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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모은 766억 카이스트에 기부…이수영 회장

by 영숙이 2020.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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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모은 766억 카이스트에 기부한 이수영 회장>

766억원 기부한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 

 李壽榮
 1936년 서울 출생 / 경기여중·경기여고·서울대 법학과 / 서울신문·현대경제일보(現 한국경제신문)·서울경제 기자 / 광원목장 설립. 現 광원산업 회장, 카이스트발전재단 이사장

 1번, 766억 원을 어떻게 모았을까

 서울대 법대 3년 때 치룬 첫 번째 사법시험에서 떨어진 것.‘도시락 2개를 싸서 새벽에 집에서 나와 오전 6시부터 밤 11시까지 도서관에서 온종일 앉아서 공부만 했다. 주로 분리대 중앙도서관에서 공부했는데(중략)... 그렇게 큰 도서관에 선풍기 한 대가 전부였다. 남학생들은 거의 속옷 바람으로 공부했다(중략)... 그곳에서 공부하는 여학생은 거의 내가 유일했다.’

 경기여중, 경기여고에 서울대법대까지 순풍에 돛 단듯하던 그녀는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결국 사법시험에서 처음 고배를 마신 뒤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져 오랫동안 뒷방 신세로 전락했던 것이다. 겨우겨우 몸과 마음을 추스린 그녀는 영어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어느 날, 학원 게시판에서 공고문 하나를 본 뒤 인생의 방향이 바뀌게 된다. 그 공고문은 서울신문에서 신입 기자를 뽑는다는 안내문이었다. 이후 그녀는 현대경제신문, 서울경제신문 등에서 기자생활을 이어가며 고 정주영 회장을 비롯해 고 이병철 회장 등 정·재계 인사들과의 인연을 바탕으로 기사를 발굴했다.

 기자 시절 안양에 당시 10원 정도 하는 땅 5000평을 사, 돼지 두 마리와 암컷 한우 세 마리로 목장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말농장 정도였다. 1971년에 광원목장을 설립해 축산업을 시작했다. 10년 새 돼지 1000마리와 젖소 10마리로 불어났다. 처음 장만한 목장 부근으로 경인고속도로 나들목(IC)이 생기면서 목장터 1만1400평 가운데 1만평이 수용돼 많은 돈을 손에 쥐게 됐던 것. 이후 우여곡절 끝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하천의 모래’였다.

 당시는 전국에 건설 붐이 불 때였다. 남자도 생각하기 쉽지 않은 모래 채취에 손은 댄 여장부는 짧은 기간 꽤 많은 돈을 모은다. ‘그야말로 호시절이었다. 내 인생의 황금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중략)...모래도 팔고 소도 파느라 정신없던 시절이었다.’ 서울법대 동기생이었던 서울신탁은행 돈암동 지점장이 지점의 대리 한명을 현장으로 보내 입출금 관리를 해줄 정도였다니 당시에 얼마나 많은 돈이 현장에서 오갔나를 짐작케 한다. 1988년 여의도백화점 5층을 통째로 인수하면서 기자→목축업자→모래 판매업자에 이어 부동산 업자로 변신하며 부를 축척하게 된다.

 삶 자체가 장르를 넘나드는 사람이었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재계 출입 기자를 했다. 법도 알고 경제도 안다. 연차가 쌓일 무렵부터는 시골에 내려가 주말목장을 운영했다. 서울 토박이면서 농촌도 안다. 목장으로 번 돈으로 건물에 투자를 했다. 부동산도 잘 안다. 큰돈을 벌었고, 그 돈을 교육에 기부했다. 벌 줄도 쓸 줄도 안다.

 

2. 평생 모은 766억 카이스트에 기부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켜본 결과 KAIST가 우리나라 발전은 물론 인류에 공헌할 수 있는 최고의 대학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 "세계 선도 기업인 삼성전자에서 근무하는 반도체 석·박사 연구인력의 25%가 KAIST 출신"이라며 "KAIST가 대한민국의 이름을 세계에 드높이는 데 이번 기부금이 쓰이길 바란다" "2019년 314조 원의 매출로 국내 GDP의 16.4%를 차지할 정도로 국가 경제 성장에 가장 크게 기여하고 있는 삼성전자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세계적인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KAIST 덕분ˮ

 "내가 일제 강점기를 지낸 사람이다. 그때 감정이 아직 남아있다"며 "일본도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나왔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안 나왔다. 카이스트를 키우는 게 곧 국력을 키우는 것"
 "앞으로 좀 더 살아야 하니까 그럼 돈이 모아질 것 아니냐"며 "아직 정리되지 않은 돈도 있다. 기부 하고 나서 정말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고 강조했다

