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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세대 탐구 생활

그대의 카드를 영원히 간직하리

by 영혼의 닻을 찾아서 2020.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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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카드를 영원히 간직하리>

                                  (김인숙. 울산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처용수필. 제2호. 1996. 겨울)

 국민학교.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초등학교를 다닐 적에 나는 전학을 하게 되었다. 2학년 봄이었다. 새 학교로 가는 날, 어머니는 딸의 기를 살리느라 어떻게나 딸 치장을 해주셨던지, 내가 선생님을 따라 교실로 들어섰을 때 새로 사귄 친구들이 남자애 여자애 할 것 없이 감탄어린 탄식을 내뱉을 정도였다. 새로운 환경에서 기대 이상의 선망어린 감탄과 호의적인 시선을 받게 되자, 긴장하고 있던 어린 마음은 그 당장 어린애다운 우쭐함과 자신감으로 가득해 졌고, 서먹서먹한 감정은 새 친구들을 금새 사귈 수 있으리라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첫 시간은 산수 시간이었는데, 마침 다니던 학교에서 이미 배운 산수 문제를 풀게 된 것이 나의 자신감에 날개를 하나 더 달아주는 계기가 되었다. 손을 들어 대답을 하고, 문제를 풀고, 구구단을 외고 · · · 그러는 사이 어느새 첫 시간이 지나갔다. 쉬는 시간이 되자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새 친구인 나를 둘러싸고 이것 저것 묻기 시작했다. 얼마 있지 않아 한 예쁜 여자애가 다가와서 쪽지를 가만히 내 책에 놓고 가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할 말이 있으니 좀 나와 보라."라고 쓰여져 있었다. 

 내 주변에 있던 이아들의 눈빛과 표정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며 나는 말없이 그애를 따라 학교 건물 뒷편으로 나갔다. 그곳은 앞 운동장의 소란스러움과는 완전히 차단된 공간이었다. 

 이끼가 두문드문 낀 한적하고 좁다란 마당에는 비둘기 울음 소리만 구구 구구 들려올 뿐이었다. 우리는 교사 벽을 등에 이고 나란히 섰다. 그 애는 주머니에서 무슨 종이를 꺼내더니 아무 말 없이 그걸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그 종이를 펴서 읽어 보았다. 

 지연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도 나를 사랑하느냐?   - 박 기 출 -

 기출이는 첫 시간에 일어서서 "차렷! 경례!"를 씩씩하게 외치던 급장 아이였다. 그리고 급장에게서 받은 그 편지를 나에게 내민 그 예쁜 아이는 그 반의 부급장 주지연이었다. 나는 지연이에게 그 편질 되돌려 주며, "알았어."라고 대답했다. 마침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왔다. 둘은 자못 심각하고 착잡한 표정으로 묵묵히 교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나중에 나는 친구들을 통해, 기출이와 지연이는 커서 결혼하자고 맹세한 사이라는 말을 들었다. 기출이의 예비 색시인 지연이는 전학 온 나의 존재로부터 어떤 위기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지연이는, Don't touch him, please! He's mine!" 하고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기출이에게서 받은 사랑의 편지보다 더 확실하고 효과적인 경고장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경고를 통해 그녀의 기득권을 이해했고 또 사랑의 질서를 이해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내가 "알았어."라고 대답했을 때 이미 우리는 '게임은 이제부터'하는 것을 내심 알고 있었다. 사랑은 타협과 기득권과 질서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홉살 여자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더구나 '기출이의 자유의지'라는 강력한 변수가 남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출이는 이제 오히려 돌이킬 수 없이, 나의 각별한 관심권으로 성큼 들어서 버린 것이다. 

 물론 그 또래의 어린이의 하루하루란 이것저것 신나고 재미나는 관심거리로 가득하기 마련이어서, 그 후로 내가 이 일에만 신경을 곤두 세운 것은 물론 아니었다. 더구나 지연이가 첫날부터 일종의 경고장을 보낸 바도 있으니, 또 그런 상황에서 내가 드러나게 기출이의 관심을 끌려고 애쓴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바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연이와 나 사이의 갈등은 매우 은근하면서도 팽팽한 신경전으로 진행되었다. 날마다 서로의 옷차림에 신경을 쓴다든지, 시험 성적을 은근히 비교해 본다든지, 아니면 발표에 뒤지지 않도록 애를 쓴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딱히 기출이 만을 염두에 둔 겨룸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간의 자존심이 걸린 한판 승부였다. 

 다음 학기의 학급 대표 선거에서 기출이는 반장, 그리고 나는 부반장이 되었다. 기출이의 파트너는 이제 더이상 지연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지연이가 나에게 내밀었던 편지의 사연과 의미를 늘 잊지 않고 있었다. 

 2년이 지난 후, 겨울 방학이 다가오고 크리스마스 캐롤이 거리를 가득 채우던 무렵 , 난 친구들에게 전할 예쁜 카드를 학교로 들고 갔다. 기출이는 그 카드 중 하나를 빼앗다시피 가지고 갔다. 아마 내가 그러기를 방조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다음날 나는 그 에에게서 다른 카드 한장을 받았다. 카드에는 다음의 글이 적혀 있었다. 

 그대의 카드를 영원히 간직하리. - 박 기 출 -

 지연이는 6학년이 되자 근무지를 옮기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전학을 갔다. 중학교에 다닐 적에 뜻밖에도 지연이가 한번 나를 찾아 온 적이 있다.

  그리고 · · ·  나는 대학에 들어 간 후, 한번 어렵사리, 기출이를 찾아 만난 적이 있다. 

 지연이는 왜 그 먼길을 줄여가며 굳이 나를 찾아왔던 것일까?

 그리고 나는 왜 그태여 그 먼 시절을 돌이켜 기출이를 찾았던 것일까?

 

◐ 전학 그리고 초등학교 때의 추억들. 영숙이도 그런 이야기들을 적었다. 잊을 수 없는 개인적인 이야기들이지만 누구나가 다 간직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이다. 

  영숙이도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 명숙이에게 전해주라는 쪽지를 받은 적 있다. 쪽지에는 ~ 사 랑 해 ~ 라고 써 있었다. 명숙이는 한약방 집 딸이었는데 입성도 깔금하고 얼굴도 하얗고 복스럽게 생긴 아이였다. 반면에 영숙이는 그냥 시골아이로 까맣게 마르고 바지는 짧아서 발목이 드러나도록 깡똥하고 한철에 한벌 옷으로 입고 있는 촌 아이였다.

 영숙이는 중학교 2학년 때 초등학교 살던 마을을 떠났지만 명숙이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 마을에 계속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체머리를 휘휘 휘둘렀다. 영숙이에게 쪽지를 전해 주라던 그 아이들이 얼마나 따라 다녔던지 결혼하고 신용금고 이사장 부인으로 대전에 살면서 전화로 말꺼내는 것도 치를 떨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아름다운 추억을 아름답게 남겨 두기 위해서는 더이상 과거와 과거의 추억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주어진 현재의 시간을 최선을 다해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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