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example.com/url/to/amp/document.html"> 나팔꽃 우산
본문 바로가기
베이비붐 세대 탐구 생활

나팔꽃 우산

by 영혼의 닻을 찾아서 2020. 11. 7.
728x90
반응형

 

 

<나팔꽃 우산>

                                                        (김채영. 수필가. 처용수필 제2호 1996. 겨울)

 딸애를 마중하기 위해 우산을 챙기다 창고 속에서 생소한 우산 한개를 발견했다. 아, 이 우산도 있었지! 얼마전 친정어머니에게 물려 받은 우산이다. 평소 어머니가 아끼던 우산이라 한사코 사양했지만 새 것이 아니라 그러냐기에 받지 않을 수 없었던 우산.  

 알록달록한 격자 무늬가 새겨진 어머니의 우산은 손잡이 장식이 꼭 마음에 든다. 탄탄한 나무로 섬세하게 새겨진 목각인형이 품위를 더해준다. 얼핏보면 새 우산 같지만 우산을 받쳐주는 대의 관절이 누르무레하게 녹이 슬어있어 십 년이라는 세월을 말해주는 듯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몸이 불편하셔서 거의 우산을 쓴 적이 없으니, 꽤나 정갈한 편에 속했다. 어머니는 애당초 우산을 쓴다는 것은 사치일 정도로 고단한 삶에 젖어오신 분이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적적함 때문이었을까. 지난날 우리 집은 여관 같은 구실을 하던 곳이었다. 시골의 먼 친척이나 이웃까지 쌀말이나 들고와 묵으면 내집이었다. 어머니는 사람이 들끓는 것을 낙으로 삼고 평생을 살아오셨는지 모르지만 그런 혼잡스러움이 못견디게 싫었다. 

 비오는 날 아침이면 우리 집은 한바탕 우산 전쟁이 일어났다. 군식구에 아이들이 넷이나 되었으니 구멍난 우산, 살 부러진 우산까지 서로 차지하려고 북새통을 떨었다. 

 학교가 파할 무렵 예고 없이 소나기라도 내린다면 교실 유리창 밖을 내다보며 안절부절 못했다. 매사에 민감하다 못해 결백증까지 갖고 있던 사춘기 시절이었다. 벌떼처럼 달려들 소낙비를 생각하면 여간 몸서리쳐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항상 교문 밖과 운동장, 심지어는 복도까지 우산을 가져온 부모들로 성시를 이루었다. 그러나 단 한번도 내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 때는 친구들의 우산에 끼어서 왔지만 가끔씩 어머니를 기다린다고 거짓말을 하고 학교에 남아 있기도 했다. 

 그 즈음 내게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비오는 날이면 아이스크림을 사먹곤 했던 것이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먹는 빙과류는 입주변을 얼어붙게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어머니를 향한 일종의 소리없는 반발이 아니었을까. 돈되는 일이라면 어떠한 노동도 서슴치 않는 남자처럼 강한 나의 어머니. 나는 그런 억척스러운 어머니보다 비오는 날 우산을 챙겨줄 따스한 어머니가 그리웠다. 싸늘한 날씨에 비바람까지 거셌지만 내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이 뜨거웠다. 그 슬픈 열기를 차가운 아이스크림으로 조금씩 조금씩 식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십년 전의 일이다. 큰 올케가 한꺼번에 여러 개의 우산을 사들고 들어왔다. 그때 어머니는 출가외인인 나와 동생에게 섭섭함을 호소하셨다. 어머니까지 식구가 여섯인데 다섯개의 우산을 사왔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그렇다고 해서 큰 올케를 탓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다리가 불편하시기에 우산보다 지팡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성치 않은 걸음걸이에 지팡이를 짚고 우산까지 쓴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어머니도 참, 별 할 일도 없는 양반이 비오는 날은 그냥 집에 계시면 될 것을. 

 나는 속으로 그러고 말았는데, 동생은 사려 깊게 다음날로 화려한 색상의 고급 우산을 사들고 와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렸다. 환한 우산을 나팔꽃처럼 폈다 접었다 하시던 어머니의 즐거운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어머니는 젊은 날 늘 비를 맞고 살아오셨기에, 우산 한 개쯤 당신 몫으로 챙기고 샢었던 것이리라. 어머니의 속내를 짐작 못했던 나는 얼마나 무심한 딸이었던가. 