 "세상만사는 사람으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나기 때문에 KAIST는 사명감을 가지고 대한민국을 이끌어나갈 영재를 키워야 한다ˮ "어느 대학도 해내지 못한 탁월한 성취를 이뤄내 대한민국의 이름을 세계에 드높이는 일에 이 기부가 뜻깊게 활용되기를 바란다ˮ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쁘다ˮ "대한민국의 미래와 나라를 위하는 뜻을 가진 분들이 기부 문화 활성화를 위해 더 많이 동참해주기를 바란다ˮ

 지난 2012년 미국의 80억여 원 상당의 부동산과 2016년 또 한 차례에 걸쳐 10억여 원 상당의 미국 부동산을 유증한 것에 이은 세 번째 기부로 총 기부액은 KAIST 개교 이래 최고액인 766억 원을 기록했다. 지난 2012년 첫 기부를 시작으로 KAIST와 인연을 맺은 뒤, 이듬해인 2013년부터 현재까지 발전재단 이사장으로 재임 중인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은 "오랫동안 가까운 자리에서 지켜본 결과 KAIST는 우리나라 발전은 물론 인류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최고의 대학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ˮ라고 기부 배경을 밝혔다. 어떻게 이렇게 큰 금액을 기부할 생각을 하셨냐는 질문에 이 회장은 "여러 분도 아껴쓰고 저축하면서 살면 된다. 간단하다"고 말했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 법조인의 길도 아니었고 좋게 말하면 경영자, 나쁘게 말하면 장사꾼의 길인 데다, 솔직히 법조인보다 과학 기술자를 키우는 일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법은 우리 생존에 필요한 산소와 같은 것이긴 하지만 법이 물건을 만들고 부가가치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이고 이 분야의 젊은이들이 미래를 책임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동력이 되는 KAIST를 기부처로 정하게 된 겁니다.”

 KAIST 총장은 "이수영 이사장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세계 최정상급 과학자를 배출하기 위해 지속 가능하고 안정적인 연구 환경을 조성하겠다" KAIST는 '이수영 과학교육재단'을 설립한다. 이수영 과학교육재단 지원을 통해 'KAIST 싱귤래러티 교수'를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수영 과학교육재단'의 수익금은 `KAIST 싱귤래러티(Singularity) 교수' 지원을 통한 노벨상 연구 기금으로 사용된다.

 `KAIST 싱귤래러티 교수' 제도는 과학 지식의 패러다임을 바꾸거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수 있는 교수, 인류 난제를 해결하고 독창적인 과학 지식과 이론을 정립할 수 있는 교수를 선발해 지원하는 제도다. 미래 과학기술 및 산업 발전을 선도할 혁신기술과 학문적 독창성을 창출할 수 있는 우수 연구 인력을 확보하고 기술적 특이점 도래에 대비하기 위해 장기간의 연구 수행을 지원하는 것이 특징이다.

 KAIST는 `이수영 과학교육재단' 지원으로 세계 최정상급 과학자 배출을 위한 지속 가능하고 안정적인 연구 환경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교내 연구진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을 높이겠다는 계획이다. 싱귤래러티 교수로 선정되면 10년간의 임용기간 동안 연구비를 지원받고, 논문·특허 중심의 연차 실적 평가가 유예된다. 임용기간 종료 시 연구 진행 과정 및 특이점 기술 역량 확보 등 평가에 따라 지원 기간을 추가로 10년까지 연장할 수 있다.

  KAIST에는 그간 이수영 이사장을 포함해 대한민국 1호 한의학박사인 故 류근철 박사(578억 원), 정문술 前 미래산업 회장(515억 원), 김병호 前 서전농업 회장(350억 원), 故 김영한 여사(340억 원) 등의 기부자들이 KAIST에 고액의 발전기금을 기탁했다.

이수영 회장이 기자 시절 당시 재계 총수들과 함께 찍은 사진. 어깨동무를 한 분이 이병철 삼성 회장이고 오른쪽이 정주영 회장이다.

 

3. 성장 Story

 이수영 회장은 지난 1936년 4월 서울시 종로구 제부동의 한 가정에서 4남 4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아버지가 남긴 통장 2개를 사업 밑천으로 신문기자 시절 안양에 땅을 사 주말농장을 시작했던 것.  ‘살아있는 걸 키우는 게 그나마 덜 힘들 것 같았다. 기자에서 목축업자로 그렇게 나는 새로운 인생의 길로 한발 한발 들어섰다.’고 자서전에서 회상했다.

