여가 됐으면 좋겠다.  

<땅콩 박사 조지 워싱컨 카버 >

                                                                위키백과에서 

 

  미국의 저명한 흑인 농학자 조지 워싱턴 카버(1864년~1943년)박사는 아이오와 농과대학교 교수로 일하면서 어린이들의 간식거리로만 이용되던 땅콩을 연구하여 먹을거리 105 가지 및,구두약 등의 새로운 제품을 200 종류 넘게 만들어냈다.

 그는 자신의 산 경험과 지식으로 토머스 에디슨처럼 부자가 될 수 있었지만, 기독교 신앙에 근거하여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사용한 참 지식인이었다.

 

 그 실례로 1970년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출간한 《땅콩박사》에 의하면, 조지는 소아마비가 유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이 되자 자신이 발명한 땅콩 기름으로 마사지하여 그들을 치료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종과 계급에 관계없이 조지를 진심으로 존경하였다.

 또한 그가 만든 인조 고기, 곧 콩으로 만든 고기는 육식을 하지 않는 채식주의자들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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