 "우산이 있어도 내게는 무용지물이란다."

 어머니가 우산을 주실 때 꼭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사느라고 바빠서 우산 한 번 챙겨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말 정도는.

 어머니는 애초에 그런 애잔하거나 멋스런 표현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비오는 날 장삿길에서 돌아온 엄마와 생쥐꼴로 마주쳐도 '에구! 내 새끼' 하면 그만이었다. 그 한마디는 안스러움과 미안함을 대신하는 어머니만의 짧고 편리한 애정 표현법이었던 것이다. 

 그날 어머니는 선뜻 딸에게 우산을 건네주기가 그다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전처럼 우산이 귀할 것도 없는 세상에 그것도 쓰던 우산이라니. 내 기억으로 그것은 어머니가 내몫으로 주신 유일한 우산이었다. 말씨가 보드라운 것도 아니고, 화술이 좋지도 못한 어머니로서 딸의 묵은 아픔을 달래기 어렵다는 것도 알고 계셨던 것이다. 헌 우산이나마 슬그머니 비 맞은 딸의 기억을 보듬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 창 밖에는 추억 속의 그날처럼 소나기가 내리고, 학교 길은 온통 마중가는 우산 무리들이 나팔꽃 밭을 이룬다. 길모퉁이에 우산 한개가 뒤집힌 채 애처롭게 딩굴고 있다. 비바람에 상한 나팔꽃 잎처럼.

 따지고 보면 비와 상대적인 개념을 가진 양산이란 것도 결국 우산에서 분화된 것이리라. 모네의 그림 '파라솔을 든 여인'은 18세기를 배경으로 제작한 외화의 한 컷을 연상하게 한다. 그무렵 우산은 서민들의 애환이 깃든 생활도구와는 차원이 다른 용도로 쓰여졌다. 유럽에서는 타조의 깃털과 호화로운 레이스로 장식된 우산이 귀족들의 사랑놀음을 위한 환상적인 소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품위를 위한 소품이나 멋내기로 썼던 비단 우산도 지금은 부럽지 않다. 오직 어머니의 우산만이 오랜 객지 생활의 외로움에 지친 내게 보습제가 되어 추억 속으로 데려갈 것이다. 나는 우산 한개를 옆에 끼고 어머니의 나팔 꽃 같은 우산을 활짝 핀다. 

 비가 그치면 우산도 한송이 낙화로 지고 말 것이다. 꽃 피는 것이 짧은 순간이라 舜이라고 불린다는 나팔꽃처럼 하루살이로 단명하는 우산 꽃. 

 이제는 우산에 대한 아픈 추억들과 화해를 하고 싶다. 이 비가 그치기 전에 '''. 

◐ 우리나라와 이탈리아 사람들의 어머니 사랑은 대단하다. 그만큼 어머니들이 희생했고 그 희생으로 이만큼 살게 되었고 그런 희생에 대해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젊었을 때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 사랑하는 여자를 찾기 위해 또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애쓰는 내용이 많았고 우리나라 영화는 엄마를 찾기 위해 또 어머니를 위해 애쓰는 내용이 많아서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특히 결혼을 하고 난후 우리 집 파트너의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에 대해 이해하면서도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었다.

 이제 돌아보면 우리나라의 정서 뿐만 아니라 돌아보건데 우리나라 어머니들의 기도와 희생으로 우리나라가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또 우리 삶의 근간임을 부인할 수 없다.

 교회에 기도를 갔다가 늦게 왔거나 철야 기도를 한날에 집에 와서 보면 무언가 평소와 달리 비어 있는 곳이 있었다. 그때에는 이런 말이 절로 나왔었다.

 "아이고. 애비 애미 없는 놈은 어떻게 살꼬"

우리가 평범하게 잘지낼 수 있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럴 때마다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난다. ◑

728x90
반응형

'베이비붐 세대 탐구 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 ~ ㄸ ㄹ ㅎ  (16) 2020.11.09
저무는 하늘에 기러기는 슬피 울며 날아 가는도다  (7) 2020.11.08
들꽃  (18) 2020.11.06
박꽃  (14) 2020.11.05
양초 한자루가 밝혀주는 세상  (21) 2020.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