  “언젠가 은퇴하면 농사지으며 살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3.3㎡당 5원, 10원 하던 경기 안양 땅을 사서 주말마다 내려가 텃밭을 가꿨습니다. 신문사에서 해직되자마자 바로 내려가 겨우 비바람을 피하는 수준으로 집을 짓고 열심히 땅을 일궜죠. 그러던 어느 날 경기 용인에서 돼지를 키우며 살던 신문사 선배가 ‘농사짓지 말고 돼지나 소를 키워보라’고 하는 겁니다. 어차피 경험 없는 것은 마찬가지라, 그 일이 덜 힘들고 돈도 더 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돼지 2마리와 암소 3마리를 사서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마음고생도 많았습니다. 사람 만나는 게 일이었는데 지인들과 거의 연락을 끊었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이상한 눈으로 봤죠. 서울대 법대 나온 처녀가 신문사 기자까지 했다면서 트랙터를 몰고 다니며 선머슴처럼 휘젓고 다니니 어쩌다 저렇게 됐나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그래도 동네 분들을 만나면 웃는 얼굴로 인사를 잘하자, 겸손하자, 도와주자, 이런 말을 가슴에 새기며 살았습니다. 매일 거울을 보면서 고개 숙이고 웃는 연습까지 하면서 말이죠. 

 오로지 일에만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돼지가 1000마리가 되고 젖소도 10마리로 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공무원들이 들락거렸고 그중에는 내무부 관리도 있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농촌에서 성공한 사람들 이야기가 TV에서 자주 나왔는데, 누가 저를 소개했는지 KBS ‘잘 살아보세’ 프로에 출연하게 됐습니다. 갑자기 성공한 목장 주인으로 알려지니 새마을운동 강연도 다니고 정부에서 주는 상도 받았습니다. 유명해지니 주변 대접이 달라지더군요.”

 그녀에게는 운도 따랐는데 목축업자에서 모래 판매업자로 변신한 그는 무엇보다 “운이 좋았다”고 했다. “사업은 운입니다. 운이 내 앞을 지나갈 때 누구는 붙잡고 누구는 놓치느냐의 차이입니다. 나도 운이 좋았습니다. 1979년 돼지파동으로 돼지 값이 폭락했을 때 운 좋게 군에 납품해 마리당 3만 원도 받지 못하던 돼지를 5만 원에 팔았습니다. 

 얼마 뒤 우유파동이 났을 때는 마침 농림부 장관이 아는 사람이라 앞뒤 안 가리고 전화해 초등학생들에게 우유를 무료로 나눠주자는 아이디어를 내 실제로 젖소 농가를 살리고 아이들에게 우유도 공짜로 돌리게 하는 정부 정책으로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나 때문에 우리 아이들 평균 신장이 올라가고 올림픽에 나가서 메달도 따게 됐다고 자부합니다.(웃음)” 

 “목장 땅이 경인고속도로 나들목(IC)으로 수용돼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장 일을 다시 하려 했는데, 새로 산 땅이 전부 그린벨트로 묶여버리게 됐습니다. 정부는 아무 보상도 해주지 않았고 말뚝 하나 마음대로 박을 수 없는 쓸모없는 땅으로 전락했습니다. 건강도 안 좋고 목장 일도 다시 할 수 없게 돼 다시 좌절에 빠졌죠. 그때 눈에 들어온 게 ‘모래’였습니다.” 

 “전국에 건설 붐이 일던 때였는데 모래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지 않습니까. 안양천변을 걷는데 모래에 꽂힌 겁니다. 더구나 그곳 모래는 1급에 가까웠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래를 팔기 시작했죠. 여름이면 뜨거운 햇빛, 겨울이면 차가운 강바람을 맞으며 흙먼지와 씨름했습니다. 밤늦게 돌아오면 모자며 신발은 물론, 옷 전체가 모래와 흙먼지 투성이였습니다. 그래도 돈 쌓이는 재미에 힘든 줄 몰랐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와도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안 됩니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운명이 바뀌면 내 인생도 바뀝니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하찮게 보인다 해도 진심으로 대해야 합니다. 거래하던 은행 직원으로부터 추천받은 게 여의도백화점이었습니다.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건물이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5층을 인수했습니다. 목축업자, 모래 판매업자에 이어 건물주, 부동산업자가 된 거죠. 기자를 그만둔 지 8년 만이었습니다.” 

