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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세대 탐구 생활

저무는 하늘에 기러기는 슬피 울며 날아 가는도다

by 영숙이 2020.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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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무는 하늘에 기러기는 슬피 울며 날아 가는도다>

                                              (김인숙. 울산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처용수필 제2호. 1996. 겨울)

 한글을 깨친 이래로 친척들과 주변 사람들 사이에 글 잘 쓰기로 이미 호(?)가 난 딸 아이는 무슨 글이든지 닥치는 대로 읽고 척척 외워댈 뿐만 아니가 나믈대로 그 글을 소화해서 대화에 잘 써먹는 재주로도 이미 한 경지에 이르러 있다. 흡혈귀 시리즈를 한동안 탐독하고서 흡혈귀 이야기를 잔뜩 써서 보여주거나, 탐정소설을 감명 깊게 읽은 후에 한동안 그럴싸한 단편 탐정물을 시도 때도 없이 써내는 데는 그저 입이 벌어질 따름이다. 다만 문제는 어려운 문자의 뜻을 초등학교 학생 수준으로 풀어내다 보니 종종 어른들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웃게 만들거나 곤혹스럽게 만든다는 점이다. 

 언젠가 제 아빠가 신문을 보다가, "결혼기념일에는 엄마랑 어디 가까운 데라도 해외여행을 가 볼까?"하고 아이에게 말을 걸었는데, "아빠 가시더라도 태국에 매춘관광은 절대로 가지 마세요."하는 딸아이의 맹랑한 말이 냉큼 뒤따랐다.

 "엉?!"

 늠름한 아이의 말에 아빠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잊었다. 

 "태국의 고급 매춘부의 30%가 에이즈에 감염되어 있구요. 하급 매춘부의 70%가 에이즈에 감염되어 있대요. 그러니 매춘관광은 절대 안돼요."

 아이는 이제 사뭇 단호하기까지 하다. 

 "음 어디서 그런걸 알았니?"

 "먼 나라 이웃 나라에서지요."
 "음, 너 저, 매춘이 뭔지, 음, 아니?"

 아빠가 오히려 말을 더듬는다. 

 "사람을 사고 파는 거지요. 노예들처럼요."

 "알았다. 아빠 거기 절대 안 갈께."

 벌개진 얼굴로 다가온 애 아빠는 부녀 간의 대화에 웃음을 감출 수 없어하는 나에게, "이제 우리는 태국 관광 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게 좋겠어."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대개 이런 식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종종, "아이에게 그 책을 사다 준 사람이 당신이 아니었느냐", "그런 내용이 어린 아이에게 교육적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했느냐", "내용을 끝까지 읽어 보기나 했느냐". "아이가 그렇게 말할 때 큰 소리로 웃은 것이 아이에게 어떤 정서적 영향을 미칠 지 생각이나 해 보았느냐"는 등으로 입씨름을 한다. 그래봤자 이미 아이 머리 속에는 이것 저것 다 들어가고 만 후이고 받을만한 정서적 충격은 다 받은 후이겠지만 말이다. 

 어느 일요일 오후, 한동안 제 방에서 두문불출하던 아이가 상기된 얼굴로 다가왔다. 손에는 여러장의 종이를 들고서.

 "엄마 나 시를 많이 썼어요. 한번 봐 주세요."

 이럴 경우 일단 읽고 칭찬부터 하는 엄마이긴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목련은 눈물을 흘리며 뚝뚝 떨어지는 도다.'에서부터, '저무는 하늘에 기러기는 슬피 울며 날아가는도다'에 이르기까지, 다섯편이 넘는 시는 그야말로 내가 예상할 수도 없었던 이미지와 표현들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었다. 나는, "잘썼네."라는 궁색한 칭찬 한마디를 간신히 하고서는 아이의 눈치를 보기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혹시 엄마가 거짓말하는 것을 눈치 채고 마음에 상처를 받을까봐. 그러나 아이는 그날따라 제풀에 몹시 상기되어, "그렇지? 잘썼지? 그럼 더 쓸께요." 하면서 가는 것이었다. 

 저녁이 다 되어 나는 아이에게 슬그머니 이렇게 물어보았다. 

 "혜전아, 오늘 햬전이가 쓴 시들은 문맥은 다 좋은데, 음 지금까지 쓰던 시와는 좀 다른 것 같애. 그렇게 특별하게 쓴 무슨 이유가 있니? 앞으로 그렇게 계속 쓸 생각이니?"

 "엄마도 느끼셨구나. 내가 오늘 위인전을 읽었는데요. 이항복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런데 이항복은 문장이 좋기로 이름이 나서 이미 여덟살에 임금님 앞에 불려 갔대요. 임금님이 재주를 시험하기 위해서 어전에서 글을 짓게 하셨는데요, 그 시들이 너무나 훌륭해서 임금님이 감탄하시고 상을 내리셨대요. 나도 여덟살이잖아요. 그 글을 읽으니 나도 그렇게 좋은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서 단번에 여러 시를 썼지요."

 이항복의 한시를 어린이 위인전집에다 원문 그대로 실을 수는 없으니 그것을 번역해서 "......하는도다."식으로 써 놓았던 것이고, 그것이 딸아이를 자극하여 그런 투의 시를 쓰게 한 것이었다. 

 하얀 스펀지와 같은 아이를 보는 우리 어른들은 스펀지의 한없는 흡수력 때문에 종종 안스럽고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 베이비 붐 세대로서 어렸을 적 이야기를 써 나가는 입장에 있다보니 다른 사람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다. 베이비 붐 세대의 어린 시절 이야기 뿐만 아니라 교육과 인성, 육아에 대한 이야기도 관심이 지대하다. 왜냐하면 비슷한듯 하면서도 똑같은 이야기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특히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는 비슷한듯 하면서 정말 다르기 때문이다. 강원도 태백산맥이 시작되는 근원지에 가면 물이떨어지는데 떨어지는 3군데의 물이 아주 근소한 차이로, 0.1센치 차이로, 어디로 떨어지느냐에 따라, 동해로 갈 수도 있고, 서해로 갈 수도 있고, 남해로 갈 수도 있다고 한다. 부모님이 아이를 향한 양육이 어디를 향해 있느냐에 따라 아이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향한 부모의 기대는 어느 시대, 어느 상황이라도 부모의 기대가 어떠하냐에 따라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그만큼 아이를 향한 부모의 기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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