 “건물관리업체 선정을 둘러싸고 조폭들로부터 살해협박까지 받았습니다. 정리하는 데 거의 10여 년이 걸렸습니다.”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듯, 그가 가벼운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면 실패도 많았지만, 정말 독하게 마음먹으면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장은 이뤄지지 않더라도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그것을 이루고자 내가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부으면 100%까지는 아니어도 80~90%는 이뤄지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관건은 무엇을 이루려고 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포기하느냐입니다. 무언가를 내 것으로 만들고 이루려면 또 다른 무언가를 포기해야 합니다. 인생은 굴곡진 길입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영원히 내리막만 있을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오르막이 나옵니다. 속단은 금물입니다. 

 내 경우 여의도백화점이 어느 정도 정리됐을 무렵 신장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때 정말 살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전이되지 않아 한쪽 신장만 떼어냈습니다만, 이후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사람의 인연도 뜻대로 되지 않고, 이 세상과의 인연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80인생을 살면서 깨닫습니다. 내노라 하던 재벌총수도 암으로 쓰러지고 그 암을 치료하던 의사도 자기가 치료하던 환자와 똑같은 암에 걸려 눈을 감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2012년 9월14일 이수영 회장이 KAIST에 발전기금을 약정하는 모습

 <아무리 그래도 평생 피땀 흘려 모은 돈을 내놓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요.>

 “나는 휴지 한 장도 찢어 쓸 정도로 아끼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명분이 있으면 씁니다. 돈은 필요할 때 쓰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씨 뿌리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거둬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은 돈 모으고 재산 불리면 그것으로 거둔 삶 아니냐고 말하지만, 잘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가 바로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그전까지는 무엇을 하든 씨앗을 뿌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기부를 권하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거창한 가치를 말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진정 위한다면 기부하라고 말합니다. 부모 재산을 물려받은 부잣집 자식들이 떵떵거리고 살다 쉰 살이 되기도 전 가산을 탕진하는 사례도 자주 봤습니다. 어떤 사람은 범죄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나누면서 사는 모습을 어렸을 때부터 보고 배우고 자라면 자손도 그렇게 합니다.” 
 이 회장은 “그런 점에서 어머니한테 배운 게 많다”고 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어머니는 그 어려운 전쟁 통에도 문 앞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숨겨뒀던 쌀로 죽을 끓여 이웃에게 나눠줬습니다. 어린 나이였는데도 누군가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눠준다는 일이 그렇게 흐뭇하고 보람된 것인지 체험으로 배웠습니다. 또 평생 내 가슴에 잊히지 않는 말이 있는데, 경기여중에 다닐 때 종로구 내수동 종교교회 장로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미국이 한국을 도우러 올 때 배에 구호물품을 잔뜩 싣고 왔다 갈 때는 빈 배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배에는 축복과 은혜가 가득 실려 있다. 그런 축복과 은혜 덕분에 미국 사람들은 베풀면 베풀수록 부자가 되는 것이다.’ 대략 이런 말이었습니다.
나 역시 내 손에 뭔가를 잔뜩 들고 왔다 갈 때는 빈손으로 돌아가게 될 텐데 그 손에 축복과 은혜, 감사의 마음이 가득 실려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주변에서 기부하는 사람들을 보며 배운 것도 많습니다. 서울대 법대 장학재단 모금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생 출신 할머니였습니다. 평생 악착같이 돈을 모은 그는 주변의 소개로 알게 된 내게 500만 원을 기부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5억 원이 넘는 큰돈이었죠. 본인 말처럼 ‘더럽게 번 돈’일 수 있지만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곳에 선뜻 내놓은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기부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머니는 얼마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큰돈이 아니어도 힘들게 모은 돈을 좋은 일에 쓰는 것만큼 가치 있는 일도 없다는 생각이 강해졌습니다.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옷 입고, 좋은 구경하면 좋지만 사람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아무리 욕심을 채워도 끝은 결국 죽음이라는 건 누구나 예외가 없다는 말입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 여든에 결혼했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연애도 했는데 어찌어찌하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남편은 서울대 법대 동기동창입니다. 학교 다닐 때는 몰랐는데 졸업하고 한참 뒤 동창 모임에서 만났죠. 사별한 뒤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검사장 나갈 나이에 때려치우고 변호사를 했는데 돈 벌 줄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신혼 4년 차인데 좋으십니까. “나쁘지 않지요 뭐.(웃음) 혼자 살 때는 잘 때 전깃불 끄는 것도 힘들었는데 불도 꺼주고. 잠자리도 봐주고. 이불도 덮어주고.” 손도 잡고 주무십니까. “손을 왜 잡아요. 다리는 걸고 잡니다.” 기부할 때는 뭐라고 했나요. “우리 부부는 철저히 부부별산제입니다. 기부를 결심했으면 되도록 빨리 하라고 하더군요.

광원목장을 일군 이수영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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